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엔 이른바 바둑광이 많다. 그들을 보노라면 바둑을 두기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다. 하루 종일 기원에 머물다 밤늦게 귀가해 또 인터넷 대국 접속을 시도하는 남편이 야속해 아내가 집 전원(電源)을 껐다든가, 수술을 미루고 ”한판 만 더”를 외치던 의사가 환자 가족에게 혼이 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얘기들을 듣곤 한다. 온몸을 내던져 몰입하는 그들의 열정에 매번 감탄한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바둑을 사랑하지만 바둑광은 아니다. 패배에 대한 강박감이 커서 승부 자체를 즐기는 성격이 못되는 것이 큰 이유로 작용한다. 하지만 대국(對局)이 바둑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나는 바둑광들과 다른 방식으로 바둑을 소비한다. 무엇보다 바둑돌과 판, 그리고 돌을 담는 통부터 진심으로 사랑한다. 바둑 기구(棋具) 한 세트가 한 자리에 가지런히 자리잡은 채 격전을 기다리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정물화(靜物畵)를 나는 아직 본 기억이 없다.

▲ 격전을 기다리는 바둑판과 흑백 전사들. 곧 펼쳐질 혈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만 하다. (한국기원)
텅 빈 바둑판을 찬찬히 살필 때마다 그 소박함과 단순미에 빠져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흑백의 돌과 돌통, 연황색 나무판의 색조도 기막히게 어울린다. 황량한 판 위로 종횡 19개의 가느다란 줄 뿐, 일체의 장식 또는 꾸밈이 배제된 채 달랑 9개의 화점(花點)만 수줍은 듯 숨은 대평원. 잠시 후 말울음소리 하늘을 찢고 자욱한 흙먼지 속에 선혈이 전판에 튀는 격전장이 된다는 사실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소용돌이가 아직 펼쳐지기도 전 바둑판 세트가 함께 뿜어내는 강렬한 아우라가 첫 번째 유혹이다.
두 번째로 내 마음을 앗아간 것은 철저한 균형주의다. 바둑은 철두철미 평등 원칙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진 게임이다. 흑백 양대 진영에 투입되는 200개 전후의 병사들은 피아 불문 모두 완벽히 평등하다. 체스, 장기, 쇼기(일본식 장기), 상치(중국식 장기) 등의 기물이 다양한 기능으로 세분돼 있는 것과 차별된다. 한국 장기는 기물 크기부터 다르며 체스는 6가지 신분으로 구성된 16개의 기물이 활동한다. 상치 판위에선 강물이 흐르고, 쇼기 대국 때는 아군 포로가 적군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각자 부여된 행마(行馬)법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는 이들과 달리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착지하는 바둑돌들이 믿음직하다.

▲ 중국 요임금이 아들 단주의 우매함을 깨치기 위해 바둑을 창안해 가르치는 모습. (AI 생성 상상도)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경기 규칙도 나의 ‘바둑 애정지수(指數)’를 높여준 공신이다. 특히 승부 결정 방식이 썩 마음에 든다. 바둑의 핵심 개념은 영토 싸움과 둘러싸기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적군 우두머리를 제거하거나 꼼짝 못하게 가둬야 승리하는 다른 보드게임들과 달리 바둑 창안자는 전쟁의 요체를 지배지 다툼으로, 전투 핵심 키워드는 포위로 파악하고 있다. 적의 수괴를 제거하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 중 하나겠지만 나는 바둑의 경기 규칙이 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초등학교 시절 어깨너머로 바둑의 기초를 배운 뒤 얼마 안 돼 한 차례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중원에서 치열한 교전 도중 패(覇)가 발생한 것이다. 바둑 ‘입문 동기’인 세 살 위 사촌 형과 나는 번갈아 수 십 번도 넘게 되 따먹기를 반복했건만 해결책이 안 보였다. 우리는 돌을 쓸어 담으면서 엉성하고 싱거운 게임이라며 바둑을 성토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로부터 “패가 되면 다른 곳에 한 번 둔 뒤에만 따낼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난제가 풀렸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바둑에서 ‘패(覇)’는 얼마나 심각한 장애물이었겠는가. 바둑 게임의 존망이 걸린 최대 승부처였던 셈인데, 여기서 포기했더라면 바둑은 인류 최대 문화재는커녕 아예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차례 거른 뒤 패따냄을 허용한 처방은 게임 중단을 막는 데만 그치지 않고 오히려 바둑의 묘미를 수 십 배 더 높이 끌어올렸다. 이 기막힌 해결 방식이 내가 바둑을 신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난관 앞에서 우회로를 찾지 않고 정면 돌파에 나서 전화위복을 이룬 예는 오늘날 최고 인기 스포츠 중 하나인 야구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타자 주자가 치고 달리고, 상대 야수(野手)들은 공을 던져 주자를 잡는 게임이 야구다. 동네 어떤 공터에서 시작됐을 텐데 첫날부터 담장(펜스)이 갖춰졌을 리 없다. 며칠 해보니 장타가 마구 터져 외야수들을 계속 뒤로 물리고도 경기 시간이 한없이 길어졌으리라. 여러 날 고심 끝에 외야에 담벼락을 올렸을 것이다. 홈런 존의 등장이다. 바둑의 패와 야구의 홈런은 역발상으로 난제를 축복화한 닮은꼴 사례일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바둑의 진짜 알맹이는 게임 도구나 경기 규칙 같은 외피(外皮)가 아니다. 바둑판 위로 화수분처럼 분출되는 묘수와 환각성 진기(珍技)들이야 말로 바둑이 지닌 진짜 자산이다. 지구상 어떤 놀이도 흑백 돌들이 구현하는 황홀한 수(手)의 축제를 흉내 낼 수 없다. 가로 세로 줄 몇 개 그은 것이 무대 장치의 전부인데 어떻게 그 속에서 마술 피리 호리병 속 뱀 불러내듯 갖가지 형태의 신묘한 수들이 쏟아져 나올까. 나는 바둑 세계를 모르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 명단에서 내 이름을 빼 준 조물주에게 고개 숙여 감사한다.

▲ 2016년 열린 이세돌 대 알파고의 딥마인드 챌린지매치 4국. 이세돌(오른쪽)이 3연패 끝에 승리, 영패를 면했다. (한국기원)
바둑 게임의 탄생 배경은 여전히 베일에 덮여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통용되고 있는 기본 규칙(룰)이 바둑 게임화에 결정적 열쇠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바둑돌의 생리, 사활 규정, 영토 개념 등 특유의 속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누군가가 룰을 제정했다. 예컨대 옥집도 집으로 간주한다거나, 삶에 필요한 최소 안형(眼形)수를 2개 아닌 3개로 정했다거나 했다면 바둑은 태어나지 못했다. 바둑 원리에 부합하는(아마도 유일무이한) 경기 규칙이 누군가에 의해 세상에 나오면서 작동 기제(機制)가 완성된 것이다. 판의 규격이 달라도 게임은 가능하지만 규칙이 달랐더라면 바둑은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매번 나 혼자 주고받는 질문이 있다. 그토록 기막힌 바둑 규칙을 완성한 과정은 ‘발견’과 ‘발명’ 둘 중 어느 쪽에 해당할까. 발명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해 만들어 내는 것‘이고, 발견은 ’아직 안 알려진 사물이나 현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던 희귀 게임을 지구상에 처음 들고 나왔으니 발명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숨어있던 기존 기리(棋理)를 발굴했을 뿐 바둑게임 전체를 창작한 것은 아니므로 발견이 맞는다는 반론도 성립할 수 있다. 나는 아직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럴수록 이 신묘한 게임의 창안자가 누구인지 몸살 나게 궁금해진다. “아무도 모른다”가 현재까지 정답이다. 박물지와 설문(說文) 이란 중국 고서에 요(堯)와 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했다는 대목이 나오지만, 최고 지능게임의 대명사인 바둑이 하필 ‘어리석은’ 아들 교육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정부터 믿음이 가지 않는다. 2000년도 더 지난 옛날이어서 영원한 ‘미제(未濟) 신화’로 머물 공산이 높다.
바둑계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덤은 몇 집이 가장 합리적이며, 반상에 구현 가능한 판수는 총 몇 판일까, 역대 올타임 최강자는 누구일까. 두터움의 크기, 1수당(手當) 가치는 언제쯤 계량화가 이뤄질까…. 미지의 361로(路)를 홀로 산책하며 공상에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내겐 중요한 취미생활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바둑 사랑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생동감 넘치는 승부가 그리워지면 프로 고수들의 서식처인 인터넷 대해(大海)에 뛰어든다.
오늘 낮에도 나는 미로(迷路) 공상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가상무대는 한 중 일 3개국서 올타임 베스트 기사 5명씩 출전해 팀별 우열을 겨루는 농심배 방식 국가연승전이었다. 3국을 대표하는 역대 최고멤버 선정부터 쉽지 않았지만 유쾌했다. 어느 나라가 우승했느냐고?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