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배가 고집불통의 기전임은 잘 알려져 있다. 한 번 정상에 오르면 그 어떤 강자도 이듬해 반드시 초반에 탈락하는 것이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전통이다. 연패(連覇)는 언감생심이다. 세계 메이저 기전들 가운데 2년 연속 우승자가 한 명도 배출되지 않은 기전은 LG배가 유일하다. 성취에 반드시 따르는 자만(自滿)을 계(戒) 하려는 LG배 ‘수호신’의 깊은 뜻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LG배 특유의 징크스는 또 있다. 세계 바둑무대를 누벼온 간판급 강자임에도 LG배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케이스가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LG배 역사가 30년을 바라보는데 그 사람 이름이 우승자 명단에 없다고?”란 반문이 쏟아질 정도의 고수들이 즐비하다. 실력 탓인지, 연(緣)이 따르지 않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한 사람씩 소환해 보자.
▨조훈현(한국)
그는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 걸쳐 세계 바둑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대표적 고수였다. 크고 작은 국내외 대회에서 물경 161회에 걸쳐 우승, 이 부문 세계 최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 메이저 대회서도 9번이나 최정상에 올라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다음 단독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조훈현(왼쪽)은 9번이나 세계 정상에 올랐지만 LG배에선 준우승 1회에 그쳤다. 2002년 4월 6회 LG배 결승 유창혁과의 최종 5국 종국 장면.
그런 조훈현이지만 유독 LG배 우승컵만은 수집하지 못 했다, 결승에 딱 한 번(2002년 6회대회) 올라 유창혁과 일진일퇴 공방 끝에 2승 3패로 물러났다. 그는 LG배와 같은 해 출범한 삼성화재배에선 두 번이나 우승했다. 2002년 6회 대회 결승서 창하오를, 2003년 7회 때는 왕레이를 각각 따돌렸다. LG배에선 누구에게도 허용한 적이 없는 2연패를 떡하니 장식한 것이다. 징크스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마샤오춘(중국)
마샤오춘은 1964년생으로 1990년대 중후반이 전성기였다. 귀신같은 타개, 발빠른 행마로 선대(先代) 왕초 녜웨이핑으로부터 중국 1인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1995년엔 동양증권배와 후지쓰배를 동시 석권, 세계 2관왕으로 우뚝 섰다. 당시 메이저급 세계기전은 딱 이 2개뿐이었다. 세계 ‘전관왕’으로 군림한 것이다.

▲ 마샤오춘(왼쪽)은 이창호가 천적이었다. 199년 제3회 LG배 결승서 0대3으로 패할 때의 모습.
하지만 마샤오춘의 LG배 전과(戰果)도 ‘은메달’ 1개에 머물렀다. ‘만인의 적’ 이창호의 등장이 치명적이었다. 마샤오춘은 11세 연하 이창호를 만나기만 하면 일패도지 했다. 뭇매를 맞다맞다 못해 사실상 승부사 생활을 접었다. 이창호와의 통산 전적은 6승 27패. 그 안엔 1999년 제3회 LG배 결승 0대3 완패 기록이 포함돼 있다.
▨커제(중국)
세계 메이저대회 정복 횟수 1~3위는 한국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트리오가 독점해오고 있다. 그 다음이 8번씩 우승한 구리 및 커제가 자리잡았다. 41세 구리와 달리 27세의 커제는 아직도 최일선에서 뛰는 ‘경주마’ 신분이다. 특히 삼성화재배에 강해 전체 우승 수의 절반인 4개를 수확했다. 삼성배가 커제에겐 ‘메달밭’인 셈이다.
하지만 LG배 우승컵은 아직 들어 올리지 못했다. LG배 결승 무대는 2021년 25회 대회 때 딱 한 번 밟아 보았는데 실패로 끝났다. 22세에 불과한 ‘언더독’ 신민준을 맞아 우승이 유력시됐으나 첫판 승리 후 2, 3국을 내리 패배, 첫 우승 기회를 날려 보냈다. 이후 커제는 LG배 정상권 부근까지 오르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이야마 유타(일본)
1989년생인 이야마 유타는 2000년대 초반 일본 바둑의 대명사였다. 국내 메이저 독식을 뜻하는 대삼관을 달성했고, 2022년엔 본인방전 11연패(連覇)로 조치훈의 단일 기전 연속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국제대회서도 2011년 후지쓰배 3위에 오르는 등 분전했지만 메이저 제패의 꿈은 멀기만 했다.

▲ 이야마 유타(왼쪽)와 셰얼하오의 22회 대회 결승전. 이야마는 2018년 도쿄서 열린 이 결승전 패배로 본인은 물론 일본 혈통 기사의 LG배 우승을 한꺼번에 놓쳤다.
2018년 모처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2번째 LG배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야마는 한국 이영구, 중국의 강호 저우루이양과 양딩신을 연파한데 이어 준결승서 당시 세계 최강자로 꼽히던 커제마저 눕히고 결승에 진출했다. 셰얼하오와의 결승 1국을 내준 이야마는 2국을 반집 차로 장식, 최종국까지 몰고 가는데 성공했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구리와 함께 중국 메이저 우승 공동 1위(8개)인 커제도 LG에선 준우승 1회에 머물고 있다. 2021년 25회 LG배를 놓고 신민준과 화상대국 중인 커제. (사진=한국기원)
이야마의 결승 최종전 패배는 자신의 실패로만 그친 게 아니었다. 일본 정통 핏줄로 LG배 정상에 오를 최초의 기회를 날렸다. 2회 때의 왕리청, 9회 대회 장쉬는 일본기원 소속 기사로 출전했지만 혈통이 대만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대만 기사 저우쥔쉰이 2007년 11회 LG배 제패란 역사를 썼다. LG배 수호신은 순수 일본 혈통 기사에게 언제쯤 우승자 명단 등재를 허용할지 지켜볼 일이다.
▨때 놓친 효웅들
전성기가 지난 ‘LG배 우승 미이수자(未履修者)’ 수는 꽤 여럿이다. 이야마와 동갑인 천야오예는 메이저 우승기록이 3회나 되지만 LG배에선 준우승 한 번에 그쳤다. 1991년생 저우루이양은 18회 때 퉈자시, 3년 뒤 21회 때는 당이페이와 결승서 맞서 무너졌다. 중국 황태자 가운데 한 명이던 창하오는 결승엔 아예 한 번도 못 오른 채 나이 쉰을 바라보는 행정 책임자로 물러앉았다.
우리 쪽에도 아쉬움을 남긴 기사들 이름이 적지않게 보인다. ‘송아지 3총사’란 애칭으로 한 시대를 석권했던 박영훈 원성진 최철한 등 세 명은 LG배 정상 등정엔 모두 실패했다. 앞으로 이들 셋 중 한 명이라도 LG배를 품는다면 마흔 살에 이뤄낸 인간 승리로 찬사를 받을 것이다. 앞으로 역대 우승자 명단에서 김지석(35)의 이름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새얼굴들 각축 치열
아직 서른 살이 채 안 된 각국 ‘현역병’들의 첫 우승을 향한 경쟁은 불을 뿜을 것이다. 전기(前期) LG배

▲ 구리와 함께 중국 메이저 우승 공동 1위(8개)인 커제도 LG에선 준우승 1회에 머물고 있다. 2021년 25회 LG배를 놓고 신민준과 화상대국 중인 커제. (사진=한국기원)
에서 아깝게 준우승에 머문 변상일을 비롯해 김명훈, 설현준, 이창석, 김정현, 문민종... 등 야심 가득한 20대 청년들 중 누가 치고 나올지 궁금하다. 리쉬안하오, 이치리키 료, 구쯔하오, 판팅위 등 LG배 우승컵에 눈독 들인 외국 기사들도 여럿이다.
제29회 LG배 8강전과 준결승이 9월 30일부터 전남 신안에서 열린다. 결승에 오를 2명을 뽑는 2라운드다. 8강 대진은 박정환 대 변상일, 이지현 대 딩하오, 커제 대 한상조, 신민준 대 원성진으로 짜여졌다. 이번엔 또 어떤 예측 못했던 드라마가 펼쳐질지, LG배 수호신이 29번째 주인공으로 누구를 점찍을지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