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부터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을 시작한 일본 출신 꼬마기사 나카무라 스미레(15) 3단이 자신을 ‘스미레’로 불러달라고 선언했다. 개명(改名)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에 대한 호칭으로 나카무라(仲邑)라는 성(姓)을 생략하고 스미레(菫)란 이름을 사용해달라는 것이 그의 요청이다. 전례가 드문 케이스여서 눈길이 간다.

▲ 일본 바둑 요정 스미레 3단.
유명인의 이름은 기업에 빗대면 제품명에 해당한다. 팬이나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해당 ‘상품’의 컨셉트나 이미지가 이름 하나에 농축돼있기 때문이다. 스미레의 이번 선택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튀려는 몸짓으론 보이지 않는다. 자신만의 색깔과 이미지를 지키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녹아있다.
스미레(菫)는 일본어로 제비꽃을 뜻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꽃이 핀다고 해서, 혹은 꽃의 모습과 보랏빛깔이 제비를 닮았다고 해서 제비꽃으로 명명됐다는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보라색이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일본 각계 명사들 중엔 스미레(菫)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바둑은 한자(漢字) 문화권의 전유물이다. 한 중 일 대만 등 4개국 프로기사들의 이름은 1~3개 음절의 성(姓)과 1~4개 음절의 이름을 조합해 만들었다. 평균 글자 수가 가장 긴 일본 기사들은 풀 네임 대신 성씨만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치리키(一力), 요다(依田), 이야마(井山), 사카다(坂田)… 하는 식이다. 나카무라라는 성을 제쳐놓고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경우는 분명 이례적이다.

▲ 유창혁 9단
일본 프로야구계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 본토 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가면서 많은 구설수에도 시달렸던 이치로가 그 사람이다. 정식 이름은 鈴木一朗. [스즈키 이치로]라고 읽으면 모범답안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姓)보다 이치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선수 등록도 그 이름으로 했다. 이번 스미레의 경우와 똑같다. 장남 아닌 차남이면서도 맏아들을 뜻하는 이치로(一朗)란 이름을 내세울 만큼 그는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67세 나이에 타이틀을 땄던 일본의 전설적 ‘괴물 기사’ 후지사와(藤澤秀行)도 이름 읽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훈독(訓讀)에 충실한 후지사와 히데유키, 또 하나는 음독(音讀)해 후지사와 슈코로 읽기도 한다. 원래 일본에선 수(秀)자를 최고 바둑가문(家門)인 본인방 후계자만 쓸 수 있었는데, 후지사와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슈코로 불렀다. 슈사이(秀哉), 슈사쿠(秀策) 등 본인방가 거물들과 동일 항렬에 올려놓은 것이다. 바둑계에서 별칭(別稱)이나 이명(異名)으로 불리는 이름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선 한자(漢字) 발음에 따른 이름 표기법에 가끔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가 ‘매울 烈’자에 대한 표기다. [렬]과 [열] 두 가지 모두 통용되기 때문에 종종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프로기사 李洪烈 9단과 韓相烈 6단은 어떤 표기가 옳을까. 지극히 간단한 원칙이 있다. 이름 주인이 결정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기사는 [이홍열], [한상열]로 부른다.

▲ 일본 바둑계의 괴물로 불렸던 후지사와 슈코 9단
한국이 배출한 최고 프로야구 스타 중 한 명인 宣銅烈의 경우 현역 시절 [선동렬]과 [선동열]이 매스컴마다 반반씩 뒤섞여 나와 자주 혼선을 빚었다. 이것이 어느 날부터 [선동열]로 통일됐다. 역시 본인 스스로가 정한 것을 따랐다. [선동렬]로 표기하는 매스컴이 사라졌고 [선동열]로 통일됐다.
柳氏는 한때 劉氏, 俞氏, 庾氏 등과 함께 ‘한글 종씨’로 통했으나 언젠가부터 그 울타리를 벗어났다. “우리는 유아닌 류씨”란 선언과 함께 독립(?)한 것이다. 류동완 4단-류민형 8단 형제, 류수항 6단 등이 류씨(柳氏) 그룹에 속한다. 반면 유창혁 9단, 유재호 8단은 劉, 유재성 5단과 유오성 8단은 兪씨로 모두 유씨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 나카무라라는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으로 불러달라고 선언한 스미레 3단.
발음에 대한 당사자 선택권은 한자(漢字) 문화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1980년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Ronald Reagan이 처음 등장했을 때 상당수 언론매체들은 그의 이름을 [리건]으로 읽고 표기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이름을 [레이건]으로 불러줄 것을 전국 언론사에 요청했고 그 후부터 혼란이 사라졌다. 스미레 3단은 이번 선언으로 이름에 대한 일체의 권한이 당사자에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물론 ‘무조건 본인 마음대로’는 아니다. 최소한의 규범을 우선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원로 프로기사 朴振悅 9단의 경우는 무조건 [박진열]이 맞는다. ‘기쁠 열‘자 悅에는 [렬] 발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인이 원한다고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尹錫悅 대통령도 같은 케이스에 해당한다. 尹錫悅은 무조건 [윤석열]로 쓰고 [윤성녈] 아닌 [윤서결]로 읽어야 한다. ’윤석렬 대통령’은 틀린 표기다. 프로기사 朴時烈 6단을 [박시열]로 부르는 것도 가운데 글자에 받침이 없을 경우 [열]로 표기한다는 원칙이 먼저 적용됐다.
이름은 다기(多岐)화 된 현대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밝히기 위해 건네는 명함 같은 것이다. 경쟁 치열한 일부 직업에선 자신을 어필하는 교두보로 활용하기도 한다. 만 열 다섯 어린 소녀가 안락한 집을 박차고 나와 가시밭길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스미레’ 란 새 브랜드엔 ‘신장개업’하는 그녀의 다부진 결의가 소복이 담겨 있다. 당찬 도전정신이 탐스런 제비꽃 덩굴로 활짝 피어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