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상 일기(4월 16일)
바둑史 漫步 - 삽화인가 현실인가 - 질투는 누구의 품성인가
새벽 4시 33분.
휴일의 오후 한 때를 어떻게 보냈는가?
내 이런 질문 하나 스스로 묻는 까닭은 흔히들 그리 질문하기 때문이다.
선인 先人들도 그러했고, 고인 古人들도 그러했다.
바둑은 어제 한 때 무엇으로 보냈는가?
흥미와 경쟁, 자만 … 그런 것으로 보냈는가?
다른 감정은 없었는가?
글을 쓰다보니,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시야에서 사라진다. 유쾌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또 그런, 일상에서 벗어난 그래서 탈속한 얘기도 쓰고 싶은데 어디 그런 얘기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글 쓰기 전에는 많을 줄로 알았는데.
아마도 즐거움은 우리가 평상시에 찾아 나서고 또 찾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런 듯도 하다. 주변에 흐르는 즐거운 한 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알고 있는 것이기에 굳이 더해서 무엇하랴. 그런 듯도 하다.
ꡔ겸산당기보ꡕ라는 중국의 고전이 한 권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고전인가. 명말청초의 국수들의 기보를 모아놓은 것이라서 그러하다. 청나라 초기 국수들의 기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모두 62국.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가? 겸산 兼山에서 왔다. 산이 두 개 겹쳐 있는 것이 겸산이다.
山은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고, 세속에서 물러서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멈추는 것도 이른다. 그것도 두 개가 되니, 만만찮은 의미가 주어진다.
호 號를 겸산으로 쓰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겸산이라는 호만 가지고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겸산이라는 호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시속 時俗에서 힘들었던 현인들이 많았다는 걸까. 아니면 그런 성정 性情을 높이 여긴 문화 때문일까.
ꡔ兼山堂棋譜ꡕ는 청나라 초기의 국수 서성우 徐星友가 나이가 들자 남쪽으로 낙향해서 10여 년간 자료를 모으고 또 그 기보에 자신의 평을 더해서 얻은 책이다. 그러니까 서성우의 호도 겸산 또는 겸산당이 되겠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뚜렷하지 않으니, 내 가진 책에는 원서 原序를 서성우가 쓰지 않고 있으니 그러하다. 다만, 바둑의 이치와 바둑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논하면서 그에 아쉬움과 큰 의미를 갖추고 앞날의 지혜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점을 내다보고 가히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겸산을 책의 이름으로 삼는다, 그리 쓰고 있으니 더 이상은 모르겠다. 찾아보지 않아도 될 것으로 안다.
책은 말한 바와 같이 청나라 초기 국수들의 기보에 대해 서성우의 평을 곁들인 것인데, 그 평이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관전기, 또는 명국세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백104는 경솔했다. 12는 작다. 의당 137에 두어야 했다. … 그런 정도의 총평만 주어져 있다. 당시에는 그 정도가 최선의 설명 방식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서성우에 대한 뒷날의 평은 상반된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그러하다. 전설적인 얘기들이 난무한다, 그리 말해도 되겠다.
예를 들면, 서성우가 처음에 황룡사 黃龍士에게 4점으로 배웠는데, 황용사와 4점국을 몇 판 둔 후에 석점으로 다시 10국을 두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10국을 마치자 서성우는 홀연 국수의 반열에 들어설 수준이 되었다. “고래로 3점에서 시작하여 곧 국수가 된 경우는 이 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 전해진다. ꡔ淸代軼聞ꡕ에 씌어있다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허풍이 좀 심하다 싶다. 하긴 1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서 3점국을 10국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싸움 바둑이 반상의 주류를 이루었으니 5년이면 될까?
당시는 오늘날 우리 프로 정상에 비해서 2점 정도는 약했으니 그리 가능할까. 아니, 이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 그리 말할 수 없다. 맥점의 활용이나 수읽기의 수준에서는 오늘의 프로 정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력 知力을 쓰는 한도가 있다면, 오늘의 프로 정상과 당시의 국수들에게서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다.
(혈루편-1)
먼저 그 유명한 대국이나 한 편 감상할까.
이름하여 혈루편 血淚篇. 피눈물을 흘릴 정도다.
그러나 혈류편이라 하니, 1국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3점 바둑 10국을 이른다.
백 황룡사
흑(3점) 서성우
대국시기 不明
솔직히 짜증나서 못 보겠다.
웬 무리수가 이토록이나 많은지?
접바둑이라서 그런가?
하여튼 중국인들의 허풍에는 좀 조심해야 한다.
아닐지도 모르지.
지금의 바둑과는 그 반상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이 현저하게 틀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짜증은 난다!
가벼운 얘기나 하나 해야겠다.
자신의 실력이 황룡사에게 못 미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서성우.
어느 날 황룡사를 초대한 자리에서 말했다.
이 후배의 실력이 아직 국수님께 미치지 못하니, 한 번 정도 양보를 해주시면 체면이 좀 서겠습니다. 一子(5집 정도) 정도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황상께서 부르실 때 그리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룡사는 통쾌한 사람이었다. 그리 하지!
다음 날 황제가 불렀다. 언제나 그리 했던 것처럼 작은 합을 갖고 나오라 주변에게 이르고 그 합을 상품으로 걸고서. 그 동안은 의례 합 속에 작은 패물이 들어있었다. 황룡사도 그리 알았다.
승부는 약속대로 황룡사가 一子를 양보했다. 결과는 패배.
황제,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실력은 서성우를 넘치지만 아쉽게도 운은 그만 못하구나!”
합을 열어보니, 웬 걸, 그 날의 합 속에는 패물 대신 관직을 제수한다는 글이 있었다.
황룡사 후회막급.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서성우는 미리 전해 듣고 있었다. 오늘의 바둑에는 상품이 무엇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자, 문제는 다음. 별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과연 이 얘기가 사실이냐?
서성우는 그런 인격자였나?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인간의 시기심, 그런 것을 서성우가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었는가?
서성우는 부유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굳이?
ꡔ겸산당기보ꡕ에 보면 서성우와 황룡사가 둔 바둑은 단 한 편. 서성우가 이긴 대국이다.
그러나 서성우는 자신의 바둑은 전체 62국 중에서 10국을 수록했고, 황룡사의 바둑은 13국을 수록했다. 물론 한 판의 바둑을 위해서는 두 대국자가 필요하니, 전체적으로 볼 때 서성우는 10/124, 황룡사는 13/124를 차지한다.
이 자료로 본다면 서성우는 황용사를 시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떠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얘기들은 하나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하나로 몰리면 곧 둘로 나뉘어진다는 얘기다.
그러하다면, 서성우의 얘기일 뿐인가? 우리들의 얘기는 아닌가?
동녘이 밝았다.
아침 6시 2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