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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다관왕의 세계
 
국내 프로기사 수는 400명이 훌쩍 넘는다. 프로들의 ‘일터’라고 할 기전 수는 얼마나 될까. 수시로 등장했다 없어지는 등 명멸(明滅)을 밥먹듯 해 일정하지 않지만 많게 잡아도 20개 미만이다. 프로기사가 한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우승해 보는 것이 꿈이지만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소위 초류로 분류되는 프로기사들은 동시에 여러 개의 타이틀을 주렁주렁 꿰찬다. 소위 말하는 다관왕(多冠王)이다. 개중엔 한 시즌 동시 보유 타이틀 수가 10개가 넘은 기사들도 있다. 다관왕 개념은 평생 획득 타이틀 수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시점(時點) 확인이 중요하다. 한국 바둑의 총 본산인 한국기원의 자료 협조를 얻어 역대 다관왕의 세계를 살펴보았다.

▲ 이창호 9단


다관왕은 고대 무장(武將)들의 성(城) 빼앗기 싸움과 흡사하다. 가장 강하고 용맹스런 장수가 가장 많은 성을 거느린다. 바둑사를 빛낸 최고스타들이 당연히 다승왕 순위의 제일 위쪽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짐작했던 대로 한국 바둑 현대화 이후 최다관왕 기록을 남긴 기사는 이창호 9단이다.

이창호는 1995년 10월 2일 제39기 국수전 우승으로 무려 13관왕에 올랐다. 국수, 명인, 기왕, 최고위, 패왕, 기성, 대왕, 국기 등 전통 기전을 비롯 12개를의 크고 작은 국내 타이틀에 제7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이 포함된 숫자다. 1995년 13개 성(城) 동시 장악 시점은 이창호 바둑 인생의 정점(頂點)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창호는 1995년 13관왕에 버금가는 12관왕을 두 차례 더 기록하면서 동률 2위로 올려놓았다. 국내 기사 다관왕 리스트 1~3위를 이창호가 독점했다는 얘기다. 한 번은 1993년 11월 30일 배달왕 기전 우승으로, 또 한 번은 1998년 10월 14일 제3기 GS칼텍스배 제패로 12번째 성(城)에 깃발을 꽂았다.

▲ 조훈현 9단


1980~90년대 제자 이창호와 양강(兩强) 시대를 형성했던 조훈현은1986년 6월 제3기 박카스배 우승으로 11관왕, 1980년 12월엔 제1기 바둑왕전 제패로 10관왕을 달성했다. 조훈현은 특히 1980년과 1982년, 1986년 등 세 차례 전 타이틀을 독점하는 전관왕을 겸해 무적 시대를 구가했다. 이창호가 등장하기 직전 수년 동안은 서봉수 외엔 적수가 없었다.

이창호, 조훈현의 이름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 1인자 신진서다. 신진서는 2022년 8월(제8회 국수산맥)과 같은 해 11월(제27회 삼성화재배), 그리고 2023년 4월 제24회 맥심배 우승으로 도합 세 번 8관왕의 지위에 올랐다. 2023년 8관왕 등극의 디딤돌이었던 24회 맥심배를 2연패(連覇)함으로써 현재 신진서는 8관왕(LG배, 잉씨배, 명인, 쏘팔코사놀, 바둑왕, 용성, YK건기배)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 이세돌 9단


은퇴 기사인 이세돌이 전성기였던 2007년부터 2008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7관왕에 오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전체 랭킹 2~3위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는 박정환은 2018년 3월 제36기 바둑왕전 제패로 월드챔피언십, 크라운해태배, 하세배, 몽백합배, 맥심배 등 국내외 6개 기전을 동시 지배하면서 절정기를 노래했다.

이번에는 시야를 넓혀 국제 무대 다관왕 역사를 살펴본다. 염두에 둘 것은 국제 메이저대회 우승 회수와 N관왕 수치(數値)는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 국내에 비해 모집단(기전 수) 규모가 훨씬 작은데다 2년 이상 터울로 개최되는 기전도 많기 때문이다. 20세 이하 기사만 출전하는 주니어대회, 달랑 3명이 출전해 우승을 다투는 하세배 같은 이벤트를 동급 국제대회 반열에 놓을 수도 없다.

국제 메이저기전 우승 회수 1위 역시 이창호 9단이다. 만 16세 되던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제패를 신호탄으로 무려 17회나 정상에 올랐다, 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이창호의 뒤를 이어 이세돌(14회)가 두 자릿수를 기록하며 2위에 올라있다. 그 뒤를 구리(8회), 커제(8회), 신진서(6회), 유창혁(6회), 박정환(5회), 쿵제(3회) 등이 따라붙고 있다.

메이저 대회 다관왕 기준으로 정렬하면 1위는 중국기사 구리 9단이다. 2009년 5월 4일 제1회 비씨카드배를 획득하면서 5관왕을 달성했다. 구리는 이미 제21회 후지쓰배, 제4회 도요타덴소배, 제13회 LG배와 제6회 춘란배를 보유 중인 상태였다. 구리의 국제 메이저 5관왕 기록도 30년 넘게 난공불락의 기록으로 간주돼왔다.

국제 메이저 다관왕 2위는 이창호다. 제1회 LG배, 제2회 삽성화재배, 제9회 동양증권배를 보유한 상황에서 1998년 8월 1일 열린 제11회 후지쓰배를 추가 접수, 세계 4관왕으로 우뚝 섰다. 결승에서 중국 창하오를 꺾었다. 국내외 13관왕의 최다기록이 작성된 1995년과 약간의 시차(時差)가 존재하는 것에 눈길이 간다.


▲ 구리 9단


풍운아 이세돌은 국제 메이저 3관왕 등정 기록을 갖고 있다. 제3회 도요타덴소배, 제9회 동양증권배에 이어 제12회 LG배 결승서 한상훈을 2대1로 제압, 3개 대회를 동시 지배했다. 이 시기에 이세돌은 제19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도 보유했으나 마이너 기전으로 분류하는 관례에 따라 제외했다(TV아시아대회엔 한중일 3국에서 7명만 출전한다).

2000년대 초반 세계적 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쿵제도 14회 LG배와 14회 삼성화재배에 이어 2010년 7월 제23회 후지쓰배 제패로 3관왕을 장식했다. 결승서 그가 꺾은 상대는 이세돌이었다. 하지만 쿵제는 이듬해 초 벌어진 제15회 LG배 결승서 파요원야오(박문요)에 패한 뒤 정상권에서 급격히 멀어져갔다.

선배들의 가록을 위협 중인 현존 최강기사 2명이 있으니 바로 신진서와 커제다. 두 기사는 현재 한 중 두 나라 1인자일뿐 아니라 세계 최강 투톱으로도 꼽힌다. 구리가 보유 중인 국제 메이저 5관왕 기록이 깨진다면 이 2명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진서는 3관왕이 개인 최고기록이다. 2022년 11월 제27회 삼성화재배를 접수, 먼저 우승했던 26회 LG배와 13회 춘란배 포함 3관왕에 즉위했다. 이후 차례차례 내놓았다가 제9회 잉씨배서 처음 우승하고 LG배(28회)를 되찾아 현재는 2관왕이다. 페이스가 여전한데다 올해 열리는 메이저 대회도 많아 개인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신진서 9단


커제는 생각보다 다관왕 숫자가 많지 않았다. 제2회 몽백합배와 제21회 삼성화재배를 손에 넣었던 2016년 2관왕이 개인 최고기록이다. 커제는 2020년 11월 제25회 삼성화재배 때 신진서의 ‘마우스미스’ 해프닝에 힘입어 마지막 메이저 우승을 기록한 이후 4년째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다관왕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의상같은 것이다. 특정 시점에 거느린 타이틀 숫자를 따지는 것이어서 총 우승 회수 통계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진다. 영원하지 않은 일과성(一過性) 가계부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한 시대 스타 기사들의 지배 영토를 비교하는데 이만큼 흥미로운 데이터도 없다. 앞으로 또 어떤 새 스타가 몇 개의 타이틀 별을 달고 태어나 바둑계를 빛낼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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