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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돌 통 뚜껑은 죄가 없다
 
새해 벽두 한중 두 나라 바둑계 사이에 분쟁이 발발한지 어느덧 3주째로 접어들지만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23일 끝난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변상일 9단과의 결승서 커제 9단은 세 차례 사석(死石) 처리 규정 위반으로 실격에 이어 기권패 처리된 바 있다. 국제 바둑대회 결승전 사상 처음 있는 이번 사태의 현황과 책임 소재,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되새김해 보았다.

▲ 초반엔 평화로왔던 결승 최종국 장면. 커제(오른쪽)가 전날 실격패에 이어 3국 기권패로 변상일 9단이 LG배를 차지했다.(한국기원)

기나긴 구정 기간 ‘휴전’을 끝내고 2월 3일 한국기원이 ‘누적 반칙패 규정 삭제’ 개정안을 공개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1회 적발시 벌점 2점을 주되 같은 행동을 한 번 더 범하면 반칙패를 선언하는 조항을 없애기로 했다. “이 내용을 중국바둑협회와 신속히 공유하고 협의해 세계대회의 정상적 개최에 만전을 기할 것”이란 내용도 함께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내용을 보면서 이 정도로 사태가 진화될지, 국제 바둑계가 원위치로 복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손질을 했다는 대국 규정 한 가지만으로도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점 벌점은 무한정 계속하겠다는 뜻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시간 벌점제를 적용하는 잉씨배에도 위반 횟수 상한선은 있다.

한국 규칙을 엄정하게 뿌리내리려면 문제 발생 시 심판의 개입 타이밍과 관련된 세밀한 매뉴얼이 제정돼야 한다. 심판이 첫 수부터 계가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보다 문제 발생 시 즉각 개입, 해당 영상을 제시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이번 결승전서 커제와 중국 측은 ▲심판이 세 번 모두 한국기사(변상일)가 둘 차례에 개입해 생각 시간을 벌어주었다 ▲테이블위에 놓았던 사석을 돌 통에 옮겨 담은 한참 뒤에 벌점 통보를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상황들에 대한 규정을 보강하는 것이 어렵다면 시행 3개월째인 새 규정은 아예 폐기해야 분쟁을 피할 수 있다.

▲ 결승 3국 모습. 흑번인 커제가 따낸 백돌(붉은 원내)들이 돌 뚜껑 아닌 테이블에 여기저기 놓여있다.(바둑TV캡쳐)

규정과 관련해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사석(死石)의 돌 통 뚜껑 보관’ 규정이다. 놀랍게도 “쓸모없는 포로를 돌 통 뚜껑에 담지 않았다고 벌점을 주는 것은 코미디”라는 인식을 일부 한국 팬들마저 갖고 있다. 한국은 현대바둑 도입 후 사석으로 상대방 집을 메우는 계가 방식을 수 십년 동안 계속해왔다. 중국 주최 대회에 참가해선 현지 규정에 미숙해 손해도 많이 보았다. ‘우리 주최 대회만은 우리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하자’는 게 이번 규칙 개정의 취지였고, 돌 뚜껑은 그 상징적 기물(棋物) 중 하나였다.

돌 통 뚜껑을 사석(死石) 보관소로 선택한 것은 임의(任意)적 방편이지만 반상(盤上) 일대에서 고른다면 최적의 선택이기도 했다. 아무튼 “돌 통 뚜껑에 사석 보관 안했다고 반칙 주는 건 너무하다”란 말은 해선 안 된다. ‘돌 통 뚜껑’은 우리 나름대로 고심 끝에 결정한 필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석을 담아 쌓아둘 별도의 보관함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해진 게 사실이다. 사석 수가 수 십 개에 이르러 돌 뚜껑만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지는 판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한다. 아군 병사와 포로를 칸막이로 분리한 돌 통을 제작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은 세계 바둑의 양대 기둥이다. 두 나라는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바둑 국제화에 전폭적으로 기여해왔다. 번갈아 세계 대회를 창설하는 등 인프라 구축에 꾸준히 앞장섰고, 반상에서도 막상막하의 경기력을 보이며 흥행을 주도했다. 양국 중 어느 한 쪽이라도 고삐를 늦추거나 낙오했더라면 바둑은 지구촌에서 지금과 같은 위상을 누리지 못하고 단지 몇 개국의 소규모 서민 레저로 추락했을 것이다.

대만 재벌 고 잉창치씨는 바둑 국제화의 아버지로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다. 1988년 그는 당시로선 깜짝 놀랄 만한 우승 상금(미화 40만 달러)을 걸고 잉창치배를 창설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매 4년 주기로 못을 박아 대회의 격을 높였다. 바둑에 대한 열정으로 전만법이란 대국 규정을 스스로 창안해 적용했다. 외국 선수들은 까다로운 규칙에 애를 좀 먹었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국제 통일 규칙이 없는 마당에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기도 했다.

▲ 시상식 장면. 왼쪽부터 조선일보 홍준호 발행인, 우승자 변상일, LG그룹 정정욱 전무. (한국기원)

이에 보답하듯 한국에서도 동양증권배(1989~1998년)를 신호탄으로 1996년 삼성과 LG 등 대그룹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제 바둑제전을 진수(進水)시켰다. 출범 30년 안팎을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이어오고 있는 국제 행사는 잉씨배 포함 3개뿐이다. 한때 바둑 종주국을 자임했던 일본은 2011년 창설 24년 만에 후지쓰배의 닻을 내렸다. 3국 정립(鼎立) 형태였던 바둑계는 이때부터 한중 두 나라의 본격 전장으로 변했지만 두 나라 바둑계는 더욱 밀착했다. 공존(共存)을 위해선 협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한 밀월이었다. 국제 프로바둑계엔 사무를 총괄하고 지휘, 중재할 행정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 통합 랭킹이란 것도 자리잡을 수 없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대국 규정(통합 룰)이 마련돼 있지 않아 국제 분쟁의 불씨로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더니 연초 거행된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3번기에서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저마다 엇갈린다. 한국 팬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다. 중국 네티즌들 역시 커제를 일방적으로 편들지도 않는다. 이 와중에 중국기원은 일찌감치 23일 “커제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국기원에 통보해왔다. 한국기원은 닷새 뒤인 1월 28일 “양국 간 상이한 사석(死石) 관리 규정이 원인”이라며 “규정이 바뀐 지 3개월에 불과해 중국 선수들의 적응 기간이 부족했을 것”이란 내용의 입장문을 통해 유감을 표했다.

이에 대해 중국 원로기사 녜웨이핑(73) 9단은 “한국기원의 사과가 핵심을 피하고 있지만 파국을 막기 위해 수용하자”는 인터뷰를 내놓았다. 크게 인심 쓰는 듯 한 고자세다. 한국기원 입장문엔 후원사(LG그룹)와 주최사(조선일보)에 대한 사과 문구(文句)외에 중국에게 ‘사과’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기원은 우리가 사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네티즌들 상당수는 오히려 커제가 이번 소동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억울한 점이 있으면 대국 종료 후 절차를 밟는 것이 세계 최고급 기사다운 태도라는 것. 또 다른 팬은 “바뀐 규정을 여러 차례 전달받고도 세 번이나 규정을 어기고, 심판에게 삿대질하며 대들었으며, 시상식에 불참하는 등 프로의 명예를 실추시킨데 대해 커제가 사과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 결승 3국에서 벌점을 선언 당한 커제가 심판진을 향해 격렬히 항의하고 있다. 커제는 대국 속행을 거부해 기권패 처리됐고, 결국 준우승에 그쳤다. (바둑TV 캡쳐)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중국이 국제바둑 최대 시장으로 성장한 후 ‘갑(甲)의식‘이 자리잡아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급별 중국리그 외국기사 용병 선발 폐지 카드를 뽑아든 것이 한 가지 예다. 심지어 중국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기사는 ’LG 삼성 제품 불매운동‘을 언급했다. 국제 메이저 대회(몽백합배)를 10년 넘게 후원 중인 한 재계 인사는 “LG배 우승자 변상일이 차기 몽백합배에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내 대회엔 출전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 뉴스를 보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위태롭게 지탱해오던 국제 바둑계 균형이 중국 일부 지도층의 신중하지 않은 발언으로 무너져선 안 된다. 올해 국제대회로 승격, 의욕적으로 준비하던 쏘팔코사놀 대회가 전면 연기되면서 첫 희생양이 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국 주최로 결승전이 예정돼 있는 제1회 난양배(신진서 대 왕싱하오), 제15회 춘란배(박정환 대 양카이원) 등도 줄줄이 위협받게 된다. 세계 바둑계 공멸(共滅)이 필연이다.

한 중 양국이 17일부터 예정된 농심배 중단을 가까스로 피하기로 한 것도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경고 누적으로 인한 반칙패를 없애겠다”는 한국의 손짓을 일단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사석 처리와 이를 어겼을 경우 부과할 징계 수위 등 세부사항은 추후 논의한다고 밝혀 미봉책에 불과한 느낌을 준다. 화급한 불을 끄기 위해 시간을 버는데 그쳤다. 농심배, 쏘팔코사놀 대회는 새 규정이 마련될 때까지 기존 규정을 적용치 않고 진행할 방침이다.

일단 파국은 피했지만 시야(視野)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가장 명료한 수습 처방은 당사자 커제가 이번 LG배 결승전 패배를 깔끔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가 “내 불찰로 빚어진 혼란에 사과하고 더 훌륭한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중국기원의 운신 공간이 트이고 한국기원도 최소한의 체면을 확보해 기존 보폭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반만년 역사에 인류 문화 최대 보물이라는 바둑게임이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할지, 반대로 소멸의 길로 접어들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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