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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史 漫步 - 이런 바둑 이런 인생 - 내기꾼 시미야
 
나의 반상 일기(3월 19일)
- 바둑史 漫步 - 이런 바둑 이런 인생 - 내기꾼 시미야

오후 12시 39분.


바둑의 역사라….

바둑이 탄생한지 적어도 2,500년이 넘었다. 오래되었던가. 인류를 생각한다면 짧은 시간이다. 물론 선사先史를 지나 역사를 적은 시간만을 따진다면 인류 또한 그 삶의 역사가 짧고도 짧다. 인류 종족의 탄생 100만년도 우주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한 순간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짧다면 짧지만, 그래도 많은 얘기가 살아왔다. 너와 나의 바둑, 오늘 한 순간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많은 얘기가 오갔는가. 그 얼마나 인생을 반영했던가.

그렇지만
바둑에 얽힌 얘기들은 사실 남겨진 것이 별로 없다. 어쩌면 우리 개인들이 스스로 겪은 것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울리는 얘기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기억을 찾아봤다. 내 무슨 얘기를 들었던가. 손으로 몇 번 꼽으면 그것으로 그만일 정도로 적었다. 아마 내 탓도 있을 것이다. 바둑의 세계에 익숙할수록 그 세계에 대해서 말할 것은 별로 없다. 그리 느낀다. 왜냐?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일화들. 반복되는 주제들.

각자의 안목과 경험, 이해에 달린 것이지만, 그 동안 읽은 것을 되새기면 이런 기분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과장인지. 어느 얘기가 있을 법하고 어느 얘기가 비현실적인 것인지, 그 차이를 약간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 해서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미를 크게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횡橫으로 본다면 바둑의 역사 또는 바둑의 얘기란 몇 개 되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종綜으로 보면 그러한가. 그래. 시간으로 보면 얘기란 수다하겠지만, 의미로 바라본다면 얘기란 몇 개로 압축될 것이다.

의미와 이야기를 구별한다는 것은 어렵다. 서로 뒤섞여서 서로를 반영하고 또 서로를 엮어간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산책하는 정도일 것이다. 희망한다면, 그래도 그물에 잡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것.


무엇이 내 첫 번째 마음 내키는 산책길에 눈에 잡혔을까.


내기 바둑꾼 얘기나 할까 한다. 왜냐? 내 바둑 알고난 다음에 가장 유쾌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 첫머리는 우리 나라 얘기가 아니다. 일본 얘기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

앞으로도 갈등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50년이면 우리 나라와 일본의 국경은 사라질 것이다. 중국과 한국, 일본은 정치경제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것이다. 현재의 유럽 이상으로. 물론 통합된다 하더라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갈등의 조건은 크게 변할 것이다. 16세기만 하더라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제주도는 멀리 떨어진 그래서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당연히 심리적으로도 큰 거리감이 존재했다. 제주도에서 한반도와 동일시되는 민족 감정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우린 그 가운데 살고 있을 뿐이다. 변하는 와중에 이해도 변하고 감정도 변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다른 나날이다.


다음 이야기는 아는 분들께는 잘 알려진 얘기다. 그러나 모르는 분들도 많을 터이니 함께 한 때를 산책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리. 나도 책에서 읽은 얘기 그냥 옮길 뿐이다. 그 정도다.

에도 바쿠후 시대의 한창 때.
시미야 四宮米藏라는 내기꾼이 있었다. 1769년에 태어나 1835년 67세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무대의 주인공이다. 대단한 내기꾼으로 거금을 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창 때 3천량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짐작으로는 대부분 화류계에서 다 날렸을 거라고 한다.

하긴 내기로 돈 벌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 돈의 무게가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건 당시 사람들의 견해이며 나의 짐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 사람의 바둑 실력이다. 그리고 그의 인품이다.
바둑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고, 인품은 지레짐작이다. 한두 개의 이야기로 짐작할 뿐이다.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현실이 아니더라도 의미는 있을 터니까.


바둑이 어느 정도의 실력이었느냐?

1321년 1월 25일. 제7국.
白 本因坊 丈和
黑(2점) 四宮米藏
백263 이하 생략. 백305 끝. 빅.



한 번 놓아보시라. 대단한 힘바둑임을 느끼실 것이다. 흑백 모두.
내기 바둑이란 이런 것인가. 그리 느끼실 것이다.
물론 이 바둑은 내기 바둑은 아니다. 그러나!
내기바둑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내기바둑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고 싶다면 이 바둑 놓아보면 되리.

일본 책을 보면, 여기 저기서 이 바둑을 많이 다뤘다.
어느 책에선가는 “시미야 仰天”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다.



어느 부분인가. 仰天이라고 한 바로 그 장면은.



흑2가 가벼운 응수였지만, 틀렸다.
후지사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두어야 한다고 해설했다.
물론 이 수순은 백으로써는 너무나 억울하기에, 다른 변화를 찾을 것이나 좌우간 흑에게 탄력이 붙는 것은 실전에 비해서 지당할 정도다.













실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백153과 같은 역습에는 그 누구도 가슴이 서늘해질 것이다.
그 전에 흑34와 백35를 교환한 다음 흑36 꼬부린 것은 대단한 실력임을 말해주는 수순의 묘.

그 전에 하변 흑32에 대해서는 더욱 더 알 만하다. 백이 그 자리에 두는 것이 귀의 흑 사활을 보아 선수이기에 그 흑32는 대단히 두터운 수법이다.
과연 내기꾼다운 두터운 수법이다.
내기꾼들은 두터운 수법을 좋아한다.


이랬다 한다.
당시 본인방 죠와는 六段인가 七段인가 되었는데 아직 스승 겐죠元丈가 살아있을 때였다. 그 본인방가문에 지방의 유력자가 부탁을 했다. 시미야와 대국을 해주십사 하고. 물론 사례금은 당연히 있었고.

그러나 본인방 가문에서도 지면 망신. 아마추어 아닌가. 그래서 약간 망설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물론 망설임도 서로의 체면치레인 것. 부탁을 거절할 정도라면 부탁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그럴 때를 대비해서 가문에서는 잘 두는 실력자의 단위를 약간 낮추어 두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지더라도 망신이 안 되겠끔. 이로 볼 때 당시는 유력자가 부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시미야의 이름은 매우 높았다고 한다. 비록 내기꾼이지만 말이다. 치수 문제로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그로 볼 때 본인방 가문의 자존심과 시미야의 실력 사이에서 고민했을 법하다.

대국은 1820년 11월부터- 1822년 1월까지 1년여를 끌어 죠와의 6승 4패 1빅.
이미 죠와는 명인의 실력이었으니, 시미야의 실력도 대단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바둑의 내용을 보면 그건 뚜렷하다.

시미야는 대단한 실력자이다. 당시 바둑의 4대 가문에서 공부하지 않고서도 이미 三段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니 대단한 재능. 책이라도 변변히 있었으랴.
그래서 짐작가는 것이 당시의 바둑계. 그 저변이 대단히 넓었음을 알겠다.

시미야도 시미야지만 참 대단한 인물이 죠와이다. 그 인물됨을 나타내는 사실 하나를 보자.
뒷날 죠와가 자신의 대국보를 책으로 묶었는데 그 이름이 국기관광 國技觀光이다. 그 대국보에 이 바둑을 포함하여 시미야와의 대국보 11국을 전부 수록했다. 내기바둑은 아닐지라도 내기꾼과의 대국을 거리낌 없이 기록했으니 과연 큰 그릇이라 할 만하다.


國技觀光은 죠와 주변의 인물이 지어준 이름이라 하는데, 그 뜻은 주역 周易 관괘 觀卦의 효爻 六四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효사爻辭는 이렇다.

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象曰, “觀國之光”, 尙賓也

나는 모르니, 누군가의 번역을 보겠다. 고형高亨의 주역대전금주周易大傳今注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六四, 왕의 나라를 알현하여 왕의 손님 됨이 이롭다.
象曰, “觀國之光”, 尙賓也에서 상빈尙賓은 上賓으로 읽으니, 곧 왕의 빈객이다.

나라의 정사政事나 풍속 등이 크게 빛나는 광휘를 뿜고 있는 형상이다.
죠와는 자신의 시대에 와서 중국을 드디어 넘어섰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그의 책 國技觀光이 의미하는 바였다. 실로 그랬다.


바로 그 자부심에서 시미야와의 대국보를 자신감 있게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도 좋겠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드러내도 좋은 것. 당시 죠와는 바둑계를 통솔하는 명인이었으니,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시미야는 훗날 어떤 삶을 살았던가.
호號를 일생헌무안 一生軒無案이라 했다. 오사까의 어느 절에 지금도 그 묘가 있다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작은 절의 일꾼이었던 그가 나중에 돌아갈 곳도 그곳이었나 보다.

시미야는 죠와와 10번기를 둘 때 이미 나이가 52세였다. 죠와는 34세. 그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는 바둑을 두어갈수록 서로를 인정하는 품격을 보여주었다 한다.

시미야가 말했다.

죠와는 실로 명인의 그릇인가. 내 2점이면 천하무적인줄 알았으나 …


오후 2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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