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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의 질주 어디까지 이어질까
 
단순히 퀸(Queen)이란 표현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냥 1인자가 아니고 광활한 전체 판도를 혼자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칭이 여제(女帝) 쯤은 돼야 어울릴 것 같다. 여자바둑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를 굳힌 최정 9단 이야기다.


▲ 춘란배 우승자 변상일 9단을 상대로 GS칼텍스배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최정.


그녀가 공식적으로 국내 여자바둑 정상의 자리에 즉위한지 딱 10년이 지났다. 2013년 12월 처음 랭킹 1위에 오른 이후 그 자리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내려오기는커녕 절대 권한을 계속 강화해왔다. 남녀 통합랭킹도 꾸준히 상승했다. 2014년 10월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 이후 성큼성큼 솟아올라 올해 3월엔 개인 최고점인 13위를 찍었다. 머지않아 10위의 벽마저 허물 기세다.

랭킹만이 아니다. 타이틀 무대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그는 지난해 말 기념비적 기록을 세웠다.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여자 기사로는 사상 처음 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그 과정이 또한 극적이었다. 결승에 진출하기까지 그는 한 중 일 3국의 간판급 기사 4명을 연파했다. 1992년 루이나이웨이가 작성했던 여자 최고기록(4강)을 넘어섰다.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에 앞서 최정이 LG배에서 보여온 활약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예선에 여성조와 시니어조를 별도로 둔 삼성화재배와 달리 LG배는 성별 및 나이 구분 없이 한데 섞여 예선을 치른다. 당연히 LG배 쪽의 난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최정은 2016년 21회 LG배서 여성기사 최초로 본선행 역사를 썼다. 21회에 이어 22회와 24회 통합 예선도 통과했다. 25회는 와일드카드를 받고 출전했다.


▲ 최정(왼쪽)은 세계 최강자 신진서와 2022년 말 삼성화재배 결승서 패했지만 여자바둑 사상 혼성 메이저 기전 사상 최고의 기록을 작성했다.


이번엔 국내 성적표를 살펴보자. 우선 전체 프로들이 나오는 종합기전이다. 최정은 최근 끝난 제26기 GS칼텍스배에서 현역 세계 챔피언(춘란배) 변상일과 결승전을 치른 끝에 준우승했다. 안동시 참저축은행배 4강이던 개인 최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한국바둑리그엔 스무살 때인 2016년 처음 입성해 여섯 시즌을 뛰는 동안 2지명으로 올라섰다.

최정의 여자대회 성적은 거의 ‘독점’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2010년 입단, 13년 동안 총 26개(국내 18, 국제 8) 대회를 석권했다(8월 10일 현재). 중국 출신 여성기사 루이나이웨이가 한국서 13년간 거둔 31회 우승(국내 25, 국제 6) 기록을 길어도 1년 안에 따라잡을 추세다.

내용도 압도적이다. 최정은 여자국수전을 4연패(連覇) 중인데, 이는 도전제 아닌 여자 선수권대회로는 최고 기록이다. 그가 보유한 여자리그 31연승(2018~2020년) 기록은 남녀 통틀어 단일 기전 연승기록 역대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신진서의 36연승(2022~2023년)이다.

각종 통계기록도 눈부시다. 데뷔 후 771승 350패(68.8%)로 승률이 70%에 육박한다. 생애 통산승률 70%는 레전드급 강자 그룹에 속한 극히 일부 기사들만의 전유물이다. 최정의 연도별 성적표를 보면 도약 속도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데뷔 첫 해(2010년)만 1승 5패로 출발했을 뿐, 그 이듬해 벌써 66.0%(33승 17패)로 점프했다. 연간 최고승률은 2019년 작성한 80.6%(83승 20패)다.

최정의 타이틀전 우승 승률은 무려 78.8%에 이른다. 총 33회 대회에 나가 그 중 26번 우승컵을 품고 귀가했다는 얘기다. 엄청난 기록이다. 호성적은 수입 증가로 이어져게 마련. 2014년 첫 1억원 돌파 후 매년 억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입단 이후 대국료와 상금을 합한 총 액수는 25억 7000만원으로 추산된다.


▲ 당대 최고스타였던 이창호(왼쪽)와 루이나이웨이의 TV대국 장면. 루이는 이창호에게 가장 승률이 좋았던 기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쯤 되면 최정과 ‘반상의 철녀(鐵女) 루이나이웨이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어진다. 시대와 환경, 전성기 등 모든 것이 다른 선수들을 한 잣대로 평가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이른바 GOAT(Greatest Of All Time) 놀이다. 보는 사람들의 평가 기준 또한 일치하기 힘들다. 복싱만 해도 무하마드 알리, 로키 마르시아노, 조 루이스, 마이크 타이슨 등 헤비급 선수들을 비롯해 슈거레이 로빈슨, 매니 파퀴아오, 아치 무어 등 역대 최고선수 논쟁은 항상 백가쟁명이다. 이런 점들을 전제하고 최정과 루이나이웨이를 심판대에 올려보자.

우선 세계 메이저대회 최고기록 비교다. 루이 우월론자들의 전가(傳家) 보도(寶刀)였던 제2회 잉씨배(1992년) 4강 신화는 최정의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로 빛을 잃었다. 루이가 올해 60줄에 접어들었음을 고려하면 이 부문의 재역전은 불가능하다. 최정의 삼성배 준우승은 이 논쟁에서 루이 옹호론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하지만 반격도 만만치 않다. 루이의 잉씨배 4강이 당대 무적 이창호를 디딤돌로 따낸 것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 16강전서 이창호를 꺾은 판이 4강 진출의 결정타였다. 최정이 삼성화재배 결승행 과정서 눕힌 이치리키 료, 양딩신, 변상일 등도 강한 기사들이지만 이창호와는 ‘체급 차이‘가 난다는 주장이 따라붙는다.

루이 지지자들에겐 또 하나 강력한 반박 무기가 있다. 2000년 열렸던 제43기 국수전이다. 잘 알려져 있듯 루이는 당시 막강 전사였던 조훈현을 제치고 세계 바둑 혼성 종합기전 사상 첫 여성 챔피언 등극이란 새 역사를 썼다. 도전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여기서도 이창호란 거목을 쓰러뜨렸다. 4년 뒤엔 제한기전이긴 하지만 유창혁을 메다꽂고 맥심배를 접수했다.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은 90년대 말~2000년대 초 한국 바둑 전성기를 대표하는 막강 트리오였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기사 지위를 놓고 자주 비교되는 루이나이웨이(왼쪽)와 최정. 맞대결 성적에선 최정이 4승 1패로 앞섰으나 전성기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 우열을 논할 자료로 보긴 어렵다. (사진 제공=한국기원)


그런 의미에서 이번 GS칼텍스배 결승 결과는 최정 우월론자들에게 몹시 아쉬웠다. 최정이 춘란배 우승자 변상일을 꺾고 우승했더라면 23년 전 루이나이웨이의 ‘국수전 대첩’ 못지않은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대회엔 중도 탈락하긴 했지만 현존 세계 최강자 신진서도 출전했다.

그러나 최정에겐 아직 시간이 많다. 루이나이웨이의 업적을 넘어설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질 것이다. 여성 1인자 아성이 첱통 같은데 타이틀전은 다투어 대문을 열고 두 팔을 펼쳐 손짓하고 있다. 최고의 입지(立地)가 확보돼 있다. 무엇보다 고작 27세다. 열 여섯 김은지 등 후배들이 맹추격 중이지만 최정을 넘어서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루이 9단이 프로기사 생활 40여년에 걸쳐 보여준 내구성(耐久性)이다. 그가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닻을 내린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다. 우리 여자 바둑계를 완전 개조해놓고 돌아간 뒤엔 40대 나이에 타이틀도 땄다. 47세 때 아시안게임 중국 대표로 뛰었고, 49세, 51세 나이엔 국제여자대회(궁륭산병성배)서 잇달아 준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최정의 자질과 승부 근성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는다. 체력도 문제가 없어 보이고 노력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루이나이웨이 특유의 꾸준함, 버티는 힘은 아무나 지닌 재산이 아니다. 한국 체류시절 그는 짜투리 시간만 주어져도 남편 장주주와 함께 사활문제를 풀며 의견을 교환하곤 했다. 바둑이 생활화, 체질화된 사람들이었다. 최정이 루이를 제치고 세계 바둑사상 가장 훌륭한 여성기사 칭호를 받게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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