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난센스 퀴즈 하나 풀고 시작하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무엇일까. 암? 코로나? 알츠하이머? 흑사병? 다 틀렸다. 정답은 숙환(宿患)과 노환(老患)이다. 숙환은 ‘오랫동안 앓은 병’, 노환은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을 뜻한다. 그런데 숙환이나 노환이 언급됐다 하면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다. 사고사(事故死)를 제외한 세상 모든 죽음의 원인이 이 둘 중 하나에 해당되는 셈이니 어떤 불치병도 치명도(致命度)에선 숙환, 노환보다 하수다.
바둑에선 ‘패착’이 숙환 또는 노환에 해당한다. 그 어떤 고수도 패착을 범하면 아무리 신통한 명의를 불러와도 그 바둑을 이길 수 없다. 숙환의 밑자락에 죽음이 기정사실로 깔려있듯 패착 또한 이미 패배가 전제돼 있으니 일종의 언어유희라고 할까.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시점에 사인(死因)의 경중이나 순위를 매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의미도 없다.

▲ 패착을 범한 대국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반상을 응시하고 있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한 판 바둑에는 대략 200~300개의 돌(병졸)이 동원된다. 패배는 패한 쪽 병졸 100~150명의 크고 작은 실책이 쌓인 결과물이지만 그 죄과를 분담시키지 않는다. 300여개 흑백 돌 중 단 한 수(手)에게만 패착이란 죄목을 씌우고 모든 책임을 묻는다. 엄밀히 말해서 ‘패착 1호’니, “131부터 147까지 몽땅 패착”이란 식의 표현들은 모두 잘 못 된 것이다. 축구, 야구 경기서 ‘결승골’이나 ‘결승타’가 단 하나뿐인 것과 같은 이치다.
실수의 크기, 즉 아군에 끼친 피해의 양(量)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패착의 핵심이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으로 50집을 손해 본 뒤 꾸준히 추격, 기어이 역전 기회를 잡았지만 이를 못 살리고 패했다고 하자. 이 경우 패착은 50집 손해수가 아니고 마지막에 승리 기회를 날린 수에게 돌아간다. 새표준국어대사전은 패착을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판에서 지게 된 아주 나쁜 수’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둑은 19X19, 총 361개 교차점 중에서 다음 수를 선택하는 좌표 방식으로 진행된다. 후절수, 패 등이 있어 자체로 3차원인데 여기에 수순과 착점 타이밍까지 평가의 대상이다. 4차원 시공간을 뚫고 끝까지 추적해 패배를 부른 원흉, 즉 패착을 가려내는 것이다. 매몰차고 냉철한 게임이다. 다른 어떤 종목도 바둑만큼 집요하게 패착을 따지지 않는다.

▲ 대국 종료 후에도 패착을 규명하기 위한 대국자들의 연구는 이어진다. 2001년 제5회 LG배 결승 1국 후 이창호(오른쪽)와 이세돌이 복기하는 모습. [한국기원]
바둑 특유의 마무리 작업인 복기(復棋)를 통해 참전했던 병사들이 심판대에 선다. 논공행상이라 볼 수도 있고 전범재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패착을 가려내는 것이 복기의 궁극 목표다. 이 과정에서 매 수마다 예리한 평점이 따라붙는다. 게임에 등장했던 양측 병력 전수(全數)를 낱낱이 평가하는 승부 또한 지구상에서 바둑이 유일할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착점 평가 분류법은 정수와 악수로 나누는 방식이지만 인공지능 등장 이후 정수(正手)의 범주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금기시되던 초반 삼삼 침입, 5선 어깨짚기 같은 수법들이 AI의 위세를 등에 업고 당당히 정수에 편입되고 있다. 무리를 수반하지 않고 정통(orthodox) 행마를 구사할 때만 정수로 인정받는다.
반면 규범을 이탈해 파격 행보를 펼치면 반드시 후유증이 따르며 무리수, 과수(過手), 의문수, 이적수 등의 딱지가 붙여진다. 바둑 법정에서 가장 흔히 등장하는 죄목으론 완착(緩着)이 꼽힌다. 이들을 모두를 한데 묶어 악수(惡手)라고 칭한다. 욕심과 과잉 투지로 천방지축 하다보면 어느 새 패배라는 종착역에 도착해있다. 한 판이 끝나기까지 패자가 범한 온갖 문제수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이들 중에서 한 수가 패착 선고를 받는다.

▲ 흑백 300수 안팎이 진행되지만 패착의 멍에는 딱 한 수에게 향한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바둑에서 노림수는 양날의 검이다. 정확한 수읽기가 뒷받침 된 노림수는 판세 장악의 발판이 되지만 속임수, 꼼수, 함정수, 변칙수 등 사(邪)자 계열로 분류된 노림수들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초래하기 일쑤다. 리스크가 무리를 유발해 결국 이적수, 자충수 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냉철한 자세로 반외무인(盤外無人)의 경지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바둑만큼 억울한 패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 넘쳐나는 종목도 없을 것이다. 세상 어떤 승부보다도 ‘핑계 많은 무덤’이 바둑 게임이다. 패자들은 입을 모아 “다 이긴 바둑을 단 한 수 삐끗하는 바람에 졌다”며 땅을 친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으로 한 순간 쪽박을 차게 만든 최악의 수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대표적인 것으로 망착(妄着)이 있다. 망(妄)은 ‘망령될 망’자다. 패자의 탄식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하다.
실제 전쟁에서도 패착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미드웨이 해전은 암호가 승패를 갈랐다. 미국은 일본이 다음 타격 목표로 미드웨이를 노린다는 것을 탐지해 전력을 배치했다. 반면 일본은 이를 까맣게 모른 채 자신들의 우세를 믿고 전투에 나서는 패착을 범했고 결국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계산에 넣지 않고 러시아 침공에 나섰던 것도 결정적 패착으로 꼽힌다.

▲ 나폴레옹군의 러시아 원정은 혹한을 간과한 패착으로 대패의 원인이 됐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361칸 바둑 전장에선 긍정보다 부정평가 용어(用語)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도 눈여겨 볼 점이다. 이 글에 등장한 것만 해도 패착을 비롯해 완착, 악수, 무리수, 이적수, 변칙수, 함정수, 자충수, 과수, 꼼수, 망착…등 부정적 용어가 10수 개에 달하는 반면 승리를 견인한 ‘수훈 선수’들은 잘 부각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바둑이 ‘감점(減點)’식 스포츠에 가깝기 때문이다. 감점식은 기본점수(만점)에서 실수나 규정 위반을 범할 때 점수를 깎는 방식으로 체조, 요트, 다이빙, 리듬체조 등이 이에 속한다. 반대로 ‘가점(加點)‘식은 득점 규정에 따라 0점부터 점수를 쌓아가는 대다수 종목을 포함한다. 요즘 대국에선 AI(인공지능)과의 ’일치율‘을 높이는 게 지상 목표다. ’내가 잘 두어서‘ 보다도 ’상대 실수 덕분에‘ 이기는 종목이다 보니 패착과 달리 승착(勝着)은 드러나지 않는다.
패착이 불분명한 바둑도 종종 등장한다. 현격한 실력 열세로 처음부터 끝까지 승률그래프 50% 이하에 쳐 박혔다가 패했을 경우 어떤 한 수를 콕 찝어 패배 책임을 돌리는 게 쉽지 않다. 반대로 신선(神仙) 둘이서 함께 무결점 바둑을 두어 완벽한 기보를 완성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승자와 패자는 갈라야 할 텐데 어떤 수에게 패착 꼬리표를 붙여야 할까. 승패 판정과 승·패착 선정은 결국 신(神)이 결정할 영역인지 모른다.
엘레지(elegy)는 슬픈 노래(悲歌)를 뜻한다. 바둑이 끝난 뒤엔 흑백 300여 명 중 패착의 불명예를 홀로 떠안은 병사 1명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반상을 뒤덮는다.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은 바둑 자체를 ‘슬픈 드라마’라고 했지만 한판 바둑의 승리를 위해 자기 돌들을 무수히 희생시키는 사석전법의 대가이기도 했다. 저승에서 사카다와 마주친 수백, 수천 억 개의 패착들은 이 불세출의 승부사에게 무슨 말부터 건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