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다른 어떤 승부 못지않게 숫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임이다. 착점 번호부터 시작해 집의 수효, 참고도 수순 등이 모조리 숫자로 표시된다. 심지어 중간 판세조차 ‘흑 3집반 우세’하는 식으로 계량화해 판정을 내리는 시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의 통계적 자료화 작업은 생각만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통계의 스포츠로 불리는 프로야구에 비하면 말 할 것도 없고, 농구 배구 등 웬만한 스포츠 종목들보다도 훨씬 통계 활용도가 낮다.

▲ 국제무대 라이벌 창하오(왼쪽)와 대결하고 있는 이창호. 최연소 세계대회 우승 1위, 최다 반집승 1위 기록을 비롯해 최다 타이틀, 최연소 입단, 연간 최고승률 부문 등 주요 기록 부문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같은 현상은 어디에 기인할까.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스포츠와 달리 동작(motion)을 계량화할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란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투수가 던진 공 하나에도 투구 속도와 방향, 구질(球質) 등 이 잡듯 세분하는 야구를 따를 수 없다. 타격과 관련된 통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야수(野手)들의 수비 평가도 고성능 기계 성능 리스트처럼 언제든지 뽑아볼 수 있다. 바둑으로선 흉내낼 수 없는 조건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둑계의 인식과 노력 부족이다. 통계자료가 관전 재미를 배가시키고 세일즈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국제대회에서 한 수에 50분 장고가 등장했다고 할 때 그 기록의 가치를 가름할 자료가 전무하다. 종전 기록을 넘어선 최장고 신기록인지, 종전 기록에 비해 얼마나 모자라는지 등을 곁들이면 팬들이 얼마나 흥미 있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나마 존재하는 일부 자료들을 챙겨 바둑 관련 진기록들을 정리해봤다.
▨역대 최다 수수 대국은 397수
바둑판의 칸 수는 모두 361개. 사람들도 그것이 반상에 놓일 수 있는 돌 수의 한계치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바둑엔 패(覇)와 후절수란 요물이 존재해 이론상 무한 반복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두어진 공식 대국 중 최다 수수(手數) 대국은 몇 수까지 이어졌을까. 한국기원에 따르면 공식전 최다수수 바둑은 2017년 7월 13일 열린 제19회 농심배 국내 예선 5회전 김명훈(백) 대 최철한(흑) 대국으로 장장 397수까지 이어진 끝에 백의 13집 반 승리로 끝났다.

▲ 조훈현(오른쪽)이 동갑 라이벌 서봉수를 상대로 대국하는 모습. 조훈현은 최다 대국, 최다승, 최다 타이틀 획득 등 통산 부문 기록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당연히 최소 수수 대국 기록도 있어야 하는데 이 부문은 미상(未詳)이다. 2001년 바둑연감엔 김승준 4단이 제18기 국기전 본선서 강훈 8단(이상 당시 단위)에게 2수만에 불계승한 기록을 수록했는데 이후 연감에선 이를 빼버렸다. 도전기 최단 수수 불계승 기록 (75수 이창호 대 조훈현. 97년 제15기 대왕전 도전 1국)도 함께 실렸지만 역시 사라졌다. 그 해 연감에 실린 최다 수수 승리는 384수(장수영 대 서능욱. 94년 2기 박카스배 본선)였다. 2000년대 이후 연감에선 이 항목도 사라졌다.
▨최다 반집승 기사는 이창호
반집 승부는 아마도 바둑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장면일 것이다. 야구의 역전 홈런이나 농구 결승 버저비터, 테니스 매치포인트에나 비견할 수 있다. 최다 반집승의 영광은 모두가 예상한대로 ‘신산(神算)’ 이창호의 몫이었다. 이 9단은 생애 통산 67회의 반집 승리를 거둬 서봉수(53회) 조훈현(49회) 유창혁(40회) 박영훈(38회)를 따돌렸다(2022년 1월 31일 현재).
기사별 총 대국수 대비 반집 승 비율과 총 승수 대비 반집 승 비율을 계산해 보았다. 이창호(1828승 736패) 9단의 경우 총 대국수 대비 반집 승 비율은 2.61%, 총 승수 대비 반집 승 비율은 3.67%로 각각 집계됐다. 조훈현(1959승 9무 837패) 9단의 1.75%, 2.50%와 뚜렷이 앞섰다. 조훈현은 힘과 감각이 막강한 대신 종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창호는 귀신같은 끝내기 솜씨의 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반집 승부 빈도는 이 가설이 사실임을 통계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 전성시절 이세돌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2014년 14억원을 넘게 벌어 연간 상금 통산 1위에 오르는 등 각종 부문에서 뛰어난 기록을 남기고 2019년 은퇴했다.
이창호에 이어 ‘소 신산’, ‘반집의 제왕’이란 별명으로 불려온 박영훈 9단의 성적표도 분석해 보았다. 총 1558국을 두어 1043승 515패를 기록 중이다. 전체 대비 반집 승 승률이 2.43%, 총 승수 대비 반집 승 비율은 3.64%로 나타났다. ‘대 신산’ 이창호와 ‘소 신산’ 박영훈이 근소한 차이로 최 선두권에 나란히 자리한 것이 흥미롭다.
▨통산 최고 승률 신진서
한국기원 자료에 따르면 신진서 9단이 760전 581승 179패, 76.45%로 통산 승률 1위를 달리고 있다. 2012년 입단 후 올해 1월 31일까지 작성한 기록이다. 대략 4판을 두면 3판 이상 이겼다는 계산인데, 최근 수년 동안 도전기, 결승, 국제대회 등 최고 수준 대국만 소화하면서 받아든 성적표란 점에서 더욱 놀랍다. 2020년에는 전무후무한 연간 승률 90%에 도전했고, 모두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목표 달성 직전까지 갔다가 아쉽게 달성엔 실패했다. 2020년 기록 내역은 76승 10패, 승률 88.4%.

▲ 신진서(왼쪽)가 박정환과의 대국 후 복기하고 있다. 22세인 신진서는 2년 전부터 선배 1인자 박정환을 앞지르면서 연간 최고 승률, 통산 최고 승률 등 각종 부문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통산 승률 2위는 박정환(73.46%), 3위는 이창호(71.29%), 4위는 조훈현(70.06%)다. 그간 수백 명의 프로기사들이 명멸해갔지만 통산 70% 이상의 승률을 올린 기사는 이들 4명뿐이다. 5위에는 놀랍게도 올해 25세의 변상일 9단이 올라 있다. 794전 550승 244패, 승률 69.27%로 기라성 같은 선배 기사들을 제치고 7할대 승률을 겨냥 중이다. 통산 최다승 부문은 조훈현(1959승) 이창호(1828승) 서봉수(1734승), 최다 타이틀 부문에선 조훈현(160개) 이창호(140개) 박정환(32개) 순으로 도열 중이다.
연간 최다대국과 최다승 기록 주인공은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있는 목진석 9단이다. 2007년 작성한 122국, 93승(29패) 기록이 15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 부문 대다수를 독과점한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박정환 신진서 등을 제치고 장기 보유 중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연간 최다승 2위는 이창호, 최다 대국 2위는 조훈현으로 목진석에 비해 각각 2승과 4국이 모자랐다.
입단 후 최단 코스로 타이틀을 딴 기사는 2004년생 신예 김범서 2단이다. 20세 이하만 출전하는 제한 기전이긴 하지만 제2기 이붕배 신예최고위전에서 새 기록을 썼다. 2021년 5월 21일 입단 후 111일 만인 9월 8일 우승컵을 안았다. 정규기전 최단코스 우승 기록은 변함없이 서봉수가 주인공이다(1년 8개월. 72년 제4기 명인전).
프로는 수입으로 말한다. 연간 최고 수입기록은 현역서 은퇴한 이세돌이 가지고 있다. 2014년 14억 1000만원을 벌었다. 동갑 라이벌 구리와 맞붙은 10번기 승리가 큰 몫을 차지했다. 박정환은 전성기였던 2018년 12억원을 챙겨 역대 2위에 올랐다. 현역 톱랭커인 신진서는 2020년 10억 3800만원, 2021년엔 10억 6000만원을 벌어 2년 연속 10억원 대 고수입을 자랑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일한 10억대 수입(10억1900만원. 2001년)을 자랑했던 이창호는 연도별 통산 랭킹 4위로 밀려났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세상 모든 기록경기 선수들은 후배에게 딛고 넘어갈 징검다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땀을 쏟는다. 묵은 기록을 발판으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고, 새카맣게 뒤처졌던 주자들이 결승 테이프를 향해 달려온다. 그들을 위해, 그리고 바둑계 흥행 제고 차원에서라도 기록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좀 더 세심하고 엄격하게 관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