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상 일기(4월 5일)
바둑史 漫步 - 넋두리는 패자의 몫인가 - 알 수 없다
아침 8시 48분.
“바둑판을 방 한구석에 치워놓고 붉은 담요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화투짝을 뽑는 본인방 죠와. 바둑판과 나란히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딱딱한 얼굴로 손자병법을 읽는 인세끼.
두 사람의 인상은 그럴지도 모른다. 한쪽은 퇴폐한 세상에 몸을 담그면서도, 내가 천하의 제일인자라는 부동의 신념을 가지는 사나이. 한쪽은 높은 곳에, 우뚝 서서 거센 세속의 흐름을 내려다보며, 하늘이 나를 버리는가 하고 탄식하는 사나이.“
어느 기사가 그린 인간상을 하시모토(橋本宇太郞) 선생이 재생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현현각에서 펴낸 일본명국선 인세끼(幻庵因碩) 편(pp. 3-4)에서 다시 뽑고.
하시모토는 다시 말했다.
“비록 그러나 생활태도나 처세방법은 기사로서의 품격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리라. 도박을 즐겼더라도 기사 죠와의 값어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손자병법에 통달했어도 이로 인하여 기사로서의 인세끼의 평가에 변동이 있을 리는 없다.”
과연 맞는 말씀이다.
바둑은 승부를 다투는 게임.
그 게임이 예(藝)에 머물던, 도(道)로 승화되던.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자 없는 패자 없고 패자 없는 승자 없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는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그 어느 세상에서나 승자와 패자는 나눠지는가?
인세끼(1798-1859)가 제자를 데리고 나가사끼에 머물 때였다. 때는 1852년.
이미 명인을 놓치고 중국으로 떠날 궁리를 할 때가 되겠다. 중국에 가서 한 번 웅지를 펼쳐보겠노라는 뜻을 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것도 실패로 끝났지만. 뱃삯까지 치렀다는 말도 남아 있는데, 사실이야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때.
가쯔다 에이슈케(勝田榮輔)라는 기사가 있었다. 坊門, 그러니까 본인방 죠와의 제자였는데 1862년에 4단이었고 메이지 시대에 와서 5단이 되었다 하니, 1852년 인세끼와 만났을 때는 아직 초단이나 2단 정도에 머물고 있었겠다. 대국보가 약 50여 국 남아 있다고 한다.
1852년 나가사끼에 머물던 인세끼에게 부탁을 해서 몇 국을 배웠던 모양이다. 물론 사례비를 냈을 것이고, 아니면 내기바둑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내기를 두었다는 얘기를 그린 이야기도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그것이 좀더 사실에 가까울 듯도 하다. 그래서 많은 돈을 잃었다는 그런 얘기.
잠깐 바둑을 보자.
(패국의 묘수)
1852년 11월 17, 19, 23일.
白 幻庵因碩
黑(先) 勝田榮輔
백 1집 승.
기록에는 200수까지 남아있는데 묘수가 나오는 부분만 발췌했다. 흑1 흑3이 인세끼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묘수. 이로써 흑이 우세를 확립했다.
흑3이 두어졌을 때, 인세끼가 말했다. 내일 두자고. 그 내일이 19일인지, 또는 23일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23이었을 듯하다. 승부가 치밀어오를 때는 다음 날 두자고 말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마도 내기바둑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17일부터 23일까지 무려 7일간을 이 바둑 하나에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 묘수를 맞은 그날 밤, 인세끼를 찾아온 손님에게 이리 말했다 한다.
“내 묘수를 당해 질 바둑이나, 상대의 실력을 요량해본 즉, 내가 한 집은 이길 것이라…”
그러나 내 지금 형세를 살펴보니, 내가 한 집 이길 것이라는 그런 말은 후세의 말붙임이 틀림 없다. 이런 국면에서 어떻게 한 집을 논할 수 있는가. 아니지. 시간이 넘친다면, 그런 표현 가능할 수도 있으리. 문군. 그리 단정하지 말게.
사실, 냉정하게 살펴보면, 백에게 불리한 국면이 아니다. 그 이전에 흑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래, 좌우간 이 바둑은 인세끼가 이기고, 가쯔다는 돈을 다 털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는데…, 자부(自負) 여부는 모르겠다.
“내 그래도 묘수는 남겼다!”
실로 묘수는 묘수였다. 쉽지 않은 묘수였다. 얼마나 전심전력으로 바둑을 두었는지도 짐작이 간다. 1주일에 한 판 아닌가! 물론 부분적인 맥에 있어서 19세기 중엽 일본 바둑계는 오늘날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자, 그러나 저 바둑에서의 실패와 인세끼의 실패는 같은 무게인가.
인세끼는 험한 인생을 살았다.
일부만 약력 형식으로 요약해보자.
1835년 숙적 죠와와의 吐血局에서 제자 아카보시 인테쓰 赤星因徹을 잃다.
1845년 숙적 죠와의 장남 戶谷梅太郞을 井上家의 후계자로 받아들이다.
1842년 3년 전(1839)에 은퇴한 죠와를 뒤이어 명인이 되려고 했으나
그의 제자인 슈와 秀和에게 패해 단념할 수밖에 없다.
1850년 후계자로 삼은 죠와의 장남이 정신이상으로 살인사건을 일으키다.
험하다.
일찍이 재주를 촉망받아 인생이 누구보다도 화려하리라고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삶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大國手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바둑은 運의 技藝로구나.”
그가 자주 표현한 말이라 한다.
죠와와의 대국에서 패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두고서는
“당시 나의 기력은 기껏해야 4단 정도…”
그 후에도
“옛날 도사쿠와 근래 죠와의 바둑은 모두 상대의 실수로 10국 중 7국을 이겼는데, 세인 世人들은 그를 모른다.”
“승부만으로 강약을 논함은 지극히 어리석다.”
과연 패자의 하소연일까. 넋두리일까.
그 점을 의문 들게 하는 대국이 하나 있다.
(의문의 대국)
1842년 5월 16, 17, 18일.
白 井上因碩
黑(先相先 先) 본인방 秀和
흑 6집 승.
하시모토 선생의 평이 재밌다. 옮겨보겠다.
“우하귀 백1 이하의 손해는 5집 반의 손해. 승부의 결과와 거의 같다.
인세끼의 착각이라는 설도 있다. 흑12 이하 흑18의 묘수를 착각했다는 것이지만, 찬동하기 어려운 견해다. 인세끼 정도의 인물이.
인세끼의 속임수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인세끼가 슈와의 실력을 모를 리가 없다. 그 깊은 수읽기도 알고 있다. 인세끼가 속임수를 던질 수 있을까.
인세끼는 긍지가 높은 사나이다. 중년 이후엔 특히나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 가졌다. 자신의 바둑에 대해서는 항상 후세의 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기사가 된 이상 우수한 작품을 후세에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인세끼가 하필이면 많고 많은 상대 중에서 슈와에게 그런 속임수를 썼을까. 이 훌륭한 작품에 그런 오점을 남기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인세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의 언동에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판단되지 않는 데가 있다. 젠 체하는 식으로 보이는 데도 있다. 공연히 큰소리를 치는 데도 있다. 짖궂은 고집도 부리지만 참으로 싹싹한 데도 있다. 바둑꾼이 된것부터 나는 불행하다고 하기도 하며, 또 그 만큼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도 있다.“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이랄 만한 작품에다가 또 하나의 큰 수수께끼를 남겼다.”
하시모토 선생이야말로 대단하다. 하하.
할 수 없다.
하시모토 선생이 걸작이라고 했으니까 여기 남긴다. 조금 전 바둑을. 이 바둑 이겼으면 명인에 다시 한 번 도전하려고 맘 먹었다는 그 바둑을. 기록에는 백270까지만 나와 있다.
과연 걸작이다.
힘이 천둥처럼 느껴진다.
(의문의 대국 - 1-270)
오전 11시 38분.
p.s.
글 쓰는 와중에 다른 것도 약간씩 했다. 아침도 먹고.
글이 흔들린 점, 이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