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을 맞이하면서 골프 팬들의 마음도 한껏 들뜬 채 녹색 필드로 향하고 있다. 국제 행사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4월 9일부터는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가 열린다. 1934년 창설된 마스터스 대회는 어느덧 100년 역사를 눈앞에 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 골프행사로 자리 잡았다. 올해도 변함없이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에서 전기 우승자 로리 맥길로이 등 거물들이 패권을 다툴 예정이다.
마스터스 토너먼트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그린재킷이다. 지구상에서 내로라하는 초일류 골퍼들은 그린재킷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며 필드에 선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녹색 상의는 그들 세계에서 첫손에 꼽는 ‘전리품‘이 됐다. 우승자는 전년도 챔피언이 입혀주는 녹색 상의를 착용하고 시상식에 나선다. 골프 황제의 이 취임식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마스터스 대회를 상징한다고 할 만큼 압권이다.

▲ 2004년 마스터스를 제패, ‘무관의 제왕’에서 탈출한 필 미켈슨에게 전기 우승자 마이크 위어가 그린재킷을 입혀주고 있다. [유로포토]
마스터스 우승자는 그린재킷 외에 트로피와 금메달도 함께 받는다. 은으로 제작된 우승 트로피는 마스터스 대회장인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의 클럽 하우스를 본뜬 모습인데 1961년부터 수여해오고 있다. 대회 준우승자는 은메달과 은쟁반을 받는다. 하지만 이 공식 시상품들은 비공식 기념품에 불과한 그린재킷에 비해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다. 마스터스 우승의 절대적 상징물이 트로피 아닌 재킷이기 때문이다.
그린재킷 전통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해밀턴 양복점에서 제조한다. 제작원가는 250달러(약 38만원) 정도로 결코 사치품이랄 수 없다. 하지만 마스터스 재킷이 대회 표지를 달고 시중에 나오면 최고 인기상품으로 둔갑한다. 2013년 초대 마스터스 대회(1934년) 우승자 호튼 스미스의 그린재킷이 미국 경매시장에 나왔을 때 낙찰 가격은 무려 68만 2천 달러였다.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9억 원이 훌쩍 넘는 거액이다.
우승자는 차기 대회 새 챔피언에게 그린재킷을 물려주어야 한다. 1년 동안만 소유권을 누리는 ‘한시적 주인’인 셈이다. 하지만 2년 연속 우승하면 재킷을 벗어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 영원히 소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린재킷 최다 획득 선수는 누구일까. 여러 번 우승하면 최고 몇 벌까지 확보할 수 있을까. 정답은 한 벌이다. 한 선수가 그린재킷을 복수(複數) 보유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제1회 신한은행 세계기선전 우승자 박정환. 검은색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시상식장에 입장함으로써 “한국 전통 미학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롭게 엮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국제 바둑행사에도 그린재킷을 연상케 하는 코스튬 세러모니(costume ceremony)가 상륙했다. 지난 2월 말 종료된 제1회 신한은행 세계기선전 시상식에서 우승자 박정환 9단이 특별 제작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시상식에 참석한 것이다. 두루마기는 한국의 전통 의상이어서 원년 대회를 제패한 우리나라 입장에선 최고의 순간으로 기록됐다. 시상식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며 환호했다.
두루마기로만 그치지 않았다. 시상식에 나선 박정환의 머리 위엔 역시 지극히 한국적 물품인 갓이 씌워졌다. 갓의 정면엔 순은으로 세공된 숭례문과 신한은행 로고가 선명했다. 이번 대회는 신한은행이 후원했고, 결승이 치러진 장소(신한은행 본점 15층)는 국보 1호 숭례문과 이웃해 있다. 출전 기사들은 이번 대회 모든 대국에서 주최측이 지급한 가디건을 입고 대국했다. 옷 색깔은 자신에게 배정된 흑백 돌 색깔에 맞췄다.
우승복(두루마기)과 갓, 대국 복장(가디건) 모두 한국의 전통 미학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롭게 엮은 작품들이었다. 이날의 주인공 박정환은 시상식에서 “두루마기는 내가 태어난 이후 처음 입어본다. 우승자가 두루마기를 입고 시상식에 참석하게 돼있다는 설명을 듣고 내가 꼭 그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선전 우승으로 그는 매년 치러지는 국제대회로는 최고 우승상금인 4억원도 차지했다.
두루마기와 그린재킷은 전혀 닮은꼴이 아니지만 전달돼 오는 메시지는 다르지 않다. 사력을 다해 마침내 정상까지 오른 선수의 투지를 치하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의상을 통해 극대화하려는 주최 측의 배려가 담겨 있다. 옷은 몸을 덮는 껍데기가 아니라 외부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해 주는 프로텍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성과에 대한 기쁨과 의미를 팬들과 공유하고 확산하는데도 효과가 크다. 두루마기와 그린재킷은 문화행사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 출전기사들이 흑색과 백색(정확하게는 회색) 2개의 대국용 가디건을 교대로 입고나와 대국한 것도 새로운 시도였다. 결승서 박정환(오른쪽)이 왕싱하오(왼쪽)를 2대1로 따돌리고 원년대회 우승에 성공했다.
이런 사례는 더 있다. 매년 여름 도로 사이클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가 열릴 때면 유럽 전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이 대회를 상징하는 의상이 옐로 저지(yellow jersey)다. 21개에 이르는 스테이지가 모두 끝난 뒤 기록을 합산, 최고기록 작성 선수에게 옐로 저지를 입게 한다. 관객들에게 현재까지 선두주자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어서 우승 축하복인 그린재킷과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선수들이 최종 목표로 삼는 대회 상징물이란 점에선 일치한다. 옐로 저지 밑으로 그린 저지, 화이트 저지도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축구 시상식 때 우승팀 아르헨티나 주장 리오넬 메시에게 벌어진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시상자인 하마드 알타니 카타르 국왕이 메시에게 특별한 옷을 선물한 것이다. 알타니 국왕 자신이 이날 착용하고 나온 복장과 똑같았다. 검정색 바탕에 금색 장식이 박힌 이 옷은 ‘비슈트’라 불리는 전통의상으로 아랍권에서 특별한 경우에만 착용하는 예복이다. 세계 최고 행사를 집전한 주최국 최고 인사가 세계 최고 선수에게 옷을 통해 최고의 경의를 표시한 의미 깊은 장면이었다.
그동안 바둑과 의상은 그리 깊은 인연을 맺어온 관계가 아니었다. 협소한 공간에서 움직임이 최소화 된 정적(靜的) 경기이다 보니 복장에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법 하다. 바둑은 흑백 돌 세트와 바둑판만 제공되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가능한 게임이다. 국제대회에 출전한 일부 외국기사들의 복장이 지나치게 남루해 한국이 대회 규정을 통해 이를 개선한 적도 있었다. 불과 10수년 전 있었던 이야기다.
2000년대 초 바둑이 스포츠에 편입되면서 전국체전 등에 출전하는 기사들의 복장도 일부 변화가 찾아왔다. 바둑리그 출범으로 단체전이 이뤄지면서 소속 팀 유니폼을 맞춰 입기 시작했다. 프로기사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사범’ 호칭 대신 ‘바둑 선수’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이후 미스춘향 바둑대회, 난설헌배 등 여성 대회가 대국자들에게 한복을 입혀 출전시켰으나 이렇다 할 메시지도 담지 못한 채 단발 행사에 그쳐왔다.

▲ 통일 복장은 단결과 일체감을 상징한다. 지난 2월말 제27회 농심배서 대회 6연속 우승에 성공한 안성준 이지현 신진서 박정환(왼쪽부터)과 홍민표 대표팀 감독. 강동윤은 일정관계로 빠졌다. [사진=한국기원]
기선전이 창설 원년에 들고 나온 ‘두루마기’와 ‘갓’, ‘가디건’이 바둑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변화의 첫발이 될 것으로 기대해도 될지 예상하긴 아직 조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이번 시도가 팬들과 매스컴으로부터 매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대회 준비기간이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스타트를 끊은 데는 ‘두루마기’ 아이디어가 절대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분석한다. 대회 주관사인 한국기원과 후원사 신한은행은 내년 이후 이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증은 대략 이런 내용으로 정리될 것 같다. 첫째, 두루마기 우승자 복장 세러모니를 지속할 것인가. 둘째, 지속한다면 1회 복장 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줄 것인가(흑백 대결인 바둑경기에 검정 단색 우승복은 재고해 볼 일이다). 셋째, 우승복 명칭도 필요해 보이는데 네이밍(naming) 계획은 있는지. 넷째, 외국 기사가 우승할 경우에도 두루마기를 착용시킬 것인가 등이다.
그린재킷이나 옐로 저지가 그래왔듯 대회 안팎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축적해가면 좋은 자산이 될 것이다. 인기 행사의 전통은 대개 만들어진 것이며 치밀하게 관리돼 왔다. 서둘러 팬 아이디어를 공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관심층을 미리 묶어두는 효과까지 따라오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불쑥 시커먼 두루마기를 앞세워 바둑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기선전이 내년엔 어떤 모습으로 단장하고 나타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