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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록으로 본 대가들의 바둑관
 
작가는 글로,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프로기사들은 착점하는 수(手)에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오롯이 담아낸다. 대국 행위를 수담(手談)이라 일컫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바둑이 품은 천기(天機)를 말을 통해 종종 분출하기도 한다. 촌철살인. 반상 급소를 찌르듯 예리한 경구(警句)와 잠언으로 나열된 이른바 어록(語錄)이다. 바둑 대가들의 가치관은 서로 다른 듯 닮았고, 같은 듯 다르다. 한 판 바둑을 완성하는 문법은 상통하되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초 고수들의 어록을 정리해 보았다.

▲ 1981년 10월 내한, 서봉수와 대국한 사카다 9단(오른쪽).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조남철 9단.

“바둑은 슬픈 드라마” 사카다 에이오

승부사들에게 승패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이다. 일본이 세계 바둑의 중심이던 20세기 중반 사카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였다. 두 차례 7관 달성 포함 64회 우승, 29연승 포함 연간 최고 승률(1964년 30승 2패, 93.75%) 등 초인적 독주를 계속했다. 하지만 나이 장벽마저 넘어설 수는 없었다. 린하이펑을 선봉으로 하는 신예들에게 타이틀을 하나둘씩 내주면서 사카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뇌까렸다. “바둑은 슬픈 드라마다.”
이 한 마디에 승부가 갖는 서릿발 같은 엄혹함, 패자가 떠안아야 하는 절망과 비감함이 고루 녹아있다. 하지만 그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도 바둑을 그렇게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즐거운 드라마를 평생 누리다 보니 말년에 이따금 겪는 브레이크가 더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비정한 반상세계를 이처럼 절절하게 압축한 한 마디도 없다.

“목숨을 걸고 둔다” 조치훈

사카다의 독백보다 더 섬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을 향한 ‘격문(檄文)’이자 생활 수칙이다. 어린 시절 객지에 던져져 늦은 성장에 대한 초조감으로 자살까지 생각했고, 31세 때는 교통사고로 전치 25주 중상을 입고도 기성전 도전기에 임한 근성이다. 그 정신력이 일본 최초의 그랜드슬램(7대 타이틀 석권) 달성, 대삼관 2회 등으로 나타났다.
조치훈 어록에서 빼놓기 아까운 항목이 또 하나 있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다. ‘슬픈 드라마“나 ”목숨을 걸고…“와 비교하면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다. 바둑 한 판 결과에 세상은 미동도 않지만 내게 바둑은 세상의 모든 것이란 의미일까. 주어를 바둑 아닌 다른 영역으로 바꿔 넣어도 체념과 자기 설득 사이를 넘나드는 묘한 순환이 반복된다. 달관과 방황은 어차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지 모른다.

▲ 조치훈 9단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 조훈현

조훈현은 영광과 좌절의 순간 모두 생각의 힘이 자신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생각은 인내와 몰입만을 뜻하지 않는다. 패배의 두려움 앞에서 냉정해지기 위한 전환모색 과정까지 모두 포괄한다. 요컨대 인생사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재주나 능력 아닌 견인불발의 정신력이란 것이다. 세계 최다 타이틀기록 수립도 ‘생각’의 힘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계속해서 조훈현이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힘을 내 한 걸음 내디디면 어제보다는 확실히 더 나아갈 수 있다.” 한 마디로 ‘Do your best’ 정신이다. 20세기 후반 동시대 세계 최고수 자리를 놓고 경쟁관계였던 조치훈의 ‘목숨을 걸고 둔다’와 같은 맥락이다.

“연통을 연기만 나면 된다”는 식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조남철

“연통 하나를 만들더라도 연기만 나면 그만이란 식은 곤란하다. 외관의 미와 실용의 가치를 아울러 갖추도록 해야 한다. 바둑도 어림수로 적당히 둔다면 한낱 손끝 장난일 뿐, 깊고 아득한 삼매경이나 수양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 한국 바둑에서 ‘건국 대통령’ 격에 해당하는 고 조남철 9단의 어록이다. 조9단의 제자인 고 김수영 7단의 저서 ‘나의 스승 조남철’에 실린 금쪽같은 말씀이다.

“바둑은 나무 판 위에 흑백의 돌을 얹는 게임이다.” 서봉수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 하는 동화 속 소년의 외침을 듣는 것 같은 충격과 깨달음이 몰려온다. 바둑에 대한 고상하고 심오한 정의(定義)를 기대하고 내민 질문에 서봉수는 이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40여년 전 옛날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인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하 명답이다. 세상에 가득 찬 허례허식, 미사여구, 감언이설을 한 칼로 내려친다.
서봉수의 이런 성격은 바둑판 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호기심 많고 직설적이며 실용적인 자세를 똑같이 유지한다. 헛된 꿈을 좇지 않고 한푼 두푼 착실히 집을 챙긴다. 프로 데뷔 후 수 천판을 소화했지만 그가 대세력 작전을 편 기보를 만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70살이 훌쩍 넘은 그는 오늘도 손자뻘 후배들 틈에서 나무 판위에 흑백 돌을 옮겨놓으며 기리(棋理)를 탐구한다.

▲ 애제자 루이나이웨이와 연구 중인 생전의 기성 우칭위안 9단(오른쪽).

“바둑은 조화다“ 우칭위안

바둑은 대국자 둘이 함께 빚어내는 예술이다. 하지만 둘은 동료 아닌 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협업이 아닌 상호 파괴로 일관한다. 반목, 침탈, 살육의 처절한 대립 과정을 거쳐 명국이 탄생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칭위안(吳淸源)은 조화(調和)라고 규정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문화유산과, 그 세계가 배출한 최고 지성이 결합해 섬광(閃光)처럼 반짝이는 명구(名句)가 탄생했다.

‘조화’는 낱말 자체부터 중의적이고 심오하다. harmony가 우선 떠오르지만 contrast도 어울릴 것 같다. 흑백 대립요소의 반발을 부각해 균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전체적 짜임에 맞는 어울림 또는 통일성을 의미하는 느낌도 드는데 그 경우라면 ensemble에 가까울 수도 있다. 아무튼 ‘조화’는 바둑의 본질과 특성을 날카롭게 꿰뚫은 최고 수작으로 공인받고 있다. 우칭위안의 혜안과 통찰력이 신포석을 거쳐 현대바둑의 골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밖에 지면 관계로 다루지 못한 몇몇 기사들의 어록을 추가한다.

이창호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하게 날이 서있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 역할에 길들여져선 안 된다. 패하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이미 프로기사가 아니다.

이세돌
인생과 바둑은 선택의 연속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반면 바둑은 다음 상황 예측이 웬만큼 가능하다는 게 차이점이다.

신진서
프로기사들에게는 삶이 곧 바둑이다. 직장생활 하듯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중 일부분을 투자해 대국하는 정도로는 프로기사로 생존할 수 없다. 기사는 내내 바둑만 생각하며 살다가 짬짬이 다른 일상에 눈을 돌린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녜웨이핑
초일류 기사가 되기 위해 첫 번째 필요한 것은 재능이고 두 번째는 노력이다. 세 번째 결정 요인은 강한 자신감과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정신이다. 바둑에 졌다고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무섭다.

후지사와 슈코
바둑의 길을 천직이라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 후회되는 일도 있지만 바둑에 관한 한 뉘우침은 벌로 없다. 내 생활이 나의 바둑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서 바둑을 뺀다면 남는 것은 보통의 몸집과 보통 이하의 두뇌뿐일 것이다. (1980년 55세 때 펴낸 자서전 서문 발췌)

▲ 조훈현(왼쪽)과 자리를 함께 한 ‘괴물기사’ 후지사와 슈코. (사진 제공=한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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