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저물어간다. 세계 정상을 다투는 바둑계도 1인자 자리를 놓고 과거 어느 해 보다도치열한 경쟁이 전개됐다. 올 한 해 격전의 현장을 되돌아보고 내년 시즌을 조망(眺望)해 보았다. 2024년 12월 10일 기준 세계 메이저 타이틀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신진서(오른쪽)와 왕싱하오. 둘은 오는 2월 제1회 난양배를 놓고 결승을 펼친다.
표에서 보듯 세계바둑계 ‘최대 주주’는 여전히 신진서(24)다. 2024년 한 해 동안 LG배(28회)와 란커배(2회) 등 2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낚아 올렸다. 현재 멀티 타이틀리스트는 신진서가 유일하다. 지난 2월 변상일을 누르고 LG배 통산 세 번째, ‘짝수 회 우승’ 전통을 지켰다. 8월 란커배에선 구쯔하오와 결승 리턴 매치가 이뤄져 지난해 패배를 설욕하고 우승했다. 2024년 한국 바둑계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신진서의 LG배 보유 시한은 2025년 2월로 만료된다. 대회 사상 최초의 2연패(連覇)가 기대됐으나 16강전서 국내 복병 한상조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기 때문이다. 2개월 여 뒤엔 왕관을 내려놓아야 할 처지다. 하지만 신진서가 실관(失冠)해도 멀티 크라운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올해 창설한 제1회 난양배 결승 3번기에 올라있기 때문. 단순 산술적 확률로만 따져도 0.5개를 이미 확보해 놓았다.

▲ 이치리키(왼쪽)는 셰커(오른쪽)를 완파하고 잉씨배를 획득, 2024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2월 26일 시작될 난양배 결승 3번기 파트너는 중국 신예 왕싱하오(20)다. 신진서로선 자신보다 연하 기사와 패권을 다투는 첫 메이저 결승이기도 하다. 왕싱하오의 현재 중국 랭킹은 6위. 신진서가 4~5년 전부터 ‘가장 주목하는 중국 차세대 유망주’로 꼽아온 신예답게 수직 상승을 거듭 중이다. 둘 간 상대 전적에선 지난 달 28회 삼성화재배 32강전서 승리한 신진서가 2승 1패로 한 발 앞서있다.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신진서는 2012년 입단 이후 국제 메이저 무대에서 통산 일곱 번 정상을 밟았다.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등 국내 기사, 구리(8회), 커제(8회) 등 중국 듀엣에 이은 역대 6위다. 통산 메이저 부문에서 10회 우승 벽 돌파, 중국기사 기록 추월을 내심 별러온 신진서로선 난양배 결승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 최다 세계 제패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신진서의 목표가 2025년 중에 실현될지는 속단하기 힘들다. 현재 중국 랭킹 5위인 커제(27) 또한 다른 메이저 기전 결승에 진출해 우승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변상일(27)과 자웅을 겨룰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3번기가 그것. 1월 20일부터 새해 국제 메이저 대회 첫 결승 테이프를 끊는 이 대국서 커제가 승리한다면 메이저 우승 횟수가 9회로 증가, 신진서의 추격에서 한 발 달아나게 된다. 커제에겐 LG배 첫 정복의 꿈도 걸려있다.
이번엔 변상일(27)의 입장에서 보자. 그는 지난해 28회 LG배때도 결승에 올라 신진서에 패배, 준우승에 머문 바 있다. 2년 연속 결승 진출이다. 문제는 커제가 변상일과 6국을 겨뤄 한 판도 지지않고 있는 천적이라는 것. 부담스러운 기록이지만 변상일은 기죽지 않고 결전을 기다린다. “LG배는 나와 인연이 깊은 대회다. 커제가 까다로운 상대이긴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변상일은 현역 메이저 챔피언 신분이다. 격년제 국제대회인 제14회 춘란배(2023년 7월)서 리쉬안하오를 2대0으로 셧아웃 시키고 생애 첫 정상에 섰다. 디펜딩 챔프 변상일은 오는 17일 제15회 춘란배 8강전에 나서는데 여기서 춘란배 2연속 우승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변상일은 상대전적 3승 4패를 기록 중인 중국 미위팅과 4강을 다툰다.
리쉬안하오(29)도 7봉(峰) 중 하나를 지키고 있는 정상(頂上) 중 한 명이다. 2024년 5월 당이페이를 제치고 몽백합배 주인이 됐다. 95년생으로 현역 세계 챔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AI 귀신’으로 불릴 만큼 인공지능 공부량이 많은 기사로 알려져 있다. 리쉬안하오의 최신 중국 랭킹은 3위. 수 년 전 치팅 논쟁으로 곤욕을 치렀으나 무혐의로 정리된 바 있다.

▲ 변상일(오른쪽)과 리쉬안하오의 춘란배 결승 장면. 변상일은 LG배 결승에도 올라있다.
딩하오(24)도 빼놓을 수 없는 스타플레이어다. 11월에 끝난 제29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당이페이를 상대로 역전 우승을 따냈다. 전년도 28회 대회에 이은 2연패(連覇)다. 우승 인터뷰에서 “신진서를 8강전서 꺾은 뒤 우승 목표가 섰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제27회 LG배(2023년 2월)서 양딩신을 제치고 우승한 경력을 포함하면 통산 세계 제패가 3회에 이른다. 중국 기사들 중 3회 이상 세계 우승을 맛본 일곱 번째 기사다. 신진서에 이은 역대 두 번째 2000년대생 세계 제패 기록도 갖고 있다.
이치리키 료(27)는 세계 최대기전인 제 10회 잉씨배를 들어올리며 2024년 바둑계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했다. 일본 7관왕 이치리키는 9월 준결승서 커제를 눕힌 뒤 결승에선 셰커에 3대0으로 완승하는 등 기세가 폭발했다. 2005년 제9회 LG배 때 장쉬가 중국 위빈을 따돌리고 우승한 뒤 19년 만에 보는 일본기사의 세계 정복이란 점도 화제가 됐다. 명문 와세다대 출신으로, 부친이 운영하는 가호쿠신보 기자직을 겸해 ‘기자 기사’, ‘기사 기자’란 이색 신분을 갖췄다.
새해 4월엔 신설 메이저 대회인 제1회 북해신역배가 새롭게 출발한다. 한국은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등 시드자 3명을 포함해 11명이 출사표를 냈다. 주최국 중국은 톱랭커 양딩신, 메이저 타이틀홀더 딩하오 등 대거 29명이 참가해 또 한 번 ‘인해전술’로 맞서올 전망. 언급한 강자들 외에 당이페이, 셰커, 박정환, 신민준 등도 주목된다. 뭇 영웅호걸들의 대치(對峙) 속에 2025년 뱀띠 해 바둑계를 정복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 2월 변상일과 LG배를 다툴 커제(오른쪽)가 8강전서 한상조와 대결 중인 모습. 한상조는 우승 후보 신진서를 누르고 올라왔다. <사진 제공=한국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