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시즌이 시작된다. 29회째를 맞는 올해 LG배는 첫 단추 격인 아마추어 선발전을 신호탄으로 이미 1년 레이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뒤이어 4월 국가별 선발전을 치르고, 5월 20일부터 대망의 본선에 돌입한다.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결승 3번기는 2025년 1월 하순 열릴 예정이다.

▲ 1999년 제3회 LG배 결승서 맞붙은 이창호(왼쪽)와 마샤오춘. 이창호가 3대0으로 이겨 두 번째 우승을 이뤘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우승컵이 누구의 품에 안길까 하는 것이다. LG배가 28개 성상(星霜)을 쌓는 동안 배출한 우승자는 모두 21명에 달한다. 이 기간 2회 이상 복수(複數)로 트로피를 들어올린 기사는 단 4명뿐이다. 그만큼 LG배는 특정 기사의 장기 집권이나 연패(連覇)를 허용하지 않는 징크스로 유명하다. 이창호가 4회로 가장 많고 신진서(3회)가 2위로 뛰어올랐다. 이세돌과 중국 구리가 각 2회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다른 메이저 기전사를 보면 LG배가 ‘구관(舊官)’의 장기 집권에 얼마나 인색한지 실감하게 된다. 삼성화재배의 경우 이창호가 3회 연속, 조훈현 이세돌 커제는 2회 연속 정상에 올랐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TV아시아선수권대회의 경우 일본 다케미야 마사키가 1회부터 4회 대회까지 초기 4년을 독식한 신화가 전해져 온다.
올해 LG배 개막을 앞도고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사는 역시 신진서(24) 9단이다. 그는 올해 초 끝난 28회 LG배서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이기도 하다. 이 우승으로 그의 메이저타이틀 창고의 절반을 LG배가 메웠다. 신진서은 총 6번 세계 대회를 제패,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구리 커제(이상 각 8회)에 이어 유창혁과 함께 동률 6위로 발돋움했다.

▲ 2001년 제5기 LG배 결승 모습. 이창호(왼쪽)가 이세돌에게 2연패 후 3연승, 두 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신진서의 요즘 기세에 대해선 긴 말이 필요없다. 꾸준히 9할 안팎 승률을 오가며 올들어서만 개인전인 LG배(28회)와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25회)를 각각 전승으로 장식했다. 특히 농심배에선 이창호가 보유 중이던 마무리 연승기록(5회→6회)과 통산 연승기록(14승→16승)을 갈아치웠다. 우승 경쟁국인 중국 출전선수 5명 전원을 돌려세운 것도 최초의 기록이었다.
LG배에서도 이창호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만약 신진서가 29회 LG배를 정복한다면 이 대회 최다우승 타이를 이루게 된다. 이창호와 나란히 4회 우승 대기록을 공유하는 것. 물론 이창호가 다섯 번째 LG배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이창호는 우리 나이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노장임을 감안해야 한다.
내친 김에 이창호와 신진서 두 거인이 거쳐온 LG배 여정을 비교해 보았다. 이창호는 LG배 원년인 1996년 1회부터 2013년 제20회 대회까지 18년간 총 54승 22패, 승률 71.1%를 기록했다(예선 전적 제외). 대회 초창기인 1, 3, 5, 8회 등 네 차례 정상에 올랐는데, 이 중 1회(7승 무패)와 3회(6승 무패) 두 번은 전승 우승이었다. 총 7번 결승에 진출해 4번 우승, 결승전 승률 57.1%를 기록했다.

▲ 유명한 백담사 대국(2009년 13기). 구리(오른쪽)가 동갑라이벌 이세돌을 2대0으로 제압했다.
신진서는 21회 때 처음 본선에 모습을 드러내 4강까지 진격했다. 이번 28회 대회까지 총 8회 출전한 본선 성적은 25승 5패, 승률 83.3%로 이창호에게 10%포인트 이상 앞선다. 24회 때 6전 전승, 26회 때 5전 전승, 다시 28회 때 5전 전승으로 세 번 모두 퍼펙트 우승했다. 세 차례 결승에 올라 모두 우승함으로써 결승전 승률 100%다. 단순 비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일단 모든 지표가 이창호를 능가한다.
통산 2회 우승으로 공동 3위인 이세돌과 구리의 역대 LG배 성적은 이창호-신진서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세돌은 1997년 2회 대회 때 처음 본선에 올라 2018년까지 22년간 본선 성적 31승 24패(56.4%)를 기록했다. 7회와 12회 대회서 각각 6승 1패로 우승했다. 퍼펙트 우승은 없었다. 준우승도 두 번(5회, 13회) 기록해 결승 승률은 ‘반타작’이었다.
구리는 10회 대회 때 7승 2패, 13회 때는 6승 무패로 두 번 정상을 찍었다. 이 시기는 구리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결승 상대는 각각 천야오예와 이세돌이었다. 9회부터 21회까지 LG배에 꾸준히 참가해 통산 23승 12패, 승률 65.7%를 남겼다.

▲ 신진서(왼쪽)가 박정환을 2대0으로 꺾고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2020년 24회 대회.
역대 LG배 우승자 리스트를 들여다 보면 묘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당대 1인자들이 작성해온 격년제 우승 전통이다. 이창호는 1회와 3회, 5회 대회 제패로 ‘징검다리 우승’을 따냈다. 신진서는 24회 대회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신고한데 이어 26, 28회 대회를 정복하며 역시 ‘격년제 우승‘으로 대회 후반부를 장식 중이다. 같은 격년제라도 이창호는 홀수 회, 신진서는 짝수 회로 쏠린 모습이 더욱 이채롭다.
신진서가 29회 대회서 우승할 경우 LG배는 대회 사상 최초의 연속 우승자 등장이란 새 이정표를 맞이하게 된다. ‘전기(前期) 챔프는 이듬해 대회서 초반 탈락한다‘는 LG배의 오랜 불문율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아직까지는 당대 최고수들조차 이 징크스의 덫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여 왔다. 신진서가 ’짝수 회 우승 전문‘이란 농담도 폐기된다.

▲ 현역 세계 최강자 신진서 9단은 24, 26, 28기 등 LG배 3회 우승으로 4번 제패한 이창호를 바짝 뒤쫓고 있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신진서는 28기 LG배 시상식 자리에서 “LG배가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나도 없었을 것이다. 꾸준히 좋은 대회를 열어준 LG측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의례적 인사말로 들렸는데, 신진서는 뒤이어 각오를 드러냈다. “연속 우승이 한 번도 안 나왔다, 전기 우승자는 이듬해 반드시 부진하다 등 징크스가 있다는데 내가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신진서 자신도 우승 이듬해인 25회 대회 16강전서 커제에게, 27회 때는 8강전서 양딩신에게 발목을 잡혀 조기 하차의 쓴맛을 봤었다. 그의 ‘징크스 탈출’ 선언은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의 페이스가 계속된다면 이 목표는 이루어질 공산이 매우 커 보인다. 신진서는 이제 한국바둑의 확고한 신뢰 브랜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