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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바둑계 1인자 교체의 역사
 
승부 세계에도 권력 이양의 변곡점이 존재한다. 영원할 것 같던 1인자도 예측 못 한 치명상을 맞고 권좌에서 내려온다. 다시 기회가 와도 일어서지 못 한다. 역대 한국바둑 1인자 계보로 꼽히는 최정상 기사들의 권력 이동 역사를 살펴보았다.

◇조남철-김인

한국 바둑 1세대와 2세대를 대표하는 조남철과 김인의 대결은 초창기 만남 때부터 치열했다. 둘 간의 첫 대결이 이뤄진 1961년은 조남철이 38세, 김인이 18세 때였고 김인이 승리했다. 승단대회 대국이었던 만큼 호선(互先) 대국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최초의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당대 독보적 실력자였던 조남철로서도 김인 만은 녹록하지 않았다.

▲ 1971년 열린 제15기 국수전 도전 4국서 국후 감상을 나누고 있는 도전자 조남철 8단(오른쪽)과 국수 김인 7단.

두 기사는 1962년 초 제6기 국수전과 제3기 최고위전에서 연속 도전기를 펼쳤다. 국수전은 첫판서 무승부(빅)가 나오는 등 백중한 승부 끝에 조남철이 3승 1무 1패로 끝냈다. 뒤이어 끝난 최고위전도 조남철이 3승 2패로 신승했다. 3월 7일 최고위전 5국을 마친 이틀 후 김인은 도일 유학을 떠났다.

김인은 일본 유학 1년 9개월만인 1963년 11월 25일 귀국한다. 그리고 제5기 최고위전서 다시 조남철에게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풀세트 접전 끝에 2대3으로 물러섰다. 역사는 1966년 1월 13일 시작된 제10기 국수전서 이루어졌다. 김인이 3승 1패로 도전기를 마감, 마침내 조남철 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승부세계 권력 이양 과정엔 변곡점(變曲點)이 존재한다. 물줄기를 젊은 후배 쪽으로 이끈 특정 기전이나 대국을 뜻한다. 10기 국수전은 조남철로선 도전 세력에게 당한 최초의 패배였지만 이후 권좌에 복귀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 했다. 제10기 국수전이야 말로 한국 바둑계 패권 역사에서 처음 이뤄진 권력 이동의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후배는 발전하고 선배는 노령화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국수위 이양 직후 조남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소회(所懷)를 밝혔다.

“10년을 못 채워 팬들게 죄스럽다. 그러나 타이틀전서 비로소 1패를 당했다는 점을 뜻깊게 여기고 싶다. 누가 내게서 타이틀을 빼앗느냐의 숙제가 풀렸다. 김인 군의 놀라운 기력은 패한 내게 오히려 영광을 느끼게 한다. 오직 자연의 귀결일 따름이다. 홀가분하게 기도보급 임무에 노력하겠다.” 조남철의 김인 상대 통산전적은 38승 1무 69패였다.

◇김인-조훈현

국수 타이틀 탈취를 신호탄으로 김인의 시대가 열렸다. 국수전 6연패(連覇), 왕위전 7연패 등 승승장구했다. 절정기에 해당하는 1968년엔 숱한 명검, 호걸들의 도전을 제치고 40연승 신화를 내달리기도 했다. 선대 1인자 조남철 못지않은 장기 집권이 가능해 보였다.

▲ 조훈현(왼쪽)이 1977년 김인의 도전을 3대0으로 따돌리고 제12기 왕위전을 방어했다.

하지만 새끼 호랑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훈현. 호적 나이 기준으로 김인보다 딱 열 살 아래다. 한때 세계 최연소 입단기록을 보유했다. 생애 최다 타이틀(161개)은 아직도 그의 몫이다. 국내 전관왕 3회, 새계 메이저 우승 9회 등 조훈현은 그 자체로 ‘기록 공장’이다. 조훈현은 선배 김인에 비하면 선대(先代) 1인자의 벽을 수월히 뛰어넘고 보좌에 올랐다.

김인과 조훈현은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연령차는 있지만 나란히 일본 유학을 다녀온데다 1인자 계보를 주고받은 인연 등 여러 측면에 공감대가 존재했다. 조훈현은 김인을 존경하는 선배로 따랐고 김인은 조훈현을 기특하고 대견한 후배로 대했다. 일화가 여럿 전해져온다.

두 거장 간의 승부는 뜻밖에도 비대칭적 곡선으로 마감됐다. 김인의 조훈현 상대 전적은 47전 8승 39패다. 변곡점이 너무 일찍 찾아왔다. 조훈현이 군 복무를 위해 1972년 귀국 후 1년 반 뒤인 1974년 초 제 14기 최고위전 도전 5번기가 열렸다. 전문가들은 1인자 김인 7단이 젊은 천재 조훈현 5단을 제치고 3연패(連覇)를 이룰 것으로 진단했다. 그때까지 둘 간 전적은 김인이 2승 1패로 앞서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조훈현이 일직선으로 밀고 나가더니 “어 어”하는 사이 조훈현의 3대0 완봉승으로 끝났다. 훗날 김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술회했다. “마치 술에서 깬 느낌이라고 할까. 제까짓 게 마라톤 초반 경주에서 조금 앞서나간 것일 뿐 내가 곧 따라 잡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때 나를 완전히 추월해버린 것이었다.”

최고위전 도전기 당시 조훈현은 21세, 김인은 31세였다. 상향 곡선과 하향 커브가 만나 변곡점을 만들었고 자신감과 부담감이 격차를 가속화시켰다. 변곡점이 찍힌 뒤 그려지는 승률곡선은 대부분 추상처럼 엄격하고 비수처럼 냉정하다. 외상(外上)이나 바겐세일 따위가 들어설 빈틈이 전혀 없다.

◇조훈현-이창호
바둑 역사상 최고의 사제 커플인 둘은 각각 161회, 141회 우승했다. 대국을 위해 마주 앉은 횟수가 313번에 이른다. 이창호 기준 194승 119패. 1990년대 두 사람은 날만 새면 뛰쳐나가 싸웠다. 출발은 스승 조훈현이 압도적으로 앞섰다. 1988년 말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치른 13판의 대국에서 이창호는 단 1승에 머물렀다. 둘의 나이 차는 자그마치 22년이다.

전적을 살피기 전 염두에 둘 것은 이창호의 거처(居處)디. 그는 아홉 살 때인 1984년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가 1991년까지 7년 여 동안 스승과 한솥밥을 먹었다. 1986년 프로 입단 후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를 스승과 함께 타고 대국장으로 향하곤 했다. 1988년 첫 사제 도전기(28기 최고위전)의 1대3 패배, 1989년 제13기 국수 도전기 0대3 완봉패 등은 모두 이때 기록한 것이다.

이창호는 1990년 29기 최고위전서 조훈현에게 3대2로 승리, 사제 타이틀 대결에서 처음 이겼
다. 둘 간의 1인자 바톤 터치가 이뤄진 변곡점은 이 대회를 꼽아야 할 것 같다.

▲ 조훈현(왼쪽)과 이창호의 대결. 22살 차 사제 관게인 두 사람은 장장 313판을 싸웠다.

스승 곁을 떠나 ‘하산(下山)’한 연도인 1991년만 보면 두 사람은 무려 30국을 두어 이창호가 18승, 조훈현이 12승을 올렸다. 칼자루를 바꿔 쥔 것이다. 기량 성장, 스승 품을 벗어난 해방감, 40대로 접어든 조훈현의 쇠락 등이 두루 작용했으리라. 이창호는 1992년 사상 최연소 세계제패(제3회 동양증권배)를 기점으로 세계 메이저 17회 우승을 일궜다.

◇이창호-이세돌

이세돌은 이창호의 뒤를 이어 집권, 역대 3위인 50번 우승했다. 세계 메이저 봉에도 14번이나 올랐다. 하지만 이창호를 끌어내리고 대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른 커플들과 달리 둘은 거의 대등한 경쟁을 펼치다 ‘자연 양위(讓位)‘ 코스를 밟았다.

두 기사는 두 번의 세계 타이틀전을 포함해 모두 아홉 차례 결승서 격돌해 이창호가 5번, 이세돌이 4번 승리했다. 대체로 선배 이창호가 먼저 달아나면 후배 이세돌이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제5기 LG배가 분수령이었다. 2001년 2월 시작된 결승 5번기 1-2국을 이세돌이 이겼다. 하지만 80여 일만에 속행된 3~5국을 이창호가 모두 이겨 대역전 드라마를 썼다. 이 대결을 이세돌이 우승으로 이어갔다면 이창호를 추월하는 변곡점이 마련됐을 것이다.

이세돌도 비범한 승부사다. 2003년 초 끝난 제7회 LG배 결승을 3대1로 끝내고 5기 대회 분패를 설욕했다. 이어 6기 물가정보배(2010년)와 올레배(2011년) 결승 대결서 이창호를 꺾으며 맹추격했으나 더 이상 결승 만남은 없었다. 2018년 초 맥심배 대결서 승리한 뒤 이세돌이 은퇴의 길을 택하면서 둘의 대결은 종지부를 찍었다. 최종 스코어는 36대 34로 이창호가 앞선 상황에서 대물림은 이뤄지지 않았다.

▲ 2001년 제5기 LG배 결승서 맞닥뜨린 이세돌(왼쪽)과 이창호. 이세돌이 1, 2국을 완승한 뒤 80여일만에 속개된 3, 4, 5국을 이창호가 가져갔다.

소신 발언으로 유명했던 이세돌은 10대 후반 시절 “내가 세계 최강인 것 같다”고 말하는 당돌함을 보였었다. 하지만 타이틀 수가 늘고 세계 정상권을 드나들 무렵엔 “이창호 사범님이 가장 세다”고 했다. 의레적 겸양만은 아닌, ‘무르익어 고개 숙인 벼’의 느낌이었다. 이세돌은 이창호보다 8살 연하다.

◇이세돌-박정환

이세돌과 박정환도 시간적으로 함께한 활동 기간이 길지 않았다. 전성시절 또한 일부만 겹쳤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이세돌은 열 살이나 아래인 박정환에게 패할 때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고, 어린 박정환도 이세돌에 패하는 날은 눈물을 비치곤 했다.

둘은 2013년부터 다섯 번 결승서 만났다. 이세돌이 3번, 박정환이 2번 우승했으나 우열을 논하기 힘들 정도로 치고받았다. 둘은 30전을 겨뤄 이세돌이 18승 12패로 앞선 채 2016년 6월 거행된 제8회 잉씨배 준결승(박정환 2대1 승리)을 마지막으로 대결사(史)를 마쳤다.

◇박정환-신진서

초창기 최고 영재 신진서에게 박정환은 거대한 천적이었다. 2013년 첫 대면 후 4연패로 시작했고 2018~19년 사이엔 9연패에 허덕였다. 다른 기사들과 싸울 때는 펄펄 날다가도 박정환만 만나면 이상하리 만큼 패배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정환 스스로 “실력 면에서 5대5인데 너무 긴장하는 것 같다”고 겸연쩍어 할 정도였다.

▲ 신진서(왼쪽)와 박정환의 2020년 쏘팔 코사놀 7번기서 신진서가 7승 무패로 완승했다. 그해 초 열린 제24회 LG배 결승전이 변곡점이 됐다. (사진=한국기원)

타이틀 결승 맞대결 3연패 후 맞이한 2020년 제24회 LG배가 신진서 비상(飛上)을 위한 변곡점이 됐다. 둘 간의 첫 세계 메이저 패권다툼이기도 했던 이 대결서 신진서는 박정환의 벽을 처음으로 넘었다. 2대0으로 완승한 신진서는 이어 벌어진 쏘팔코사놀 최고기사 결정 7번기를 7대0으로 완봉 장식하면서 리버스 스윕을 성취했다.

2024년 1월 10일 현재 둘 간 상대전적은 40승 23패로 신진서가 리드 중이다(현재 11연승). 정황상 승률곡선을 다시 거꾸로 돌리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신진서의 기세가 워낙 좋기 때문이다. 박정환은 31세, 신진서는 24세로 접어든다. 박정환-신진서 관계는 변곡점이 가장 뚜렷한 한 쌍이라고 할 만 하다. 신진서는 언제 누구와 어떤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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