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다. 신년 달력을 바꿔단 게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 새로운 시작이 코앞에 와있다. 그 1년간 많은 사건이 있었고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했다. 바둑계 지존 신진서를 디딤돌 삼아 2025년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이지현과 당이페이, 모처럼 ‘미래세대 싸움’에서 정상에 태극기를 꽂은 김승진의 도정(道程)을 다시 한 번 소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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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을 거슬러 오르며 神界를 정복한 이지현

▲ 디펜딩 챔프 신진서(왼쪽)와 새로운 맥심배 우승자 이지현이 복기를 나누는 모습. 2025년 열린 국내 기전 중 최고의 화제를 몰고왔다.
지난 한 해 바둑계 최고의 ‘도깨비’를 꼽으라면 이지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현존 최고의 황금 주먹 신진서를, 그것도 결승서 두 번이나 눕히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4월에 막을 내린 제26기 맥심배가 그 무대였다. 신진서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우리나라 입신(9단의 별칭)들이 서른 세 살 청년 이지현 앞에 엎드렸다. 꿈에서나 펼쳐질 법한 대사건이었다.
복싱처럼 바둑도 체급제 또는 등급제로 치른다면 두 사람은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1인자에 최다관왕인 신진서에 맞선 이지현은 무관(無冠)이었다. 랭킹도 1위와 4위의 대결이기도 했다. 인도 카스트제에 대입한다면 신진서는 브라만, 이지현은 바이샤나 수드라까지는 아니어도 크샤트리아쯤 됐다. 도대체 신진서가 국내 결승서 패한 게 언젯 적 일인가. 선사시대(?)라 할 2022년 10월 제45기 명인전(상대 신민준) 이후 처음이었다.
이지현의 업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나이다. 26, 28세 때에 이어 서른셋에 세 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30대 챔피언은 이창호 이세돌 유창혁 박정환 등 전성기 때 밥 먹듯 정상에 올랐던 우승 전문가들에게 조차도 쉽지 않았던 과제다. 이지현의 우승을 한 편 드라마로 엮는다면 진짜 핵심 테마는 그의 나이 역행(逆行) 행진일 것이다.

▲ 신진서를 제물로 맥심배서 우승, 생애 세 번째 국내 타이틀을 거머쥔 이지현 9단.
순박한 인상과 달리 그는 외유내강 투사형이다. 2023년 10월 끝난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 그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당시 한국 대표팀에 끼어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끼었다’란 표현을 쓴 것은 결승전에 주전으로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권을 가린 한중전엔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신민준 김명훈 등 당시 한국 랭킹 1~5위가 나가 4대1로 이기고 우승했다. 25위에 불과했던 이지현은 당초 예정대로 벤치를 지켰다.
아시안게임 대표는 2022년 선발했지만 대회는 코로나 사태로 1년 늦춰 열렸다. 이지현은 그 1년 동안 마음고생이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 선수들 중 최고령자이자 최저 랭커였던 그는 “한국의 우승을 위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허드렛 역할을 자청했다. 그리고 실제로 묵묵히, 헌신적으로 후배들을 돌봄으로써 한국 우승의 1등 공신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아시안게임 종료 이후 이지현의 랭킹 변화다. 2023년 말~2024년 초 22~25위 부근을 맴돌다 2024년 10월 11위로 도약하더니 2025년 2월엔 7위로 올라섰다. 3월 중순까지 무려 18연승, 85%대 승률을 질주한 끝에 생애 최고 자리(4위)로 쳐 올라왔다. “국제대회서 성적을 더 올리고 싶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는 이지현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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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승부사 당이페이

▲ 란커배 우승을 다툰 당이페이(왼쪽)와 신진서. 당이페이가 8년만에 우승을 따낸 반면 신진서는 개인 통산 메이저 두 자릿수 우승 야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2025년 국제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기사를 꼽으라면 중국 당이페이일 것이다. 이번에도 희생양(?)은 신진서였다. 신진서는 워낙 비중이 높다보니 이기면 뉴스가 안 되고 패할 때만 화제의 중심에 선다. 이번엔 서른 살 중견 기사 당이페이가 ‘개를 문 사람’ 역할을 수행했다. 10월 속행된 제3회 란커배 결승서 초강자 신진서를 2대1로 꺾었다.
당이페이 스토리의 서사구조는 앞서 소개한 이지현의 그것과 흡사한 대목이 많다. 세월 역행 모드가 무엇보다 닮은꼴이다. 도대체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세계 메이저 결승무대만 다섯 번을 밟았다. 불과 17세이던 2012년 첫 세계도전(4회 비씨카드배)에 나서 준우승(백홍석에 1대3패)을 거둔 뒤 2017년 제21회 LG배를 통해 처음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 당시 그의 중국랭킹은 33위에 불과했다.
동년배 기사들 대부분이 하산 길에 나섰지만 그는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도전을 계속했다. 2024년 제5회 몽백합배와 29회 삼성화재배에서 두 차례 준우승을 추가하더니 올해 거함 신진서호를 침몰시키고 기어이 란커배를 품에 안았다. 30세 3개월만이었다. 30대 기사의 세계 메이저대회 정복은 2015년 구리(10회 춘란배, 32세 4개월) 이후 10년 만이다.
당이페이의 캐릭터는 독특하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길 원한다. 꼭 해야 할 인터뷰 때는 서둘러 끝낸다. 그렇게 알뜰하게 마련한 시간을 인공지능과 씨름하는데 이용한다. 이번 결승을 포함해 그가 미세한 바둑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같은 노력의 결과였다. 중국 대표팀을 관리하는 위빈 총감독은 당이페이에 대해 “승부사라기 보다는 수도자(修道者)를 보는 듯 착각하곤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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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길에 들어선 김승진

▲ 제7회 녜웨이핑배 한중일 바둑마스터스 결승전 모습. 19세 김승진(오른쪽)이 후야오위를 눕히고 국제대회 첫 우승 염원을 달성했다.
바둑 팬이라면 김승진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해 둘 일이다. 나이는 19세. 2025년 10월 중국 청두시에서 열린 제7회 녜웨이핑배 한중일 바둑마스터스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우뚝 섰다. 중국 푸젠헝을 반집으로 꺾고 첫 관문을 통과한 뒤 일본의 희망 후쿠오카 고타로, 한국 유망주 박지현을 백 불계로 연파해 주니어조 1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는 주니어(만20세 이하)와 시니어(40세 이상)로 나뉘어 각각 토너먼트를 치른 뒤 우승자끼리 최종 패권을 다투는 방식이다. 주니어조 1위 김승진은 결승서 시니어조 1위 후야오위(41) 8단을 흑 1집 반 차이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대회 방식이 좀 어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승자가 한국의 10대 소년이란 사실은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신진서의 대를 이을 차세대 경쟁에서 유력한 후보로 낙점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후야오위는 지난해 이 대회서 왕싱하오를 꺾고 우승한 강자다. 2007년 제11회 LG배를 놓고 대만 저우쥔쉰과 겨룬 끝에 준우승한 이력이 있다. 4회 농심배 때 5연승을 기록하는 등 2000년대 초반 중국 간판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시니어부엔 이밖에 구리 저우허양 뤄시허 박영훈 요다 등이 출전했다. 주니어부 결승 상대 박지현(20)은 2023년 하찬석국수배 및 김인국수배서 우승한 뒤 명인전서 거목 신진서를 격파,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슈퍼루키다.

▲ 김승진(왼쪽)과 박지현의 주니어부 결승전 모습. 김승진이 상대전적 3패만에 첫 승리를 기록하면서 최종 결승행 티킷도 획득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2006년 제주서 태어난 김승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입문, 장수영도장서 수학하다 2021년 영재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2024년 이붕배 신예최고위전서 첫 우승을 맛본 뒤 2025년 조아제약 주최 루키영웅전서도 우승했다. 총 3회째 만에 처음 세계무대 정상 첫 등정에 성공한 셈이다. 2025년 바둑리거(수려한합천)로도 선발되는 등 착실히 순항 중이다.
파릇파릇한 신예들의 국제대회 제패 소식은 언제 들어도 반갑다. 문민종이 17세 되던 2020년 제7회 글로비스배서 셰커, 랴오위안허, 리웨이칭 등 중국 유망주 트리오를 스윕 하며 우승했던 낭보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2005년생 한우진도 2023년 10회 글로비스배를 발판으로 비상 중이다. 그 대회 준우승자 왕싱하오는 올해 신설 국제기전인 북해신역배 우승으로 세계 정복 첫발을 디뎠다. 한국의 새로운 꿈나무 김승진은 언제쯤 그런 드라마를 연출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