신진서(22)와 커제(25)는 세 살 차이다. 각각 27개월, 40개월째 연속 자국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 최정상을 다투는 사이이다 보니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중요 대목에서 자주 마주쳤고, 어느 한 쪽은 상처를 입었다.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 개입된 코멘트도 매번 여과 없이 오고갔다. 그들끼리 주고받은 어록(語錄)을 정리해 봤다.

▲ 제4회 바이링배서 패권을 다투고 있는 신진서(왼쪽)와 커제. 둘 간의 첫 메이저 결승전이었던 이 대결서 커제가 2연승으로 우승했다.
①“커제 별 것 아니에요”
2016~17년 무렵 신진서가 비공식 자리에서 몇 차례 했던 말이다. 세계 최고의 2000년생 유망주로 각광 받으면서도 아직은 박정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시점이었다. 세계 정상의 꿈을 품은 신진서에게 세계 정복의 계단을 착착 밟아가고 있는 커제는 당연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무렵 필자는 신진서로부터 두 번에 걸쳐 “커제 별로 두렵지 않아요”란 말을 들었다. 첫 번째는 2016년 11월 제21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8강전서 멍타이링을 꺾고 4강 티켓을 확보한 직후, 그 대국이 열렸던 항저우 시 대회장에서였다. 신진서는 그 다음날 당이페이에 역전패하며 4강행에 실패했다.

▲ 2018년 3월 17일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 1회전서 신진서(왼쪽)가 1착을 놓고 있다. 신진서 대 커제 다섯 번째 대결이던 이 바둑에서 커제가 승리했다.
두 번째는 꼭 1년 뒤 도쿄에서 열렸던 제22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때였다. 신진서는 그 보다 보름 전인 10월 30일 갑조리그서 승리, 커제와의 상대전적을 2승 1패로 역전시킨 뒤였다. 하지만 11월 13일 LG배 8강전서 둘이 맞붙은 결과 승자는 커제였다. 이 무렵의 신진서는 커제를 빨리 뛰어넘고 싶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분석된다.
②“신진서는 아직 서툴고 부족하다”
제22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8강전서 패한 이후 신진서는 커제를 상대로 6연패의 늪에 빠진다. 통산 2승 7패로 크게 몰린 신진서에게 커제가 더욱 높은 산으로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그 6연속 패배의 정 가운데에 제 4회 바이링배 결승 3번기가 있었다. 2019년 1월이었다.
구쯔하오를 제친 19세 신진서, 천야오예를 물리친 22세 카제의 대결은 현역 세계 1인자와, 밀레니엄 세대 ‘미래권력’ 간의 대결로 시선을 모았다. 둘 간 첫 메이저 결승이기도 했다. 당시 둘 간 상대전적은 신진서 기준 2승 4패였다. 1월 15일 열린 결승 1차전서 신진서는 좋았던 바둑을 내주었고, 이틀 뒤의 2국마저 흑으로 져 0대2로 물러났다. 2018년 12월 제1회 천부배서 천야오예에게 1대2로 패한데 이은 2연속 세계대회 결승 패배였다.
진짜 뼈아픈 대목은 폐막식 때 커제의 우승 소감이었다. 커제는 우승 트로피를 자랑스럽게 치켜든 채 “신진서는 아직 서툴고 부족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 술 더 떴다. “나는 신진서 나이 때 세계대회 우승을 세 번 했다”고 말한 것이다. 커제의 세계 메이저 7회 우승, 신진서의 두 차례 준우승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승자의 아량이나 겸손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다.

▲ 제23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즈 8강전(2018년 10월 2일)서 신진서(왼쪽)와 커제가 대결 중이다. 커제 승.
③“젊은이여, 고작 이 정도인가?”
신전서는 2019년 10월 30일 열린 제24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준결승서 커제를 눌렀다. 지긋지긋하게 눌러왔던 커제전 6연패의 사슬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그 고비를 넘은 신진서는 결승서 만난 박정환을 2대0으로 꺾고 세계 메이저봉 첫 등정이란 숙원을 풀었다.
하지만 이듬해 2020년 제25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서 둘은 운명처럼 또 만났고 이번엔 커제가 승리했다. 16강전이었다. 신진서는 전기(前期) 챔피언은 이듬해 대회서 조기 탈락을 면치 못한다는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때도 신진서는 커제로부터 가슴에 못이 박히는 한 마디를 또 들어야 했다.
커제는 웨이보라는 개인 SNS에 이런 내용을 올렸다. “젊은이여, 젊은이여. 이 정도냐?”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의역 하자면 “젊은 애송이야, 이 정도 실력에 그치다니 너 별 것 아니구나” 쯤 된다. 경멸의 뉘앙스가 강하게 전달돼 온다. 그해 LG배 본선 모든 대국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처음 전면 비대면(非對面)으로 치러졌다.

▲ 2019년 10월 30일 열린 제24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준결승전. 신진서(오른쪽)가 커제에게 쾌승, 상대전적 6연패 사슬을 끊어냈다. 신진서는 이듬해 열린 결승서 박정환을 누르고 생애 첫 메이저 세계제패를 이뤘다.
④ “여러번 우승 선사해준 신진서에게 감사”
두 숙적은 2020년 11월 제2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즈 결승서 또 다시 맞닥뜨렸다. 이 대국도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결승 1국에서 사고가 터졌다. 기기 오작동으로 신진서의 21번째 수가 미끄러져 1선에 놓이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 속칭 ‘마우스 미스’ 해프닝이었다. 바둑은 끝까지 진행됐지만 초반 대미지가 워낙 커 손실을 줄일 수 없었다. 충격은 이튿날 2국으로까지 이어져 신진서는 질 수 없는 바둑을 반 집 역전패, 우승 꿈을 날렸다.
베이징 기원서 따로 열린 우승 인터뷰에서 커제가 밝힌 소감은 이랬다. “신진서와 세계대회에서 둔 판이 7~8번쯤 되는 것 같은데 계속 이겼다. 여러 번의 승리를 안겨준 신진서에게 매우 감사하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의 세계 우승은 많이 줄었을 테니까. 신진서를 이기는 게 그렇게 쉬운 줄 몰랐다. 그에게 ‘좀 더 노력해야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가끔 내가 둔 바둑이 AI와 비슷한 걸 보면 내가 좀 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⑤“커제의 도발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2020 삼성화재배 종료 시점 커제전 상대전적 3승 10패. 하지만 여기서부터 신진서의 맹 반격이 시작된다. 2020년 12월 갑조리그서 브레이크를 건 뒤 제22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국(2021년 2월 25일)이 변곡점이 됐다. 한국 팀 4번 주자로 나간 신진서가 중국 팀 최종 주자 커제를 완파, 5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 지난 2월 25일 제23회 농심배서 커제와 원격 대국 중인 신진서. 신진서는 이 승리로 한국 팀 2연패를 견인하면서 커제와의 상대전적도 7승 11패로 바짝 따라붙었다.
국후 기자회견에서 신진서가 입을 열었다. “커제가 나를 이길 때마다 도발적인 말을 했다. 결승서 온 힘을 다해 싸워 패하면 그 자체만으로 너무 힘든 법이다. 그의 자극적 언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좌절해 무너졌을지 모른다. 커제가 도발적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더 열심히 노력했고 성장했다. 삼성화재배 때의 아쉬운 패배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 승리한 것은 커제 9단 덕분인 셈이다. 그에게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예전엔 커제에게 실력 부족으로 많이 졌지만…”
2021년 11월 10일. 신진서와 커제 두 숙적은 제26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준결승서 또 격돌했다. 신진서는 한 주일 전 박정환과 겨룬 삼성화재배 결승서 역전패, 준우승에 그친 터여서 커제전 승리는 더욱 돋보였다. 신진서는 결승서 양딩신마저 제치고 2년만에 LG배 우승을 되찾았다. 커제와의 준결승전이 결정적 고비였던 셈이다. 신진서는 그러나 커제전 승리 후 가진 인터뷰에서 자극적인 소감은 내놓지 않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커제와는 결승서 만나는 것 보다는 4강전서 싸우는 쪽이 아무래도 편하다. 커제가 종반에 남았던 시간 15분을 아끼지 않고 미리 다 써버린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커제에겐 예전엔 실력이 부족해 많이 졌다. 하지만 2020 삼성화재배 결승전 패배는 지긴 했어도 내용적으로 밀렸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 커제가 신진서와 2020중국 갑조리그 15라운드 온라인 대국에 열중하고 있다(2020년 12월 13일). 신진서의 승리. 두 기사는 이 판을 포함해 갑조리그서 총 네 차럐 격돌, 2승 2패를 기록하고 있다.
➆ “신진서 저 친구 인간 맞아?” “커제, 말을 좀 조심해야지.”
2022년 제23회 농심배서 한국 최종 주자 신진서의 질주가 매서웠다. 그는 대회 막판 파죽의 4연승으로 전년도(5연승)에 이어 합계 9연승을 장식하며 2년 연속 한국 우승을 결정지었다. 중국 최종 주자인 커제와는 2월 26일 격돌해 신진서가 쾌승했다. 팽팽하던 과거와 달리 신진서의 일방적 승리였다. 한 중 프로기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신진서의 커제 상대전적은 이제 7승 11패로 좁혀졌다. 2020년 12월 이후만 따지면 4승 1패로 칼자루를 바꿔 잡았다.
패배한 커제가 중국 바둑 전문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런 실력이면 신진서를 대적할 수 있는 기사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수준이 워낙 강해서 내가 어떻게 졌는지 모르겠다. 전판을 통틀어 문제수가 하나도 없었다. 반상을 지배하는 힘이 알파고보다 더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AI 일치율 71%를 보이다니 신진서 그는 인간인가?”
얼핏 보면 승장(勝將)을 칭송하는 글이자 무조건적 항복 선언이다. 자기를 이긴 적을 이처럼 극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제와 몇몇 중국 프로기사들은 신진서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타이밍을 가지고 룰을 어겼다고 떼를 썼고, AI 부합도를 과장함으로써 치팅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신진서는 점잖으면서도 따끔한 대응 멘트를 날렸다.

▲ 신진서가 2020 삼성화재배 결승 1국(2020년 11월 2일) 커제전서 초반 ‘마우스 미스’를 범한 뒤 낭패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커제가 우승한 직후 “내게 여러 번 우승을 안겨준 신진서에게 감사한다”며 조롱 조로 말해 비난을 받았다. (사진=한국기원)
“커제전 바둑 내용은 프로기사라면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일류와 대국하면 실수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았다. 커제 9단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커제의 회견 중 일부는 중국 팬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었으면 한다. 유명한 기사일수록 언행을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되돌아 보면 전체적으로 커제의 무례하거나 경우에 어긋난 언사(言辭)가 많이 눈에 뜨인다. 대조적으로 신진서는 점잖게 한 두 마디 하거나 아예 침묵했다. 소속 국가가 다르고 둘도 없는 경쟁 관계라고 해서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바둑의 정도(正道)가 아니다. 커제가 좀 더 성숙된 모습으로 대가다운 풍모를 보이며 신진서와 천하를 다투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