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바둑 게임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뚜렷한 비교 우위를 고수해왔다. 간간이 여성 고수가 출현하긴 했지만 길고 확실하게 남성을 지배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를 두고 바둑에 관한 한 두뇌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이론과, 환경적 악조건에 따른 여성 바둑의 핸디캡 때문이라는 이론이 양립해 왔다. 아직도 이 이슈는 정답이 나오지 않은 채 잊을 만 하면 갑론을박으로 이어지곤 한다.

▲ 제43회 국수전 최종국. 도전자 루이나이웨이(왼쪽)가 조훈현을 2대1로 물리치고 혼성기전 여성 챔피언 시대를 열었다.
남녀 바둑실력이 비대칭이다 보니 각종 대회 우승은 남성이 도맡다시피 한다. 타이틀 홀더 명단에서 발견되는 여성 기사 이름은 여자끼리 겨루는 기전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 프로기사 간 결승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혼성 기전에서 뭇 남성 강호의 숲을 헤치고 결승까지 진격해 패권을 겨루고 때로 타이틀까지 따낸 여성 파이터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현대 바둑 역사상 가장 활약이 컸던 여성 기사는 역시 루이나이웨이다. 올해 61세인 루이 9단은 중국서 태어나 활동하다 미국 한국을 거쳐 다시 중국에서 활동 중이다. 한국 객원기사 신분이던 1999년부터 2011년까지 12년 넘는 기간 동안 그녀는 무려 다섯 번이나 혼성기전 결승에 올랐고 그 중 두 번을 우승했다. 그 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결승전으론 제43회 국수전(2000년)이 꼽힌다.
루이 9단은 이창호를 꺾고 결승에 오른 뒤 조훈현마저 2대1로 제압, 한국 바둑 1인자 계보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국수 타이틀을 점령했다. 이 사건은 여성이 남성을 제압하고 타이틀의 주인이 된 세계 첫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대 최고의 조훈현-이창호 사제를 연파하고 따낸 기록이니 그 가치가 배가(倍加)된다(절치부심한 조훈현은 이듬해 리턴매치에서 루이를 꺾고 국수위를 탈환했다).

▲ 사상 최초의 부부 결승전. 제4기 맥심배 우승은 아내 루이나이웨이를 2대0으로 누른 장주주(왼쪽)에게 돌아갔다.
국수전의 첫 ‘여성 반란’ 주인공을 맡았던 루이 9단은 약 10개월 뒤인 2000년 말 또다시 타이틀전 결승 무대에 섰다. 이번엔 5기째를 맞는 GS칼텍스배(당시 대회명은 LG정유배)였다. 결승서 맞닥뜨린 상대는 띠동갑 후배 최명훈. 타이틀전이라면 으례 이창호 조훈현 등 몇 사람의 전유물이던 시대여서 25세 7단 최명훈의 출현은 신선했다. 그리고 결승 5번기를 3대1 승리로 장식하면서 타이틀까지 손에 넣었다. 루이나이웨이도 비록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국수전에 이어 최정상권 실력을 갖췄음을 재확인했다.
루이 9단은 2003년 벽두 세계 바둑계에 또 하나의 새 역사를 아로새긴다. 이번 카드는 세계 최초의 부부 결승전이었다. 9단들에게만 출전이 허용되는 제4회 맥심배에서 부군 장주주와 아내 루이나이웨이는 나란히 무패로 쳐올라갔고 결승서 만났다. 결과는 남편 장주주의 2대0 승리. 한집에 살면서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잔 뒤 함께 대회장에 달려와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 가졌다.
루이나이웨이란 기사는 확실히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부부 결승전 패배 이듬해 같은 대회 결승에 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우승 목표를 달성했다. 국수전에 이어 남성 기사를 꺾고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이다. 2004년 3월 끝난 제5회 맥심배 얘기다. 우세가 점쳐지던 유창혁은 바둑계 전망과 달리 1대2로 패배, 준우승에 머물렀다.

▲ 조혜연(왼쪽)은 남녀 혼성 시니어대회인 대주배서 3년 연속 결승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사진은 세 번째 도전인 김영환과의 대국. 조혜연이 이겨 이 대회 첫 우승의 꿈을 이뤘다.
2010년 대주배란 이름의 시니어기전이 탄생한 이후 남녀 결승 기회가 대폭 늘어났다. 대주배는 당초 남성 시니어들을 위한 대회였으나 4회 대회부터 만 30세 이상 여성 기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올해 11회째를 마친 이 대회에서 성사된 남녀 결승전은 총 4회나 된다. 남성이 3번, 여성이 1번 우승했다.
대주배 첫 남녀 결승은 2018년 제5회 때 이뤄졌다. 우승 조치훈, 준우승 조혜연. 조혜연은 이듬해 6회 대회 때도 결승에 진출해 이번엔 최규병의 일격을 맞고 또 준우승했다. 조혜연은 그래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7회 대회 때도 결승에 진출한 그녀는 김영환에 신승, 마침내 우승 염원을 달성했다. 조혜연이 세운 동일기전 3연속 남녀 결승전 출전 기록은 앞으로 좀체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재미있는 기록이 또 있다. 권효진이 한 번은 남자, 한 번은 여자 선수로 반대 성(性) 기사와 결승을 치른 것이다. 성전환 수술? 아니다. 스위치 히터? 그것도 아니다. 정답은 동명이인(同名異人)에 숨어있다. 2023년 10회 대주배 때는 여성인 권효진 8단이 유창혁에 패했다. 같은 해 3개월 뒤 열렸던 제1회 조아제약배 루키바둑 영웅전에선 남성 신예 권효진 7단이 김은지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권효진이란 기사가 남녀를 오가며(?) 2년 연속 이성(異性) 기사와 결승을 치른 배경이다.

▲ 2022년 열린 제27회 삼성화재배는 남녀가 패권을 겨룬 최초의 세계 메이저기전으로 기록됐다. 각각 남녀 세계 1인자이기도 한 우승자 신진서(오른쪽)와 준우승자 최정, 사진제공=한국기원
세계 최고수 여성 기사 최정을 빼놓고 바둑 성대결을 들먹일 수 없다. 최정은 국내와 국제무대서 각 한 번씩 남성 강자와 패권을 놓고 겨루었다. 2022년 제27회 삼성화재배서 최정은 양딩신 변상일 등 최정상급 강자들을 헤치고 결승까지 줄달음쳤으나 마지막 신진서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세계 메이저 기전 사상 최초의 남녀 결승전, 그리고 여성 기사가 준우승까지 오른 첫 기록으로 남았다.
최정은 2023년 7월 GS칼텍스배를 놓고 결승서 변상일과 마주 앉기도 했다. 결과는 변상일의 3대0 완승. 루이나이웨이의 국수전 제패 이후 23년만의 여성 메이저 챔피언 탄생을 기대하던 팬들의 바램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국제 메이저 기전 결승에 고루 이름 석 자를 올린 것은 분명 쾌거였다. 이 기록또한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오는 6월 25일부터는 경남 합천에서 제12기 하찬석 국수배 결승전이 열린다. 17세 이하(2006년 이후 출생자)만 참가하는 이 대국 결과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대회 최초로 남녀 결승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07년생 김은지 9단과 08년생 조상연 초단이 대결한다. 9단과 초단의 대결 무대란 점도 흥미 유발 요인으로 꼽힌다.
‘자웅(雌雄)을 결한다‘란 말이 있다. 성별에 관계없이 최고의 자리를 놓고 건곤일척 맞붙을 때 쓰는 표현이다. 雌는 암컷 자, 雄은 수컷 웅자다. 이걸 남녀 바둑 승부에 대입하면 모양새가 좀 괴이해진다. 여자 선수가 남성 선수를 이겼다고 남성이 되거나, 거꾸로 남자 선수가 여성을 꺾었다고 여성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둑 선수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성별의 자존심을 위해 싸운다. 바둑대회 패권을 놓고 더 많은 ’남녀 성 대결‘ 결승전이 벌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