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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한국바둑 4대 대첩
 
곡절 많고 사연도 많던 2023년 한 해도 저물어간다. 바둑계도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많은 일을 겪었다. 아쉬운 일도 적지 않았지만 ‘대첩(大捷)’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희소식이 연중 내내 전해졌다. 한국은 종합 스포츠제전인 아시안게임을 비롯 최대 규모 개인전인 잉창치배, 3회 연속 한국 품을 찾아온 춘란배, 여성 국제대회 2관왕을 탄생시킨 우칭위안배와 함께 했다. 그 족적을 복기해 본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2連覇

바둑이 스포츠냐 아니냐란 논란과는 별개로 그 성적에 대한 관심은 웬만한 개인 바둑대회를 능가한다. 각국 에이스급 강자들이 모두 출전해 집중적, 반복적으로 대결하기 때문일 것이다. 4년마다 열리는 희소성도 작용하는데다 언제 또 열린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 현실을 잘 아는 선수들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슴 졸이며 고된 일정을 감수했다. 특히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비 훈련은 코로나 등의 변수 탓에 1년 연기 끝에 치러졌다.

▲ 항저우 아시안게임 우승을 위해 합동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 2년 가까운 고행 끝에 2010년 광저우 대회에 이어 남자 단체 2연패를 이루었다. (사진=한국기원)



3개 종목에서 메달을 다퉜다. 한국은 2010년 열렸던 광저우 대회에 이어 또 한 번 전 종목을 석권한다는 각오로 임했으나 금메달은 남자 단체전 1개에 그쳤다. 여자 단체 팀이 은메달을, 남자 개인전에 나간 신진서는 동메달을 추가했다.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럿이 힘을 합해 국력의 총화(總和)를 겨루는 단체전의 값어치가 개인전보다 앞설 것도 같다.

10월 3일 항저우시 중국기원 분원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결승전은 한국 바둑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한국 랭킹 3위(이하 당시 순위) 변상일이 중국 16위 리친청에게 제일 먼저 패했지만 뒤이어 연속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신진서가 양딩신(중국 3위)을, 신민준(한국 4위)이 중국 2위 커제를 꺾어 역전 리드를 잡았다. 신민준-커제전은 한때 인공지능 승률이 10%에도 못 미칠 만큼 신민준의 열세였으나 집념의 추격 끝에 뒤집었다. 게가 결과도 더 이상 짜릿할 수 없는 반집 차였다.

▲ 금메달을 목에 걸고 만세를 부르고 있는 남자 대표선수들. 왼쪽부터 박정환 김명훈 신진서 신민준 변상일 이지현. (일본기원 제공)


결승점은 한국 대표팀의 대들보 격인 박정환이 따냈다. 국내 랭킹 2위 박정환은 중국 4위 미위팅을 흑 불계로 물리쳤다. 가장 늦게 끝난 김명훈(국내 5위)-자오천위(중국 13위)전에선 김명훈이 백으로 4집 반을 남겨 마지막 승리 축포를 쏘았다. 예선에 이어 본선 토너먼트서도 중국을 연속 4대1로 눕혔다. 한국이 아시아 최강임을 재확인했다.

돌이켜 보면 남자 단체전 우승은 단순한 금메달 하나로만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1승이었다. 남자 개인전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신진서가 결승에 오르지 못했고, 세계 여자 톱 스타로 지목되는 최정이 이끄는 여자 단체전마저 결승서 중국에 패했기 때문이다. 자칫 ‘노 금메달’로 끝날 수도 있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우승국이다. 항저우 대회를 포함해 단 두 차례 치러진 이 종목을 모두 석권했다. 서두에서도 지적했듯 바둑이 아시안 게임서 존속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남자 단체 2연패(連覇)는 어쩌면 이 대회 바둑 종목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역사책에 남을 것이다. 광저우 대회 남자 단체전과 혼성 페어 종목 2관왕이었던 박정환의 ‘통산 금메달 셋’ 역시 불멸의 업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신진서의 ‘바둑 올림픽’ 우승

세계 바둑 ‘지존’ 신진서는 지난해부터 2023년 목표를 질문 받을 때마다 “아시안 게임과 잉씨배 우승”이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잉씨배는 최고 우승자에게 40만 달러(약 5억 3000만원)가 지급되는 최고상금 대회다. 명에와 실속,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다짐이었다. 신진서의 꿈은 결과적으로 아시안게임에선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반면 잉씨배에선 완벽한 성공드라마를 썼다.

▲ 잉씨배를 들고 포효하는 우승자 신진서. 4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 제패로 우승 상금 40만 달러의 주인이 됐다. (사진=한국기원)


8월 23일 상하이(上海)가 역사의 현장이 됐다. 중국 21위인 동갑나기 세커는 4귀를 선점하는 실리작전으로 나왔지만 신진서의 질긴 그물을 뚫지 못하고 고전을 거듭했다. 형세가 겨울 나뭇가지에 걸린 석양처럼 기울고 시간 초과로 2점 벌점까지 안게되자 항복했다. 1국에 이은 신진서의 2대0 완봉승이었다.

대회장 옆 콜롬비아서클 해군클럽 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신진서는 “응씨배의 경기 규칙에 맞춰 많은 준비를 했는데 우승하게 돼 기쁘다. 긴장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대국 전날 밤 잠을 설쳤다.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 드린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 전적에서 1승 2패로 뒤집힌 셰커에겐 10만 달러의 준우승 상금이 전달됐다.

이 승리로 한국의 잉씨배 석권 전통이 14년 만에 부활했다. 원년(1988~89년) 우승자 조훈현을 신호탄으로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최철한의 대를 이어온 ‘한국 전용기전’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중국은 이후 창하오 판팅위 탕웨이싱 등을 앞세워 한국 추격에 나섰지만 신진서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어느 새 양국 잉씨배 우승 횟수는 한국 6회, 중국 3회로 더블 스코어가 됐다.

신진서는 한국 바둑의 맥을 잇는 일인자 계보의 일원이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를 역대 일인자로 꼽는다. 그 명단 말석에 이름 석자를 각인함으로써 신진서는 자신에 맡겨진 임무를 완수했다. 이세돌 박정환이 미처 다다르지 못한 준봉(峻峯)에 태극기를 꽂았다.

▲ 춘란배를 들고 포즈를 취한 변상일. 프로 생활 11년만에 첫 세계 제패 염원을 풀었다. (사진=한국기원)

▨세계 제패의 ‘평생 한’을 푼 변상일

변상일이 마침내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97년생. 만 26세 나이에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7월 19일 중국 충칭 하얏트호텔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변상일은 가장 높은 자리에 섰다. 그리고 중국 원로기사 녜웨이핑과 나란히 섰다, 격전의 앙금이 남았을까, 아니면 감회가 그만큼 벅찼던 것일까. 시상식장에서도 그의 표정은 이제 막 대국하러 들어가는 사람처럼 굳어있었다.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 선수권대회 1년 레이스는 변상일을 위한 행군이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노정을 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1회전서 일본 간판 이치리키료를, 2회전에선 현 중국 1위인 구쯔하오를 제쳤다. 8강이 겨룬 3회전 상대는 중국 2000년생 스타 중 한 명인 리웨이칭이었고, 세 번이나 세계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탕웨이싱을 준결승서 탈락시켰다.

결승 상대는 리쉬안하오. 4강전서 신진서를 눕힌 뒤 양딩신으로부터 ‘치팅 혐의자’로 몰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에 걸쳐 세계 바둑계를 뜨겁게 달궜던 바로 그 기사다. 둘 간의 신경전은 중국 바둑협회의 개입으로 양딩신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매듭지어졌지만 변상일-리쉬안하오의 결승전은 특별한 주목 속에 열렸다. 결과는 11년 기사생활 중 최고의 집중력을 보여준 변상일의 2대0 스트레이트 승리로 낙착됐다.

우칭위안배 시상식에 선 우승자 최정. 센코컵을 포함해 양대 여자 국제대회 패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최정 오른쪽은 중국바둑협회 주석인 창하오 9단. (사진=한국기원)


변상일은 깊은 수읽기, 화려한 공격력으로 최정상권을 지키면서도 신진서 박정환의 벽을 넘지 못해 ‘영원한 넘버 3’로 불리곤 했다. 그의 세계 제패를 향한 염원이 가장 절절히 드러난 대회가 지난 해 연말 열렸던 제27회 삼성화재배였다. 여성기사 최정과의 준결서 패색이 짙어지자 대국 중 자신의 뺨을 때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책했다. 변상일은 대국 후 자신의 행동에 정중하게 사과했다.

변상일의 정상 등극은 신진서-박정환에만 머물던 한국기사의 세계대회 ‘우승자 풀’이 제3자에게로 확장됐다는 데 의미가 크다. 투톱을 받쳐주는 든든한 후방 부대가 형성된 것이다. 춘란배에서 12회(2019년) 때의 박정환, 13회(2021년) 우승자 신진서에 이어 한국이 춘란배 3연속 우승 행진을 이어가게 다리를 놓은 것도 변상일의 공로다.

▨최정, 양대 여성 세계기전을 품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3일, 세계 바둑 ‘여제(女帝)’ 최정 9단이 큼지막한 마침표를 찍었다. 여성 대회로는 최고 권위를 차지한 제6회 우칭위안배를 품에 안은 것이다. 중국이 배출한 불세출의 기성(棋聖) 우칭위안 9다을 기리기 위해 푸젠(福建)성 정부가 2018년 창설했다. 푸젠은 우칭위안의 고향이다.

▲ 우칭위안배 시상식에 선 우승자 최정. 센코컵을 포함해 양대 여자 국제대회 패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최정 오른쪽은 중국바둑협회 주석인 창하오 9단. (사진=한국기원)력


최정은 중국 10대 유망주 우이밍, 일본 여자 정상 우에노, 중국 중견기사 팡뤄시를 줄줄히 격파했다. 뒤이은 결승전서는 일본 여류본인방 후지사와 리나를 2대0으로 무릎 꿇리고 무패 전적으로 우승컵의 주인이 됐다. 최정은 2회와 4회 우칭위안배 때도 우승해 이 대회서 ‘짝수 해 패권’ 징크스를 이어갔다.

최정의 우승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지만 예상보다 더 수월하게 골인했다. 결승까지 후지사와 리나가 보여준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리샤오시 왕천싱 위즈잉 저우훙위 등 중국 최정상권 라인을 차례로 메치고 올라온 것. 중국은 두 달 전 끝난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단체전 우승국이다. 한국과 일본 간의 첫 여자 국제대회 결승전으로도 주목받은 최종전서 최정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후지사와를 눌렀다..

최정은 이에 앞서 3월 초 끝난 제5회 센코컵 월드바둑 여류최강전도 우승으로 장식했다. 비록 8명 초청 형식의 소규모 행사지만 일본이 중국 우칭위안배에 맞서 의욕적으로 창설한 대회다. 여기서 최정은 후지사와 리나, 나카무라 스미레, 저우훙위를 연파하고 우승했다. 한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던 센코배 도전 5번만에 일군 첫 우승이었다.

최근 만 120개월 국내 여자랭킹 1위를 지킨 최정은 센코배와 우칭위안배를 모두 석권함으로써 국내외를 여성 바둑계를 통일했다. ‘최정 여제(女帝) 시대’를 확인한 우칭위안배는 2023 한국바둑 4대 대첩 현장 중 하나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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