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기사회 상정안건 3가지
이제 이번 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이세돌 9단에 대한 기사회의 표결과 상정 안건 3가지’의 내막을 파헤쳐 보자. 그 전에 먼저, 이9단에 대한 투표가 원래 대의원 회의에서 부결된 사안이었는데 조대현 회장이 직권상정했다는 말이 떠돌아 조대현 회장에게 직접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말도 안된다는 웃음을 지으며 메모가 빼곡하게 적힌 수첩을 보여준다. 대의원 회의에서 결의한 이세돌 관련 4가지 안건이 보이고 그중 하나는 가로로 좌악 금이 그어져 있다.
△이9단의 한국바둑리그 불참 문제 △중국바둑리그에서 받는 대국료 중 5%를 기사회에 내지 않는 문제 △시상식에 불참하는 문제 △기보저작권 위임 서명 거부 문제 4가지였고, 이중 줄이 그어진 항목은 △기보저작권 위임 서명 거부 문제였다. 기사회장의 직권으로 마지막 순간에 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설령 회장이 직권상정했다한들 권한이 있는 만큼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하나씩 따져보자.
△시상식 불참 문제
1편에 이미 사례를 언급하였으므로 패스한다. 다만 한가지 덧붙일 게 있다. 시상식, 전야제 불참. 사인, 인터뷰 거부 등 이9단이 지금까지 보인 숱한 돌출행동은 다른 스포츠에서라면 용납되지 않을 행동이다. 더욱이 바둑계 스스로 바둑을 스포츠로 전환한 마당이다. 엄연한 프로스포츠가 되었다. 미국의 경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어린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만한 행동을 하는 선수는 아주 엄하게 다스린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스포츠스타는 아이들의 우상이기 때문에 특히 수준 높은 공인의 자세를 요구한다. 지금 바둑을 배우고 있거나 배우려는 아이들의 우상은 이세돌이다. 이창호는 몰라도 이세돌을 아는 아이들은 많다.
천재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천수는 톡톡 튀는 언행으로 이세돌 9단과 곧잘 비교되곤 했다. 이천수 선수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언론으로부터 받은 대접과 축구계의 징계 수위에 견주면 바둑동네는 ‘노터치’나 다름없다. 바둑계가 보수성이 강한 동네라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너무 자유로워 문제다. 차민수 4단의 최근 인터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과 중국에 비교하면 한국의 체계는 매우 자유로운 편이다. 중요한 사안은 여론조사격으로 기사회가 의견을 토론해 정하고, 이사회에서 논의한 다음 대체로 이를 의결해준다. 대회에 참여한 선수 몫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일에 비해 대체로 크고, 프로기사의 대외 활동에 대해서도 역시 제약이 훨씬 없다. 강제적 규정이 없어도 그게 원활히 가능했던 건, 그런 자유로움에 필요한 수준의 '상식'을 구성원들이 대체로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상식(Common Sense)'이 통하지 않으면 일본기원이나 중국기원처럼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강력한 규정이나 분위기, 제도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상식이 중요하다. 큰 원칙이 있는 규정이 하나 있으면, 그 이하로는 상식이 중요한 것이다.”
▲국수전을 2연패한 이세돌 9단이 돌연 휴직함으로써 올해 국수전은 새 국수를 뽑는 선발전이 되었다.
△중국바둑리그에서 받는 대국료 중 5%를 기사회에 내지 않는 문제.
바둑 선수들의 친목단체인 기사회는 한국바둑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압력단체이다. 기전 주관과 진행, 바둑행정 등의 업무는 한국기원의 역할이나 바둑을 두는 당사자가 기사들인만큼 1차적으로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원=기사회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기사들의 주 수입원은 대국료이다. 한국기원에서 관리하는 주관료는 제반경비와 직원들의 인건비, 프로기사 연구수당 등을 감당하기에도 뻑뻑한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사들의 복지 분야에까지 예산이 돌아갈 여력이 없다. 해서 모든 기사들의 대국료나 상금에서 일정금액을 떼 복지기금으로 적립한다.
주관료를 받는 국내기전의 경우는 대국료에서 5%(상금은 떼지 않는다)를 떼 기사회 기금으로 적립하고 외국이 주최하는 기전의 경우는 10%를 떼 한국기원에 적립한다. 외국기전은 거의 상금이 큰 세계대회이고 여기엔 별도의 대표선발전 없이 상위랭커들에게 우선권을 주기 때문에 출전하는 자체로 혜택을 입는다고 보아 조금 더 뗀다(물론 이런 외국기전은 한국기원에서 일정관리는 물론 출전시 모든 편의를 봐주는 매니저 역할을 한다). 이렇게 모은 기금은 은퇴위로금이나 대출금, 보조금 등 기사들의 복지비로 쓰인다.
그런데 어느날 스포츠 구단 시스템을 차용한 중국리그가 탄생했고 목진석 9단을 필두로 한국기사들이 용병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존 기전과 달리 생소한 개념을 도입한 중국리그를 한국기원은 대수롭게 보아서인지, 아니면 기사가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아르바이트쯤으로 보아서인지 국내기전 활동과 연계하여 심각히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중국리그 역시 외국기전에 준해 대국료만은 10%를 떼었다. (중국리그 초창기에 이창호 9단이 마샤오춘 9단과의 약속을 이유로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인자의 외국리그 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바로 그때, 한국기원은 세세한 출전규정을 마련했어야 했다. 지난해 중국리그 일정을 이유로 한국의 일인자 이세돌 9단이 국내기전을 기권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라도 서둘러야 했다. 이 점에 대해선 다음편에서 한국기원을 논할 때 다루겠다.)
그러나 임선근 총장시절, 일정도 관리해주지 않으면서 10%가 웬말이냐는 거센 항의에 골치 아파진 한국기원은 만세를 불러버렸고 기사회 차원에서 알아서 하라고 토스했다. 그때부터 기사회는 ‘자발적인 납부’ 명분으로 5%로 낮춰 떼기로 했고 첫 해당기사 3명 중 2명은 자진 납부했다. 이세돌 9단도 처음엔 낸다고 했다가 미적거리더니 다시 일정 문제를 들고나와 기사회 의결건으로 넘어간 것이다.
기사회는 지금까지 기사 개인 차원에서 출전해 오던 중국리그를 앞으로는 한국기원 차원에서 관리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한국기원에서도 최근 중국기원에 협조공문을 보낸 바 있다.
고(故) 임선근 총장은 이 5% 납부 문제로 무척 골치 아파했다. 하루는 기전 시상식이 끝난 뒤 한 음식점에서 이세돌 9단을 설득하다가 두손두발 다 들었다. 많이 버는 사람이 기여도 많이 해야 하는 거다, 너 혼자만의 실력으로 거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진 사람도 있으니 상금도 따는 거 아니냐, 그러니 그 사람들도 파트너이고 네 상금에 기여한 거라 크게 생각하고 정한 룰(5%)대로 좀 내주면 안되겠냐,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론을 폈으나 돌아온 이9단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이해 못하겠는데요. 전 절반만 떼도 그 사람들보다 많이 떼는 거 아니에요?”
피땀 흘려 번 돈 내놓기 좋아할 사람 없다. 더군다나 매니지먼트도 안해주면서 일정 금액을 걷어간다면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악법도 법이다. 그렇게 정했으면 일단 합의에 따르고 불합리한 것은 따져 물어 개선하는 게 순리 아닐까. 가뜩이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남보다 많이 버는 사람이 납부거부 방식으로 홀로 버티니 그 진의가 곡해되는 것이다.
중국리그 5% 납부에 대해서만큼은 반대하는 기사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이라고 생각이 없었을까. 지금이야 이9단이 가장 많이 벌어 가장 많이 내고 있지만 이9단이 신인시절에는 조훈현이나 이창호 같은 선배들이 많이 냈을 것이고 나이 들게 되면 그때는 후배들이 또 많이 내지 않겠는가. 이9단의 은퇴위로금도 그렇게 모은 돈에서 지급될 터이다. 참고로 이런 유의 적립금은 어느 스포츠 단체나 다 있고 골프협회의 경우는 발전기금, 특별회원비 등의 명목으로 11.2%를 떼고 있다 한다.
▲이세돌 9단은 신안군의 대표적 아이콘이지만 정작 바둑리그 신안군팀에는 이세돌 9단이 없다.
△기보저작권 위임 서명 거부 문제.
이 사안은 상정안건이 아니었지만 겉으로 이미 불거졌으니 짚고 넘어가자.
문제가 된 서명건은 기보저작권이 있다고 했을 때 한국기원이 소속 기사들의 기보에 대한 저작권 신탁관리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개별 동의를 받는 절차였다. 한국기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하는 대리인 자격을 얻으려면 사전에 위임을 동의하는 소속 기사들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한국기원에 위임하는 데 대한 동의는 2006년 12월 기사총회에서 통과했으나 개개인의 동의를 구해야 효력이 확실하다고 해 2007년 5월 총회에서 다시 결의하고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세돌 9단만 유일하게 서명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차일피일 거부하자 한국기원 담당직원은 조대현 기사회장에게 문제해결을 요구했고 그렇게 다시 1년을 더 끌다 지금에 이르렀다. 조회장은 “나중 이상훈 7단을 통해 기보저작권료 분배 문제에 대한 얘기를 듣긴 했으나 그것은 기보저작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다음 단계의 문제이므로 그때 가서 논의하자 했다”고 말한다. 반면 이9단은 기사가 몇 % 갖는지 보장해 주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자세였다.
△2009한국바둑리그 불참 문제
바둑리그 불참은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고 양쪽의 시각차가 워낙 크기에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 다음편에서 별도로 다루겠다. 바둑리그 불참 배경과 과정, 일인자의 기전 불참이 던지는 파장, 이로 인한 동료기사들의 표결과 휴직계 제출 등에 대해 나름 취재한 내용과 시각을 밝혀볼 참이다. 이미 단편적으로 알려져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일 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이번 사태를 정리하고 점검한다는 의미에서라도 세세히 살펴보겠다. 물론 논지 전개에 필요하다면, 1~2편처럼 바둑팬들이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중간중간 올리는 자세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상식과 내규 사이
기사회 대의원에서 상정하자고 의결한 4가지 안건에 대한 내 의견을 미리 말하면, 기사들의 표결을 촉발한 바둑리그 불참은 그것이 몰고올 파장과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동료와 팬들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일인자에게 섭섭한 감정을 표출할 수는 있으나) ‘기전 내규를 어긴 데가 없는 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에 대한 이세돌 9단과 한국기원의 주장은 다음편에 다루기로 했으니 그때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시상식 불참 등의 문제는 내규를 따지기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일인자의 행동거지와 그를 지지하는 팬들의 사고방식이 상식의 문제를 재판대에 세워선 안된다는 것이라면, 참 씁쓸하긴 하지만, 이제라도 몇 가지 조목조목 내규에 박아넣으면 된다. 그럼 왜 지금까지 한국기원은 그러지 않았을까. 일본기원이나 중국기원 같았으면 벌써 징계조치가 나왔을 일을(최근 간판스타인 저우쥔신 9단까지 방침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거에 제명해버린 대만기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기원이 추상같이 처리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게으른 탓이었을까.
나는 상식의 범주로만 따지고 싶지 않다. 그 이면에는 한국기원을 기사들이 좌지우지하다보니, 속된 말로 한국기원이 ‘기사들의 판’이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맹점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선수들의 고충을 개선하는 데는 선수들의 의견이 가장 특효하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들의 권한을 제약할 필요가 있는 것들에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기원만큼 기사들의 편의와 자율권을 주는 곳은 없다. 일본, 중국보다 훨씬 느슨하고 편하다. 철저하게 기사들 위주로 정책을 짜고 시스템을 유지하다 보니 오늘처럼 이런 일인자 사태를 맞은 거다. 피차 바둑판에서 얼굴을 맞대고 승부를 겨루는 사이기에 궂은소리를 하기 쉽지 않은 구조임을 헤아린다 해도 원래부터가 패밀리 정신이 강한 동네다. 자기들 손으로 제약한 자유의 양은 꼭 그만큼 자기들을 속박하는 양이 될 수 있다. 이번 사태를 기본소양이 부족한, 아니면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일인자로 인해 빚어진 우발적 사태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일반 여론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문제 삼을만한 안건으로 보는 건 ▶5% 납부 거부와 ▶위임장 서명거부다. 이것은 바둑리그 불참의 충격과 파장에 비하면 내부적인 문제라 소소하게 여겨 넘어갈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9단이 기사회를 정당성을 결여한 독재기관으로 보지 않는다면, 자기가 소속된 조직(기사회)의 조직원(동료 기사)들이 적법한 과정(총회든 대의원 회의든)을 거쳐 논의하고 의결한 사항이라면, 설령 그 안에 반대했더라도 따를 의무가 있다. 그게 소속원의 의무다. 권리는 다 누리고 자신이 이행해야할 의무는 외면하고자 한다면 기사회를 탈퇴하는 수밖에 없다. 기사회에서 결의한 사안을 ‘독고다이’로 무시한다면 그 사람이 일인자이건 누구건 제재를 논하는 게 맞다. 아니면 그의 시위에 일리가 있다면 검토하고 수용하던가. 이도저도 아닌 채 지금까지 질질 끌고 미적거린 기사회가 측은타.
깜냥도 안되는 칼럼, 할말은 많고 글재주는 없다보니 또 길어졌다. 1편도 그랬지만 2편 역시 하루 낮 하룻밤을 꼬박 새며 쓰고 있다. 칼럼의 방향만 정해놓고 중간중간 보강취재와 자료확인을 해가며 쓰는 데다(물론 회사 업무를 내팽개칠 형편이 아닌지라 짬짬이), 나로선 다시 돌 맞을 각오하고 시작한 연재라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다 써놓고 나선 몽땅 버리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쓴 적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사정이 이러하니 의도적인 ‘토끼신공’이라 몰아붙이진 마시라. 뒤늦게나마 이9단이 말문을 연다니(6월30일 기자회견) 퍽 다행스러우면서도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한데 나로선 7월2일 이전까지 마쳐보마 약속한 연재를 이틀 앞당겨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어쨌든 오늘은 잠 좀 자고.<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