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한 해도 저물어간다. 우리 바둑계로선 약진의 1년이었다. 국제대회서 라이벌 중국을 압도했다. 코로나 여파로 나라 경제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기전과 대국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프로들의 운동장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경기력 향상 효과를 누리고 있다.
대표성, 균형성 갖춘 최고의 대회
경사가 많았지만 어려운 일도 적지 않았다. 필자가 2021년에 발생한 여러 바둑계 사건 중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TV아시아선수권대회의 중단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지금부터 그 이유와 배경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 제4회 대회 결승전 모습. 일본 다케미야 마사키(오른쪽) 9단이 한국 조훈현 9단을 꺾고 1회 대회 이후 4년 연속 우승했다. 장소는 도쿄 NHK 방송국.
TV아시아선수권은 무엇보다 상징성, 대표성, 균형성에서 다른 어떤 대회보다 완벽한 대회다. 한국과 일본과 중국 3개국이 똑같은 지분으로 공동 운영한다. 3국 간에는 오랫동안 많은 분야에서 역사적, 지정학적 인연관계가 존재해오면서 경쟁심을 키워왔다. 바둑도 그 중 하나다. 세 나라 모두 바둑에 대한 주인의식, 자부심이 상당하다.
한중일 3국은 세계바둑의 척추 격이다. 어느 한 나라라도 빠지면 솥의 세 다리처럼 정립(鼎立)해 떠받쳐진 바둑계 균형이 무너지게 돼있는 구조다. 동북아 3개국의 바둑을 향한 애정과 책임감이 TV아시아선수권으로 구체화됐다고 할까. 인접한 경쟁 관계 3국이 한 뜻으로 뭉쳐 매년 공동 운영하는 분야가 바둑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하다.
대회 운영방식도 절묘하다. 이들 3개국은 KBS, NHK, CCTV 등 자국 공영 채널을 이용해 매년 독자적으로 속기(速棋) 기전을 거행한다. 각국 우승, 준우승자들과 전년도 챔피언 등 7명이 한 자리에 모아 우승자를 가리는 이벤트가 바로 TV아시아선수권대회다.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대회는 아니지만 세계 최강자들만 모여 각축하는 최고의 프리미엄 무대다.
일본 NHK배는 3국 중 가장 빠른 1953년에 창설됐다. 지난 봄 이치리키의 우승으로 68기까지 마쳤다. 12월 초 신진서를 제40기 우승자로 가려낸 KBS의 1980년에 비해 27년 빨랐다. 중국은 1987년 CCTV배로 시작해 몇 차례 명칭을 변경한 끝에 2017년부터 현재의 당호십국(当湖十局)배로 정착, 올해 5회 대회를 치르고 있다.

▲ TV아시아바둑선수권대회 사상 처음 중국 베이징 CCTV 스튜디오서 열린 1993년 제5회 대회 결승전 모습. 일본 요다 노리모토(왼쪽)가 한국 서봉수를 꺾고 우승했다. 중국은 녜웨이핑이 2회전(8강)에 올랐고 마샤오춘은 1회전서 탈락했다.
일본 주도로 1989년 창설
3개국 우승, 준우승자들이 모여 속기 챔피언을 뽑자는 제안은 일본에서 나왔다. 1988년 최초의 세계 메이저 바둑대회인 후지쓰배를 창설하는 등 당시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바둑 리더 국가였다. 일본은 TV아시아대회 출범 즉시 1989년 1회 대회에 이어 1990년 2회, 1992년 4회 TV아시아선수권를 자국 NHK 방송국에서 열었고 모두 우승했다.
한국 KBS 슈튜디오에서 첫 TV아시아대회가 열린 것은 1991년 제3회 대회 때였다. 이어 1993년 제5회 대회를 베이징 CCTV가 중계하면서 3국 윤번 개최가 본격화됐다. 이후 3국은 종종 방송국 스튜디오를 벗어나 지방도시나 호텔 등을 대국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30년간 개최 순번을 거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 대회는 매 대국 제한시간을 따로 주지 않고 1수에 30초, 1분 초읽기 10회, 덤 6집 반 규정을 적용한다. 일본이 첫 대회 때 채택한 이 방식은 그때부터 ‘TV아시아 규칙’이라고 해서 각국이 국내외 여러 대회에 적용하는 범용 룰로 정착했다. 중국은 덤(7집 반)과 계가 방식은 자국 규칙을 적용했고, 한국과 일본도 덤 6집 반 등 자체 룰에 따라 대회를 치렀다.

▲ 1995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7회 대회 시상식. 스승 조훈현을 결승서 꺾고 우승한 이창호 9단이 우승 트로피를 받고 있다. 이창호는 이듬해 중국 칭따오에서 열린 8회 대회서도 조훈현을 누르고 2연속 우승했다.
입상자들에 돌아가는 상금은 어느 나라가 그해 개최국이냐에 따라 다르다. 3국 윤번제 개최 정신에 맞춰 개최국 통화로 지급해온 때문이다. 한국서 열리는 대회 때 우승한 기사에겐 2500만월, 중국 개최 시엔 20만 위안, 일본서 열렸을 때는 250만 엔을 수여한다. 거의 비슷한 액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마지막 우승자가 된 신진서
30여년 동안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는 바둑의 국제화와 위상 확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동양 3개국에선 다양한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국제대회를 오픈했으나 꾸준히 이어지는 대회는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는 절묘한 균형을 고수하면서 최고 기사들의 활약무대를 쉬지않고 제공했다. 마치 엄동설한에도 변치 않는 상록수를 보는 듯했다.
지난 30년 간 한 중 일 3국 바둑의 흥망사가 이 자그마한 무대에 미니어쳐 처럼 녹아있다. 초기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는 일본이 휩쓸었다. 다케미야의 4연패(連覇)를 포함해 1~6회 대회를 연속 독점했다. 한국인 첫 우승자로 등장한 이창호는 1995, 96년 연속 우승하며 전성기에 진입했음을 알렸다. 이세돌(우승 4회) 이창호 쿵제(각 3회) 등이 이 대회 주역들이었다. 31회 대회까지 한 중 일은 각각 13회, 8회, 10회 우승했다.
신진서가 TV 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마지막 우승자가 됐다는 건 우리로선 더 비극적이다. 2019년 도쿄서 열린 31회 대회에서 2000년생 동갑인 중국 딩하오를 누른 통쾌한 우승이었다. 신진서가 아직 LG배나 춘란배를 차지하기 전이어서 그 개인으로도 최초의 세계 제패였다. 한국은 29회 이후 나현 김지석 신진서로 이어지는 3연속 제패의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 마지막이 된 제31회 TV아시아 선수권대회 결승이 끝난 뒤 우승자 신진서(오른쪽)와 준우승한 딩하오가 복기하며 감상을 나누고 있다. 대국 장소는 일본 도쿄호텔 친잔소.
2020년 32회 대회는 중국이 개최할 차례였다. 그러나 중국은 코로나 사태 탓에 대면(對面) 대국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일정을 몇 차례 연기했다. 2021년으로 해가 바뀐면서 눈치를 살피던 일본 측이 “우리는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에 더 이상 출전하지 않기로 했다”는 입장을 한중 양국에 전해왔다. 청천벽력이었다.
지금이라도 대회 재개 나서야
일본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2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예산 확보의 어려움이다. 일본기원은 그만한 힘이 없는 조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NHK 방송이 스폰서를 끌어와야 하는데 이 역시 여의치 않다는 소문이다. 둘째 원인은 일본 바둑의 저조한 성적이다. 2013년 25회 때 이야마 유타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6년째 한중 두 나라 잔치만 지켜보던 참이었다.
자존심 강한 일본 바둑계의 입장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들은 자국 기사들의 부진을 지켜 보다가 한계점에 이르면 가차 없이 셔터를 내려왔다. 전통의 후지쓰배, 도요타덴소배, 월드바둑챔피언십 등 대형 국제기전들이 모두 그 길을 걸었다. 기성전 명인전 등 더 큰 비용이 들어가는 전통 국내기전은 폐지 아닌 존속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중일 3국 문화 교류의 장으로, 3국 방송사의 공통 분모로 활용해온 대회를 2개국 행사로 바꾼다는 건 의미도. 명분도 없다. TV 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중단되자 종합 기전으로 운영돼 온 KBS 바둑왕전 올해 대회(40회)가 당장 제한기전으로 대폭 축소됐다. 프로 수 십명이 출전해 각축하던 무대가 달랑 8명만 나오는 초청대회로 변해 약식으로 치러졌다. 이제는 KBS 바둑왕전의 존속도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가 나온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바둑만 놓고 보면 일본만큼 영향력 큰 거인(巨人)은 없었다. 막부(幕府) 시절부터 프로기사를 양성하며 경기력을 대폭 끌어올렸고, 경기 규칙과 기전을 제도화해 현대바둑의 틀을 완성했다. 해외에 눈을 돌려 바둑 보급에 가장 많은 돈과 노력을 쏟아온 나라도 일본이다. 구미권 바둑용어 대부분이 일본어로 채워졌고, 일본을 찾았던 유학파 기사들은 모두 원로, 대가(大家)로 추앙받고 있다.
바둑 문화가 인기 스포츠나 엔터테이닝 분야처럼 대접 받으려면 세계화가 필수다. 세계화를 이루기 위해선 국제 바둑행사가 많아져야 한다. 그 중심을 이루는 한 중 일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데 그나마 있던 행사조차 무너져 내린다면 바둑의 미래는 없다. TV아시아선수권이 산파(産婆)의 손에 의해 종막을 고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일본 바둑인들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라도 당장 대회 재개(再開)에 발 벗고 나서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