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상하이에서 벌어진 제10회 잉창치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서 예상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 최정예급 기사 5명이 출전해 4명이 탈락해버린 것. 특히 우승을 목표로 각오를 다지던 신진서, 박정환 등 ‘투톱’의 동반 패배는 우리 바둑계에 떨어진 날벼락에 다름 아니었다. 홀로 살아남은 노장 원성진도 다음날 8강전서 셰커에 발목을 잡혔다. 한국 기사 전원이 도착 짐을 풀자마자 출발 보따리를 도로 싸야했다.

▲ 신진서(왼쪽)와 왕싱하오의 잉씨배 8강전. 신진서가 이 대국서 패하면서 후속 대국 중계는 중단됐다.
이 예상 밖 사태에 바둑TV와 K바둑(한국바둑방송) 등 양대 바둑전문 채널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역대 잉씨배에 유독 강했던 한국기사들이 이번에도 결승에 오르고 우승까지 이룰 것으로 예상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편성, 광고주 섭외, 스태프 및 중계진 배정, 각종 데이터 준비 등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난 상태였다.
6일부터 9일 사이에 열린 준결승 3번기는 1명의 한국 기사도 포함되지 않은 채 진행됐다. 셰커가 대만 쉬하오훙을, 일본 이치리키 료가 커제를 각각 따돌리고 결승에 올랐다. 한국의 두 바둑전문 채널은 준결승 대국을 중계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내부적으로 고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4년 주기 바둑올림픽’의 한국기사 선전(善戰)을 전하기 위해 차곡차곡 챙겼던 이런저런 준비를 과감히(?) 포기했다.
바둑은 흔히 말하는 ‘시청자 충성도’가 가장 높은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어릴 때 배워 한평생 내내 수담을 즐기는 골수팬들이 대부분이다. 바둑은 또 특정 스타에 대한 집중도, 이른바 팬심이 다른 종목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종목이다. 신진서나 최정에게 집중되는 신뢰는 다른 스포츠나 연예계에서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하다. 요즘엔 젊은 유망주 김은지와 일본 출신 나카무라 스미레 같은 기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소위 ‘TV바둑 4천왕’으로 불리는 이들 4명은 요즘 바둑계 모든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다. 쉽게 말해 ‘찾는 고객’이 많다. 타이틀 스폰서, 광고주들은 이들이 빠진 대회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여제(女帝)’ 최정의 불참 선언으로 한바탕 홍역을 겪었던 올해 여자리그가 좋은 사례다. 방송 고객에 해당하는 시청자들의 4천왕에 대한 편식(?) 정도는 상상보다 훨씬 더 하다. 밥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이 안 보이면 가차 없이 채널을 돌려버린다. 양대 TV채널 자체 시청률 조사를 통해 수백 번 확인돼온 사실이다.

▲ 10년 넘게 한국 여자바둑계에서 ‘여제’로 군림해온 최정.
신진서가 구쯔하오를 꺾고 한국에 제25회 농심배를 가져온 판의 바둑TV 시청률은 무려 0.423%에 달했다. K바둑이 같은 판을 다이제스트로 가공한 방송은 0.497로 한 술 더 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방송 편성도 이들 4인에 쏠릴 수밖에 없다. 2024년 바둑TV 편성 1위는 최정 대 저우훙위의 센코컵 하이라이트로 무려 36회에 걸쳐 전파를 탔다. 스미레 및 김은지의 편성 횟수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
“바둑채널을 켜면 이들 4명 중 한 명은 화면에서 어김없이 만난다”고 한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편중 편성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기 스타들의 주식(主食)은 팬들의 사랑이다. 또 그들 스타들의 인기를 측량하는 척도(尺度)가 시청률이다. 방송사도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공급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순환 구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억지로 찍어 누를 이유도, 수단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두 바둑채널의 갑작스런 잉씨배 생중계 중단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사실 커제나 좀 인기 있을 뿐 셰커, 이치리키, 쉬하오훙을 보려고 TV를 켤 한국 시청자는 많지 않다. 잉씨배 4강전의 1인당 제한시간은 2시간 30분이지만 25분씩 두 번이나 시간 연장을 허용한다. 하루 한 나절을 남의 나라(?) 행사 중계에 통째로 제공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 8월 랭킹에서 최정을 제치고 처음 여자 1위로 올라선 김은지 9단.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잉씨배 준결승 생방송은 당초 계획대로 이행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개막 전 시청자들에게 했던 라이브 중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를 어쩔 것인가. 예고방송 때 “한국기사가 탈락할 경우 중계를 칼같이 걷어찰 것”이란 단서 조항을 첨부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TV앞에 앉아 “왜 중계를 안 하지? 날짜가 연기됐나?”하면서 노심초사한 시청자가 한 명도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나.
한국기원의 자회사인 바둑TV는 특히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한국 바둑의 총 본산(한국기원) 중에서도 최전방을 책임진 역군(役軍) 답게 세계 최고기전을 쌩으로 방영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고루 가져야 옳았다. 국제 메이저 4강전을 고스란히 들어내고 그 자리에 수 십번 우려먹었던 재탕으로 메워버린 결정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광고주와 팬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 세계 4강전 관중석으대로 불러올리려는 노력이 아쉬웠다.
이 기회에 바둑채널 운영과 관련한 제안 몇 가지를 첨부한다. 무선 양대 채널이 협의해 동일대국 동시 중계를 최대한 피해주면 좋겠다. 바둑보다 수 십배 치열하게 경쟁하는 스포츠 채널들은 매일 벌어지는 프로야구 다섯 경기를 미리 배정해 중복 없이 중계한다. 시청자 중심 편성 원칙이 확고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채널 선택권이 둘 뿐인 바둑 시청자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검토해 볼 일이다.
또 하나. 특정 인기 기사들의 재방 비율을 낮추기 힘들다면 화면 귀퉁이에 대국 날짜를 명기해 주었으면 한다. 일부 실시 중이지만 아직 많이 미흡하다. 재방율이 높은 판일수록 시간 스펙트럼이 넓어 시점(時點)이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 십여 년 전 단위, 개명(改名) 전 이름으로 나오는 기사가 드물지 않다. 동일 기사 한 명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기 일쑤다. 시청자 입장에선 날짜라도 알아야 덜 혼란스럽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자막(字幕) 서비스 도입 필요성이다. TV바둑 시청자들은 노안(老眼)과 난청(難聽)에 시달리는 연령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공중파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케이블 채널들도 비주얼 매체답게 자막 서비스를 실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 올해 3월부터 한국서 활동 중인 15세 일본 기사 나카무라 스미레 3단. ‘시청률 4인방’의 일원이다.
(사진=한국기원)
바둑계 사정이 옛날 같지 않다고 한다. 갈수록 위축되며 위기론이 커져가고 있다.그런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려면 팬을 포함한 바둑계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형 기전이 속속 창설돼 매일 라이브(live) 만으로 채우기에도 화면이 모자라는 꿈같은 상황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