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새해 바둑계는 어떤 판도를 그릴까. 400명에 육박하는 국내 프로기사들은 저마다 힘찬 도약을 꿈꾸며 범띠 새 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 험하다. 올해 최정상권서 활약할 기사를 3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현재 국내 랭킹 1~3위에 올라있는 ‘빅 3’급 에이스들이다.
모든 지표에서 앞서가는 신진서
이들 3명이 똑같은 지분(持分)을 지니고 5대5 승부를 펼칠 것 같지는 않다. 아직은 신진서의 위상과 비중이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도망자’와 ‘추격자’ 간 간격은 앞으로 더 넓어질 공산도 보인다. 그만큼 모든 지표가 신진서 편에 서 있다. 새해 기상도는 그래서 신진서가 달아나고, 그 뒤를 박정환과 변상일이 쫓아가는 형상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 신진서가 박정환과 남해 슈퍼매치에서 격돌한 모습. 신진서는 새해에 국제기전만 최소 2개의 결승전을 치르는 등 지배 영토를 더욱 넓힐 가능성이 높다.
신진서는 보유하고 있는 타이틀 영토가 경쟁자들의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다. 국내에만 GS칼텍스배, 쏘팔코사놀, KBS바둑왕, 용성, 명인 등 5개 성의 성주로 군림 중이다. 국제 메이저 기전인 춘란배를 합치면 무려 6관왕이다. 세계적으로도 현재 이렇게 넓은 영토를 호령 중인 기사는 신진서가 유일하다.
신진서는 1월 중 종료 예정인 제1회 우슬봉조배도 노리고 있다. 이 기전마저 정복하면 국내 타이틀 전관왕 그림이 완성된다. 현재 페이스로 보면 그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한국 바둑에서 전관왕은 1980년과 1982년, 1986년 세 차례 나왔다.
세 번 모두 한 세대 전 ‘바둑 황제’로 불리던 조훈현 9단이 작성했다. 2차 천하통일 때인 1982년엔 10관왕, 3차 통일을 한 1986년엔 무려 11관왕을 구가했다. 신진서가 만약 우승봉조마저 제패한다면 조훈현 이후 36년 만에 세계 바둑 사상 네 번째, 기사로는 두 번째 전관제패 주인공으로 등재된다.
신진서의 영토 확장 대상은 국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최고 메이저급 대회인 LG배와 잉창치배 2개 기전 결승에 올라 각각 중국 양딩신 및 셰커와의 마지막 결전을 기다리고 있다. 이 2개마저 품에 넣는다면 신진서는 연초 국내외에서 최대 9관왕까지 넘볼 수 있다. LG배 결승은 2월 7일부터 3번기로 열리며 잉씨배 일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최대 9관왕까지 넘보는 신진서
개인 아닌 국가 단체전에서도 신진서는 바쁘다. 한 중 일 3국 연승전인 농심배에서 그는 동료 4명의 탈락 속에 한국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다. 중국, 일본 기사 4명을 물리치고 작년 해냈던 역전극을 재현하라는 것이 그에게 부과된 미션이다. LG배 결승이 끝나자 마자 2월 21일부터 최종라운드가 재개될 예정이어서 신진서의 새해는 눈코 뜰 새 없는 강행군이 될 조짐이다.

▲ 지난해 2월 한국의 농심배 우승을 확정지은 신진서(가운데). 왼쪽은 목진석 대표팀 감독, 오른쪽은 한국 대표팀 멤버로 나가 우승에 기여한 신민준.
신진서의 확고한 입지(立地)는 랭킹에서도 입증된다. 2020년 1월 박정환을 2위로 밀어내고 톱랭커로 올라선지 만 2년이나 지났다. 똑같은 기간 박정환은 2위에 고정됐지만 둘 간의 랭킹 점수 차는 갈수록 벌어지는 추세다. 활약상을 통계화한 것이 랭킹인 만큼 신진서의 1위 독주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랭킹 1위 재위 기간이 언제 막을 내리느냐가 남은 관심사일 뿐이다.
25개월째 연속 한국랭킹 2위에 올라있는 박정환 9단. 지난 해 11월 난적 신진서와의 삼성화재배 결승서 역전 우승함으로써 올해도 신진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세력 역할을 할 전망이다. 지난 해 다승 남자부문 2위, 승률 6위(전체 7위)에 올랐다.
다음으로 신진서의 승률 추이를 살펴보자. 2012년 영재입단 1기생으로 입단한 신진서는 10년 간의 프로생활 동안 총 573승 178패 1무승부, 통산 76.3%의 승률을 기록 중이다(별표 참조). 매년 단조상승 커브를 그려온 가운데 2020년 최고 승률(88.4%)을 찍었다. 지난해 2021년 사실상 처음으로 약간 후퇴했지만 엄청난 페이스임에 분명하다.

▲ 신진서 연도별 승패표(2021.12.31 기준)
그렇다면 누가 신진서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까. 신진서에 대항할 현존 최대의 장애물은 역시 박정환이 첫손에 꼽힌다. 신진서와 박정환은 지금까지 10번 패권을 다퉈 신진서가 6번, 박정환이 4번 우승했다. 2020년 두 정상기사 초청 방식으로 벌어졌던 ‘남해 7번기’를 포함하면 신진서 기준 7승 4패다. 통산 상대전적도 신진서 28승, 박정환 22승으로 다른 어떤 라이벌 후보자보다 근접해 있다.
문제는 시간대별 흐름이다. 박정환의 승리는 신진서가 아직 박정환에 밀리던 시절 대부분 축적한 것이 대부분이고, 최근 맞대결에선 신진서가 일방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다. 평생 전적이 대등하다고 해서 지금의 전력도 5대5라고 봐선 안 된다는 것이 신진서 절대 우세론자들의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아직 싱싱하게 살아있는 화산‘ 박정환
하지만 박정환은 지난 11월 신진서에게 모처럼 반격에 성공함으로써 반박의 근거를 마련했다.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 1국을 패하고도 2대1로 역전승, 2년만에 타이틀을 쟁취한 것이다. 2020년 한 해 신진서를 상대로 2승 14패까지 뒤졌던 박정환이라곤 믿을 수 없는 설욕 드라마였다. 생애 통산 32번째 타이틀인 삼성화재배 접수를 통해 박정환은 가장 강력한 ‘신진서 방파제’는 아직도 자신임을 입증했다. 2021년 총전적도 63승 26패(70.8%)로 준수하다.

▲ 25개월째 연속 한국랭킹 2위에 올라있는 박정환 9단. 지난 해 11월 난적 신진서와의 삼성화재배 결승서 역전 우승함으로써 올해도 신진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세력 역할을 할 전망이다. 지난 해 다승 남자부문 2위, 승률 6위(전체 7위)에 올랐다.
이번엔 랭킹 3위 변상일을 살펴볼 차례다. 2021년 1년 간 총전적 60승 21패, 승률 74.1%로 다승 6위 승률 3위였다. 상승(常勝) 장군 신진서에게 결승서 쓴 맛을 안겨준 기사는 단 2명뿐인데 박정환 외에 또 한 명이 바로 변상일이다. 연말 국수산맥 국제대회 결승서 예상을 뒤엎고 신진서를 제압,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사실 그 동안 신진서는 변상일 입장에서도 좀체 극복하기 힘든 천적이었다. 이번 결승전 승리를 포함해도 변상일의 신진서 상대전적은 통산 7승 22패에 불과하다. 국내외 합해 3번 결승서 만나 모두 패했었다. 2017년 제4회 글로비스배(2017)가 출발점이었고, 2021년엔 GS칼텍스배 및 명인전서 연속 격돌해 모두 패했다. 하지만 지난 해 2번의 결승전은 모두 풀세트까지 갔고 역전패였다. 상당히 선전했다는 뜻이다.
변상일은 신민준 이동훈 등과 3~5위권에서 치열한 랭킹싸움을 거친 끝에 3위 자리를 확보했다. 이번까지 6번이나 우승했는데 그 내역을 보면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 한 번듯한 우승은 아직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바둑 ‘넘버 3’ 변상일. 지난해 국수산맥 국제대회 제패로 올해는 신진서 박정환을 더욱 위협하는 위치로 올라설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 한국기원
입단 직후 신인왕전서 2연패(連覇)한 뒤 2015년 LG챌린저스컵(LG배 20주년 기념 주니어 16강 토너먼트)서 우승했지만 비공식 초청전이었다. 2018년 JTBC 챌린지매치 3차대회 우승도 ‘반쪽 행사’ 격이었다, 2020년 중국 텐센트사가 주최한 TWT배는 인터넷 비공식 대회였다. 하지만 이들 대회에서 변상일이 꺾은 상대들은 모두 내로라 하는 강자들이었다는 게 또 하나 공통점이다..
무한한 잠재력...3위 탈출 시작한 변상일
변상일의 감각과 전투력, 빠른 수읽기는 기사들 가운데서도 정평이 있다. 목진석 국가대표팀 감독은 “변상일의 수읽기 능력은 신진서 박정환 두 강자와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부담감만 떨쳐낸다면 곧 최정상급 단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표시하고 있다.
변상일의 박정환전 상대 성적은 3승 10패다. 초기 6판을 박정환이 가져간 뒤 나머지 6번의 만남에선 번갈아 1승씩 주고받는 양상이다. 현재 우리 바둑계에서 2위 자리는 정상 도전을 위한 상징적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두 기사는 이 2위 자리를 놓고 올 한 해 치열하게 맞붙을 전망이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연령이다.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은 새해들어 각각 만 22세, 29세, 25세가 된다. 과일에 빗대자면 신진서는 단물이 더 강하게 스며들기 시작하는 완성기, 변상일은 탐스럽게 매달린 절정기이고 박정환은 농익어 입맛이 저절로 다셔지는 완숙기에 비유할 수 있을까.
신진서는 2021년 국내 기사에게 14패를 당했는데 그 중 박정환과 변상일에게 각각 5패씩 허용했다. 연승 퍼레이드를 펼치다가 브레이크를 건 기사는 십중팔구 변상일과 박정환이었다. 나머지 4패는 신민준 김지석 백홍석 박진솔에게 각 1패씩 당한 것이다.
물론 승부 세계에서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가능성으로 가득한 신민준 이동훈이 박정환 변상일을 제치고 최정상권을 뒤흔들지 모른다. 원성진 김지석 등 30대 강완, 급성장 중인 10대 영재들이 일을 낼 가능성도 크다.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깜짝 스타가 등장해 준다면 대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