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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 6집’ 기전이 생긴다면
 
국제 바둑대회 때 TV 중계화면엔 흑백의 기대 승률이 뜬다. 아직 첫 수가 놓이기 전 백지 상태부터 보여주는데 인공지능에 따라 약간씩의 편차가 있다. 중국이 주최하는 대회는 흑 승률이 40% 미만에서 출발할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37%대까지 내려간다. 흑이 7집 반이나 되는 덤을 감당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게 AI(인공지능)의 판단이다. 한국과 일본이 주관하는 흑 6집 반 공제 대회 역시 흑 승률 40% 후반대로 시작한다. 한마디로 말해 현행 국제 룰(?)로 통용되고 있는 흑의 공제 숫자는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는 셈이다.

▲지난 달 끝난 센코배 결승. 최종 3국서 일본 우에노 리사(왼쪽)가 최정을 백 반집 차로 꺾고 우승했다.

다음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의 강자 카타고가 제시한 덤 크기 별 흑의 승률이다,
덤 5.5집 58.4%
덤 6.0집 53.0%
덤 6.5집 47.6%
덤 7.0집 42.2%
덤 7.5집 37.3%
(2025년 2월 기준 인터넷 참조)

이 자료만 보면 적절한 덤의 크기는 6.0집에서 6.5집 사이다.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들 중 최강의 위치를 고수해 온 중국 골락시(Golaxy)도 덤 7.5집으로 시작하는 시점에 흑이 1.7집 불리하다고 계산한다. 역시 6집을 가장 공평한 덤으로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중견 프로기사 이현욱 9단이 운영하는 유튜브도 흑의 승률을 40%(7집 반), 48%(6집 반), 56%(5집 반)로 흑 승률을 계산해 방송한 바 있다. 역시 가장 적절한 공제 크기는 6집 언저리임이 드러난다.

덤의 크기는 최대한 흑백 공히 50% 안팎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똑같은 스타트 라인서 출발해야 공정한 레이스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임은 ▲쌍방이 지닌 전력(戰力)의 총화가 스코어에 최대한 반영되고 ▲양측이 동등한 조건에서 경기를 시작하며 ▲동점으로 끝날 경우 객관적, 합리적 승부 결정 장치로 무승부를 피하는 방향으로 설계하려고 노력한다. 요즘 같이 AI가 바둑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관전객들과 함께 샅샅이 분석하는 시대엔 경기 규칙의 엄정함이 더욱 강조된다.

▲ 1998년 열린 이창호(오른쪽)와 마샤오춘 간의 제3회 LG배 결승. 6집 반 덤을 적용한 최초의 국제대회로 기록된다

그런데 바둑에서 덤의 크기는 영구불변의 진리(眞理)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둑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흑이 부담해야 할 선착(先着)의 대가도 변화를 거듭해 왔다. 밑의 표는 1960년대~2020년대를 10년 단위로 분할, 해당 기간 동안 흑 승률이 50%에 가장 가까운 덤 크기를 비교 정리한 것이다.(자료=한국기원)



1970년대엔 한국 중국 일본 등 빅3가 모두 5집 반 방식으로 운영했으나 중국이 7집 반으로 변화를 꾀했다(잉씨배는 8집 덤에 무승부면 흑승이어서 같은 의미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덤 5집 반은 흑이 훨씬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 톱스타였던 이창호가 “5집 반이면 무조건 흑을 택할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에 LG배는 1998년 제3회 대회부터 국제 메이저대회 사상 최초로 흑의 공제를 6집 반으로 1집 상향 조정했다. 그리고 이는 세계적으로 6집 반 덤이 대세를 이루는 전환점이 됐다.

고수들의 덤에 대한 ‘체감온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진화 중이다. 6집 반 덤도 흑이 불리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강자들 열에 아홉 명은 흑백 선택권을 확보한 경우 백을 선택하는 게 요즘 추세다. 신진서 같은 불패의 영웅조차 백을 쥘 경우 더 편한 마음으로 임한다. 최근 끝난 맥심배 결승서도 세 판 모두 백이 이겼다. 중국 톱스타 커제는 7집 반은 물론 6집 반 대국서도 대부분 백을 선택하는데 전성기 시절 백번 승률이 80%를 상회했다.

▲ 잉씨배는 국제무대에서 가장 먼저 7집 반을 채용한 기전이다. 지난해 9월 열린 제10회 대회 이치리키(왼쪽)와 셰커의 제10회 대회 결승 장면. (사진 제공=한국기원)

과거와 달리 속기(速棋) 비중이 높아진 점, 인공지능의 보편화로 선착 효용성이 상당 부분 파헤쳐진 것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그렇다면 흑의 덤을 0.5집 더 낮춰 6집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이따금 회자되는 주제지만 공론화 되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로 무승부 방지 효과를 꼽는다. 반집이란 가공의 장치를 통해 최소한의 간격으로 승패를 가를 수 있게 만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바둑계가 너무 ‘무승부 방지’ 강박감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반집을 떼 내고 덤 6집을 적용해도 무승부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흑백 중 시간을 더 많이 남긴 쪽을 승자로 인정하는 것도 일책이다. 잉씨배 경우 시간을 소진하면 집과 교환하는 규칙이 존재할 정도로 사용 시간은 바둑 승부의 근간이다. 또 하나는 반상 착수점이 361개 홀수로 돼 있는 상황에서 흑의 덤은 3.5집, 5.5집, 7.5집… 등 홀수 덤만 적용 가능한 중국 경기규칙도 6집 덤 도입을 가로막고 있다.

국내용으로 덤 6집짜리 기전을 실험적으로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상되는 효과는 여러 가지다. 우선 지금보다는 ‘동시 스타트’가 좀 더 가능해져 예측 불허의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 있다. 새 그라운드는 바둑 수법의 변화를 촉발, 새 패러다임 형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1940년대 일본 본인방전에서 4집으로 시작된 공제(덤)의 크기는 4집 반을 거쳐 5집 반 시대를 보냈다. 현재는 6집 반과 7집 반 방식이 공존하지만 아직도 정답이 아니라며 모두 고개를 젓는 세상이다.

덤 크기를 6집으로 하는 기전을 우리끼리 만이라도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어차피 국제 통일 규칙도 없는 마당이다. 덤 6집제로도 토너먼트, 리그, 연승전, 단체전 등 어떤 형식의 대회건 적용이 가능하다. 바둑 게임에서 그토록 무서워해 온 동률(무승부)은 벽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통하는 문(門)일 수도 있다. 상식을 깨면 새 세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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