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국 타이저우 시에서 열린 제9회 천태산배 세계여자바둑단체전은 스릴 넘친 진행 끝에 한국의 우승으로 끝났다. 수훈 선수는 단연 최정 9단이었다. 그는 위즈잉, 탕자원, 저우훙위 등 중국 톱3과 일본을 대표하는 우에노 아사미 등 4명을 혼자서 꺾었다. 오유진과 스미레도 한국 우승을 도왔다. 이들의 맹활약 덕분에 주장 김은지는 바둑돌 한 알 놓지 않고도 우승의 기쁨을 나눠가졌다.
천태산배는 원래 한 중 일 대만 4개국 팀 리그로 치러져온 행사였는데, 2019년 8회 대회 후 중단됐다가 7년 만에 재개하면서 한 중 일 3국 국가대항 연승전으로 개편됐다. 흔히 ‘농심배 방식’으로 통하는 3개 팀 연승제 시스템으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이다. 천태산배 우승 회수는 한국이 6번, 중국 3번으로 조정됐고 내년에도 각국 4인 연승전으로 이어가게 된다.

▲ 제9회 천태산배서 우승한 한국 선수단. 최철한 코치, 최정, 김은지, 스미레, 오유진(왼쪽부터)
국내에서도 눈길을 끄는 변화가 있었다. 2007년 출범, 시니어 그룹과 여성 그룹 단체전으로 높은 인기를 누려온 지지옥션배 연승대항전이 신예 팀을 추가해 3개 팀 대결장으로 변신한 것. 2개 팀 12명 대 12명 연승전에서 신사 숙녀 신예 3개 그룹 각 10명씩 출전하는 연승전으로 진행했다. 우승 팀 상금은 1억 2000만원에 총 대국 수는 20국이 훌쩍 넘는다. 출전자 규모로나 판수로 보나 역대 연승방식 대회 가운데 최고 스케일이다.
지지옥션배 출전자격은 신사 팀이 만 40세 이상으로 한국랭킹 30위권 밖에 속한 남자기사, 숙녀 팀은 모든 국내 여자 프로기사, 신예 팀은 20세 이하 남자 프로기사로 제한했다. 2007년 출범 이후 작년 19회 대회까지 신사 팀이 9회, 숙녀 팀은 10회 우승하는 접전이 이어져 왔다. 올해 처음 출전한 신예 팀도 패기 있게 선배들과 맞섬으로써 막판까지 예측 불허의 접전이 이어졌다.

▲ 지지옥션배 출범 20주년 기념 케이크커팅 모습.
지지옥션배와 천태산배의 변화는 3각 연승방식 바둑대회의 인기와 주목도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입증한다. 국제대회인 농심배와 백산수배를 포함하면 ‘3국지’ 대회 수가 4개나 된다. 바둑대회 형식 중 가장 보편화된 유형은 여전히 녹아웃 토너먼트제지만, 아기자기한 컨텐츠와 운영 방식을 앞세운 3각 연승제 대회들로부터 그 지위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3개 팀 연승제 방식을 구상하고 다듬어 사랑받는 대회 방식으로 꽃피워낸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물론 1984년~1996년 사이 인기리에 거행됐던 중국 대 일본 2개국 연승전(슈퍼대항전)이 힌트가 됐을 가능성을 부인하긴 힘들다. 하지만 중일 슈퍼대항전은 오늘날의 3각 연승제와 비교하면 아직 여러 흥미 요소가 가미되기 전의 단순한 양자대결 방식에 불과했다.
3각 연승제 국제바둑대회의 효시는 1991년 11월 열린 SBS 개국기념대회였다. 한 중 일 3개국서 최강자 5명씩 나와 패자를 떨궈 가다 마지막까지 병력이 남은 나라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이 대회가 한국의 우승으로 끝나고 이듬해 똑같은 형식의 제1회 진로배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1997년 서봉수의 9연승을 마지막으로 한국이 5년 연속 우승하는 동안 진로배는 국제 바둑계 화제의 산실이었다.
세기 말 불어닥친 경제 한파로 진로그룹이 무너지면서 진로배도 공중에 떴다. 어느 기업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인가. 바둑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1999년 농심그룹이 ‘횡재’의 주인공이 됐다. 홍보 효과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데 고무된 농심은 2015년 대회부터 우승 팀 독식 상금총액을 2억원에서 5억원으로 대폭 인상한다. 개인 연승상금도 3연승 1000만원, 이후 9연승까지 1승당 1000만원씩 추가해 10연승이면 1억 원에 이르도록 조정했다.

▲ 1997년 제5회 진로배 우승을 이끈 서봉수가 시상식에서 화동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재미를 본’ 농심그룹은 2023년 또 하나의 3각 연승제 국제대회를 창설했다. 한중일 3개국 55세 이상 프로기사가 4명씩 출전하는 백산수배가 그것이다. 시니어 전용 대회로 매년 농심배와 함께 개최된다. 우승 팀이 독식하는 상금은 1억 8000만원. 농심배는 한국이 총 27회 대회 중 18회를 석권한 반면 백산수배는 한국의 원년 한 차례 우승 후 중국이 두 번 1위를 차지했다. 두 대회는 9월 8일 베이징서 동시에 올해 일정에 돌입한다.
천태산배 대회가 3각 연승제로 옷을 바꿔 입기 전부터 ‘여자 농심배’를 향한 각국의 관심도 뜨거웠다. 이 방식을 최초로 적용한 국제여자대회는 2002~2011년 동안 존속했던 정관장배로, 당초 토너먼트제로 시작했다가 3회 때부터 연승제로 바꿔 탔다. 그 뒤를 이어 황룡사배(2011~2019), 2022년 반짝 열렸던 호반배를 거쳐 올해 천태산배까지 여자 3각 연승제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연승제에 쏠린 높은 인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팬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요인은 꽤 많다. 첫째는 이 방식이 기사 개인과 소속 집단의 성적을 동시에 점검하는 절묘한 구조를 갖췄다는 점이다. 국가 또는 집단 대표로 사생결단 싸우는 과정에서 칼같이 성적표가 나온다. 토너먼트 녹다운제 방식에 가끔 등장하는 ‘버리는 판’도 없다. ‘형제 대결’, ‘자매 대결’ 등 동국인끼리의 대결은 원천적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둘째 요인은 각박한 토너먼트 방식에선 맛볼 수 없는 여유와 부드러움이 가미됐다는 점이다. 기풍이나 상대전적 등을 감안한 팀 차원의 전략도 끼어들 수 있다. 개인적 감정 또는 징크스 등을 참고해 출전 순번 등을 신축적으로 조절한다. 특정 기사를 조준한 표적 저격도 자주 등장한다. 모두 일반 단체전이나 토너먼트에선 기대할 수 없는 연승제만의 묘미다.
전성기 시절 이세돌은 농심배 개막 때마다 조기 출전을 희망했다. 진로배 9연승의 영웅 서봉수처럼 단숨에 명예와 실리를 독차지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2010년 12회 때 소망하던 1번 주자를 맡은 그는 2승을 챙기고 바로 탈락했다. 막판에 나와 결정타를 날려야 할 임무를 등지고 한국 팀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는 18회(2015년) 때도 1번을 맡았다가 일본 선봉장 이치리키에 반집패, 첫 판서 사라졌다.

▲ 3각 단체전은 동료들 간의 협동정신도 필수 요소다. 27회 농심배서 6년 연속 우승한 한국팀 안성준, 이지현, 신진서, 박정환과 홍민표 코치(왼쪽부터). 강동윤은 시상식에 불참했다.
셋째. 발군의 스타가 극적으로 탄생할 여지가 많다. 제5회 진로배 때 9연승으로 대회를 마감한 서봉수가 좋은 예다. 신진서는 현재 농심배에서 21연승, 통산 21승 2패로 대회 최다승 및 최고 승률을 기록 중이다. 그런 신진서도 2017년 19회 때 농심배 데뷔 후 처음 두 대회는 승리 없이 출발했다. 신진서 이전엔 이창호가 14연승이란 빛나는 기록을 세우며 ‘농심배의 사나이’로 각광받았다.
넷째. 팀과 개인의 명예를 위해 온몸을 던지다 보니 끝까지 처절한 예측불허의 백중전이 이어진다. 농심배의 경우 한국 18회, 중국 8, 일본 1회 등 우승 횟수 편차가 꽤 나는데도 불구하고 총 27번 중 19번의 대회에서 최종국(14국)까지 가는 등 한-중간 대결은 치열했다. 하지만 일본은 2011년(13회)와 2017년(19회) 등 두 차례 무승(無勝)에 그쳤고 2005년(7회) 딱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 27회 농심배 최종국 신진서 대 이치리키전이 끝난 후 한일 양국 선수들이 합동으로 복기하는 모습. [사진=한국기원]
다섯째. 우승팀 승수(勝數)가 변화무쌍하다. 5승(4패), 55.6%의 승률로 우승이 가능한 반면 9승을 올리고도 5패로 준우승에 그칠 수 있다(승률 64.3%). 최소 승수 우승기록은 2003년 5회 때의 한국, 2015년 17회 때의 중국(이상 5승 4패)이 한 번씩 작성했다. 총 승수가 적은 팀이 더 많이 이긴 팀을 제치고 우승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3회, 14회, 25회 등 세 번 7승(5패)을 올리고도 6승(4패)에 머문 한국에 뒤져 2위로 밀려났다. 연승제 방식의 묘미이자 맹점이기도 하다.
3각 연승 단체전을 접할 때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바둑대회 방식이란 느낌을 받는다. 팬들로 하여금 항상 경악·감동·긴장할 것을 강요한다. 참가 팀 수, 팀 당 선수 수 등을 조정해 변형 진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막을 앞둔 농심배와 백산수배, 막바지 열전 중인 지지옥션배, 여자 국제전 천태산배가 연속 펼쳐들 ‘납량 3국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