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소(老少)가 동락(同樂)할 수 있는 대표적 게임이 바둑이다. 할아버지와 손자 또는 손녀가 마주 앉아 수담을 나누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프로기사 중엔 일본 스기우치(衫內壽子) 8단처럼 만 97세의 나이에 현역으로 활동 중인 사람도 있다. 또한 성공한 초일류 프로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네 살 무렵 처음 바둑돌을 잡고 다섯 살 즈음부터는 계가까지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연령 스펙트럼이 이 보다 더 넓은 승부 게임은 없을 것이다.

▲ 서봉수(왼쪽) 대 한종진의 제11기 대주배 결승전. 서봉수가 71세 3개월 23일의 나이로 시니어기전 최고령 우승 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정 연령에 이른 뒤부터 나이와 성적 곡선은 반비례한다. 젊은 시절 맹수처럼 용맹을 떨치던 강자들도 중년 이후엔 동생뻘, 자식뻘 앞에서 진땀을 흘린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 올드보이들에게 바둑은 변함없이 가까운 반려지만 승리의 기쁨까지 동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바둑에선 최연소 우승보다는 최고령 우승의 가치가 더 클지도 모른다. 한국 프로기사 및 한국 주최 대회를 중심으로 고령 우승자의 자랑스런 순간을 재조명해 보았다.
국내 프로바둑계에서 최고령 챔피언의 영예는 서봉수 9단이 갖고 있다. 지난 5월 24일 끝난 제11기 대주배 결승서 한종진 9단을 꺾고 우승했다. 71세 하고도 3개월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자신이 2021년 8회 대주배서 우승할 때 기록한 68새 2개월의 최고령 기록을 스스로 경신한 것이다. 한국 바둑 최고령 우승 기록 1-2위는 모두 서봉수 9단이 갖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주배는 모든 연령대의 기사가 총출전하는 대회가 아니다. 올해 대회의 경우 남자 만 45세, 여자는 30세 이상으로 한정했다. 이른바 ‘시니어 기전’이다. 출전 연령 하한선을 두는 시니어 대회는 최근 몇 년간 다수 등장했다. 국내 시니어 대회 최고령 우승 3위는 제6기 시니어바둑대회(2023년 7월) 챔프 김수장 9단이다. 김영환을 누르고 65세 8개월의 나이로 정상에 섰다.

▲ 조남철(오른쪽)은 한국 종합기전 최고령 우승(1회 최강자전, 49세 7개월) 기록 보유자다. 사진은 김인 9단과 1970년 제5기 왕위전 도전기 대국 모습.
전 연령대가 대상인 싸움터로 시선을 옮겨보자. 국내 최고령 타이틀 홀더 기록 부문 베스트 5는 조남철과 조훈현이 양분하고 있다. 최고령 1위 기록 보유자는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이다. 1973년 6월 30일 제1회 최강자전서 49세 7개월의 나이로 우승했다. 재래식 한국 연령으로는 지천명에 들어서는 쉰 살에 최정점을 찍은 것이다. 결승서 김인 7단을 2대1로 꺾었다.
초기 명인전을 무대로 한 노장 조남철의 투혼을 돌아보면 감동적이다. 1968년 대회 창설 첫해 김인 6단을 제치고 45세의 나이로 첫 명인에 등극했다. 이듬해 2회 대회에 이뤄진 리턴매치에서 김인에게 1대3으로 져 챔피언 벨트를 돌려주었으나 1971년 4월 끝난 3기 명인전서 2대1로 승리, 다시 명인에 올랐다. 그때 조남철의 나이는 47세 4개월 16일. 이는 국내 종합기전 최고령 기록 4위에 해당한다(명인전 4회 대회는 17세 서봉수의 우승으로 이어진다).

▲ 제7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왕레이를 꺾고 기뻐하고 있는 조훈현(왼쪽). 그의 나이 49세 10개월 4일 때로, 메이저 타이틀 역대 최고령 2위 기록이다.
조훈현은 최연소 기록 2위(2002년 1회 KT배 때의 48세 11개월)와 3위(44기 국수전의 48세 28일), 5위(34기 패왕전, 47세 24일)를 갖고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끈 것은 44기 국수전이었다. 그 전해 43기 대회 결승서 중국 출신 여성 기사 루이나이웨이에게 1대2로 패배, 타이틀을 내주었던 그는 44기 결승서 3대0으로 설욕하며 가념비적 고령우승 경력 한 개를 추가했다.
이번에는 국제기전을 살펴볼 차례다. 메이저급 세계바둑대회 정상을 가장 늦은 나이에 정복한 주인공은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이다. 1942년 5월생으로, 1992년 제5회 후지쓰배 결승(단판)서 왕리청 9단을 따돌리고 우승했을 때 그의 나이 50세 2개월 20일이었다. 만 50세를 넘기고 메이저봉(峰)을 정복한 프로기사는 지금까지 오다케 외엔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기록 제조기‘ 조훈현은 간발의 차이로 오다케를 넘어서는데 실패했다. 그는 2001년 2월 끝난 제6회(상대 창하오) 대회와 2003년 1월 종료된 제7회(상대 왕레이) 삼성화재배를 2년 연속 제패했다. 6회 때가 48세 9개월 4일, 7회가 49세 10개월 4일 때로 각각 세계기록 3위 및 2위에 해당한다. 오다케의 최고령 1위 기록과 조훈현이 작성한 전체 2위 기록 시차는 단 4개월 여에 불과하다.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 5위는 오다케와 1942년생 동갑인 대만계 일본기사 란하이펑 몫이다. 제3회 후지쓰배 결승(1990년 8월)서 녜웨이핑을 1대0으로 꺾고 48세 2개월 29일의 나이로 세계 정상을 밟았다. 린하이펑으로선 평생 유일한 메이저 세계 타이틀이었고, 녜웨이핑은 세계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 55세 유창혁(오른쪽)은 뤄시허를 제치고 제3회 신안 시니어 국제대회를 제패, 제한기전 최고령 우승 역대 5위에 올랐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40년대~50년대에 출생한 강자들 중 이름이 빠진 기사가 한 명 있다. 1952년생인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다. 만 45세 때인 1997년 10회 후지쓰배서 단 한 차례 세계 제패에 성공했으나 최연소 베스트5엔 들지 못했다. 대신 시니어 세계대회 우승 리스트에선 고령 기록 1, 2위를 독점했다. 2019년 제1회 녜웨이핑배서 동갑내기인 녜웨이핑을 꺾고 66세 6개월 14일 만에 우승했다. 그보다 한 해 전 거둔 세계시니어마스터즈 우승(65세 9개월)과 1년 차이다. 시니어 부문 3~5위는 왕리청(60세 7개월), 위빈(56세 2개월), 유창혁(55세 7개월) 등 3명이다. 각각 1, 4, 3회 신안 시니어대회서 작성한 것이다.
조훈현 등 전설적 영웅들이 무대 뒤로 퇴장하면서 40대 메이저 우승자는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요즘엔 30대의 세계 제패도 쉽지 않다. 세계 메이저 우승 횟수 1, 2위인 이창호(17회)와 이세돌(14회)조차 30대로 접어든 이후엔 단 하나의 타이틀도 추가하지 못했다. 각각 29세 8개월(5회 춘란배), 29세 9개월(17회 삼성화재배) 때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 올렸었다. 올해 중국 리쉬안하오가 29세 3개월의 늦은 나이에 첫 메이저 우승(제5회 몽백합배)을 따내 화제가 됐을 정도다.
현재 31세 5개월인 박정환이 올해와 내년 사이 치러질 LG배, 란커배, 삼성화재배 등서 한 개라도 우승한다면 큰 업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물론 39세 원성진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이 ‘대박’이다. 시니어 부문에선 최근 흐름으로 보아 유창혁의 석권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메이저 국제대회 50세, 시니어 국제대회 66세의 기존 최고령 기록은 앞으로도 꾸준히 도전받을 것이다. 나이를 거슬러 이뤄낸 성취는 단순한 우승보다 몇 십배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