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들의 접바둑이 늘어나고 있다. 프로의 접바둑이라고 하면 으레 아마추어에게 몇 점을 미리 놓게 하고 가르치는 지도기를 뜻했는데, 거꾸로 프로가 먼저 깔고 시작하는 대국이 많아진 것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초인적 존재인 프로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세상사 모든 변화의 바람은 어쩌면 바둑판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로기사들 간의 접바둑 대결은 많지는 않지만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다. 1970년대 전후 프로기사 수가 수 십 명에 불과했던 시절 독보적 고단자였던 조남철이 그 주역이었다. 승단대회에 나가면 대부분의 상대가 4~5단 아래 후배들이었고, 그는 총 호선으로 맞붙는 일반 기전들과 달리 그들과 단차(段差)에 맞춘 치수로 대국해야 했다. 조남철은 청년 유망주 프로들을 2점 접고도 곧잘 이기며 승단을 거듭했다.

▲ 1985년 위험대결에서 조훈현은 도전 5강을 2점 접고 2승(3패)을 올리는 파워를 과시했다. 사진은 조훈현(왼쪽)과 장수영의 대국 광경.
한국 바둑계 기린아 김인의 1962년 도일(渡日) 유학은 접바둑으로 시작됐다. 일본기원이 그에게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齊) 9단과의 시험기를 부과하면서 한국 단위(4단)를 무시하고 2점을 놓게 한 것이다. 일본 바둑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이긴 했지만 김인은 조남철과 연속 도전기를 펼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2인자였다. 2점 시험기서 완승을 거두자 일본기원은 ‘특별 케이스’란 생색과 함께 김인에게 3단을 인허했다.
국내 프로기사들 간에 접바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5년이었다. 한국기원 기관지 ‘월간 바둑’이 전관왕 조훈현과 도전 5강(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를 맞붙였다. ‘위험대결’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은 치수고치기를 적용했기 때문. 도전 5강의 정선(定先)으로 시작해 어느 쪽이건 2연승하면 치수가 바뀌는 방식이었다. 도전 5강은 최종 전적 5승 5패에 정선으로 끝냈지만 다섯 판의 2점 대국서 2패(3승)를 내주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웃 일본서도 프로 최강과 저단자 그룹이 명예를 걸고 ‘치명적 승부’를 펼치는 이벤트가 종종 열렸다. 조치훈이 대삼관(大三冠)에 즉위한 후 1983년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야마시로(山城宏), 왕리청(王立誠) 등 폭발 직전의 일본 예비스타 3명을 상대로 치수고치기를 벌인 것이 한 예. 조치훈은 이들을 2점 치수까지 끌어올렸지만 대회가 종결되면서 실제 2점 바둑은 이뤄지지 않았다.

▲ 2019년 벌어진 이세돌 은퇴기 모습. 이세돌(오른쪽)은 AI 한돌과 2점 치수가 포함된 3번기를 두어 1승 2패로 마감했다. 왼쪽은 대리 착점자.
2016년 3월 한국 이세돌이, 이듬해 5월엔 중국의 새로운 주역 커제가 연속 알파고와 맞붙어 각각 1대4, 0대3의 일방적 전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수십 년 전 첫 등장 때 인간에게 9점으로 도전을 시작했던 인공지능이 턱밑까지 추격하더니 이 양대 이벤트를 기점으로 인간을 앞질러버렸다. AI는 바둑계의 충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간과의 간격을 점점 더 벌려나갔다.
AI 천하가 열렸고 한국산 인공지능 프로그램들도 가세했다. 2019년 1월 '한돌'이 당시 한국 최강자 5명을 상대로 기량을 겨룬 적이 있었다. 신민준, 이동훈, 김지석에다 당시 세계랭킹 1위로 인정받던 박정환 및 신진서까지 나섰으나 한 판도 못 이기고 한돌에 5전 전승을 허용했다. 치수고치기였더라면 꼼짝없이 2점 이상 올라갔을 것이다.
알파고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던 이세돌이 같은 해(2019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한돌을 상대로 은퇴 기념기에 임했다. 이세돌은 2점과 호선을 오가는 치수로 분전했으나 이번에도 인공지능의 벽을 넘지 못했다(1승 2패). 2019년엔 또 다른 인공지능 강자 골락시가 등판해 조승아 및 루이나이웨이 등 중국기사 4명 포함 5명으로 구성된 제2회 오청원배 출전 여성 기사들을 2점 접고 전승했다.

▲ 서봉수(오른쪽)가 열혈도전 치수고치기에서 박정환을 상대로 분전하는 모습. 최종 치수는 서봉수의 3점으로 끝났다.
2022년에는 인공지능 개입 없이 인간 대 인간의 치수고치기가 펼쳐지기도 했다. 왕년의 승부사 서봉수(당시 69세)가 한국 최정상권 기사 5명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 1위(당시 랭킹) 신진서만 빠졌을 뿐 2위 박정환, 3위 변상일, 4위 강동윤, 6위 신민준, 7위 김지석 등 초호화 멤버가 그를 막아섰다. 당시 123위였던 서봉수는 최종국에서 박정환에게 2점으로 패하면서 최종 치수는 3점으로 끝났다.
한해 뒤 2023년에도 예상 못했던 사태가 이어졌다. 이번엔 왕년의 도전 5강 멤버 중 한 명인 서능욱이 치수고치기 팻말을 걸고 서봉수와 7번기로 맞붙은 것이다. 서봉수는 눈부신 타개와 실리전법으로, 서능욱은 번개처럼 빠른 수읽기와 공격력으로 각기 젊은 시절을 풍미했던 맹장들이다. 이 대결은 ‘소서’ 서능욱이 2점까지 내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최종국을 이겨 정선으로 마무리됐다.
올 들어 7월 하순 한경 기신전이 열렸다. 세계 1인자 신진서가 최강급 AI 카타고에 2점 접히고 격돌한 이 대결은 10년 전 이세돌-알파고전에 버금가는 관심 속에 진행돼 신진서의 2대1 역전승으로 끝났다. 당초 2점은 인간 쪽에게 다소 벅찬 치수란 전망이 많았으나 신진서는 치밀한 사전 대응으로 부담을 넘고 값진 승리를 따냈다. 이 승리로 인간 최고수와 AI 간 적정 치수는 일단 2점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인간 대 바둑 신(神)과의 적정 치수는 늘 등장하는 화제꺼리였다. 과거 일본에선 큰 기전 도전기가 끝나면 우승자에게 "바둑의 신과 대국한다면 몇 점을 깔면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단골 질문을 던지곤 했다. 매번 우승자가 바뀌니 ‘모범답안’도 존재할 수 없었다. 사카다는 ”3점“, 린하이펑은 “목숨을 건다면 4점”이라고 했다던가. 바둑 신(神)이 맡아오던 절대 강자 역할을 언젠가부터 인공지능이 떠맡은 모양새다.

▲ 지난 7월 열린 한경 기신전서 신진서가 카타고와의 접바둑을 승리한 뒤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 2점을 접히고 2승 1패를 기록했다. [사진=한국기원]
바둑 팬들은 올 연말 쯤 또 한 차례 프로기사와 AI가 정면충돌하는 치수고치기 ‘빅쇼’를 구경하게 될 것 같다. 블루스팟 오퍼레이션즈란 이름의 외국 기업이 기획하고 등장 AI 이름이 ‘블루스팟’이란 것 외엔 행사 내용이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총 상금 규모와 함께 출전기사 명단, 대국 방식 등도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여의도에서 열렸던 테스트 행사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은 엿볼 수 있다. 당시 한국기원 공식랭킹 116위~183위 사이의 프로기사 7명이 블루스팟을 상대로 온라인 치수고치기를 펼쳤다. 상금 액수가 자극적이다. 프로기사가 4점으로 이기면 400만원, 5점에 승리하면 200만원, 6점 승 경우엔 100만원을 받는다. 정선은 3200만원, 호선 승리 시엔 6400만원까지 뛴다. 매판 200만원의 대국료가 별도 지급됐다.
그러나 대국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프로기사 쪽이 토털 전적에선 4승 3패로 앞섰지만 3점으로 1패, 4점 1승, 5점 1승 2패, 6점 2승이었고 최종 치수는 4점으로 마무리됐다. 중상위권 현역 프로기사들이 인공지능에게 다섯 점으로 두 번이나 패했다는 사실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출전기사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연말로 예고된 본 대회의 제한시간도 변수다. 앞서 한경 기신전에서 신진서는 기본 5시간, 30초 초읽기 1회가 제공된 반면 카타고는 기본시간 없이 매수 20초 안에 두도록 했었다. 반면 4월 열렸던 블루스팟 테스트 행사 때는 프로기사에게도 5분에 30초 초읽기 3회만 허용해 시간 잇점 없이 대국을 치렀었다.

▲ 바둑세계가 구조조정에 접어들면서 인공지능과 바둑 신의 위상 정립도 까다로워졌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지난 반세기 흐름을 보면 바둑세계에도 뚜렷한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추어 민초들을 기반으로 프로기사가 존재하고, 그 위로 바둑 신(神)을 모셨던 구조가 인공지능(AI)이란 괴물의 등장 이후 재편이 불가피해 진 것이다. 인공지능과 바둑 신은 모두 실체가 없는 가공의 존재들이라 점수를 매기고 랭킹을 부여하기 한층 까다롭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간 실존 최강자 그룹으로 천하를 지배해온 프로기사들의 위상이 눈에 띨 만큼 크게 후퇴했다는 사실이다. 세계바둑을 호령하는 일인자가 압도적 카리스마를 내려놓고 쇳덩어리 AI에게 2점을 깔고, 그 승리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시대가 왔다. 상위권 프로들이 AI에게 5점 접히고 두 판이나 패했다. 때로는 프로끼리 치고받아 ‘치수 중상(重傷)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물론 승부의 세계가 언제까지나 체면의 포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진서는 “정수만 두는 AI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화를 모색하는 인간바둑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AI는 꺾을 대상이 아니라 동행해야 하는 존재"란 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마음 한 켠으론 팬들을 신비의 세계로 이끈 하늘같은 존재였던 프로 기사들의 위상 추락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린 영재들에게 이제부터는 카타고나 블루스팟을 목표로 프로의 꿈을 키워가라고 격려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