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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간의 승부 - 단순한 외우기의 즐거움 - 따분하지 않았다
 
나의 반상 일기(2월 28일)
- 5년간의 승부 - 단순한 외우기의 즐거움 - 따분하지 않았다


오후 5시 35분.


아침에 왕위전 예선이 있었다.
오늘은 좀 열심히 두어보려고 했다.

하찬석 국수님과의 대국인데, 내 프로가 된 이후 한 번도 대국해보지 못했다.
그런 경우가 많은데 이상하지 않다. 예전에는 본선에 올라가야만 만나 뵐 수 있는 분이어서 그렇고, 지금은 기사가 많아져서 예선이 1차 2차 없어졌다 해도 뵙기 힘들다.

그러나 내 희망과는 달리 초반에 끝났다. 예선전 제일 첫 번째 탈락국이 되었다.
아래에 보여드리는 기보를 보시면 왜 일찌감치 끝났는지를 아실 것이다.
한심한 감각은 실전이고, 나머지는 보시면 아실 것이다. “이 한 수”는 고전적인 맥점.


(한심한 감각)




















(하찬석 국수님의 이 한 수)




















(백6 유명한 맥)




















(백12 유명한 맥)




















(하다 못해)



















88년 늦여름과 초가을.

대국을 하지 말자.
그리 결정했다고 했지만, 가만 돌아보니까 가을에 좀 두었던 거 같다. 겨울에 가서 분명한 결정이 하나 있었으니 아마도 가을엔 좀 두었을 것이다. 무 자르듯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겠다. 신왕전 우승 이후 그 다음 예선전에서 첫판에 패배한 것도 기억난다. 박카스배에서도 본선 첫판에 진 것을 기억한다. 아닌가. 한 판 이기고 그 다음 판에 졌던가.

그러나 이미 맘은 떠났다.


시험 준비를 위해 오랜 만에 책을 읽어보니 그 단순한 맛이 대단했다.

무엇보다 이런 책.

독일어대강좌. 關口存男 著

언뜻 제목만 보면, 그냥 정통종합영어 비슷한 기분 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책이 아니었다. 대단한 책이었다.

교과서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그렇게나 즐거웠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읽었다. 수 개 월을 읽었으니 10번도 넘게 읽었다. 처음에는 그렇게나 힘들었다. 내 대학교 들어갈 때 종합영어 한 시간에 1쪽 못 나갔는데 - 처음에 책 잡을 때 -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책 두께가 약 500 쪽은 넘은 것이었는데, 설명도 깊었지만 독일어가 한 눈에 잡힐 정도로 체계를 잘 잡아 두었다. 나는 이 책을 나중에는 1-2시간에 한 번 읽을 정도가 되었는데, 그 정도 되니까, 독일어 사회과학 원서를 사전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대단히 많은 양의 철학, 문학, 과학을 예제로 제시해 두었다.

하긴 그것만 읽은 것은 아니다. 명문 번역 된 책 한 권 잡아서 읽고 또 읽었다. 몰라도 외웠다. 외우지는 못해도 문장 다음에 어떤 문장이 나오는가를 짐작할 정도까지는 읽었다.

이런 얘기 하는 거 약간 우습긴 하지만, 내 볼 때 외국어는 하루에 적어도 3시간 이상, 3개월을 해야만 약간 눈에 잡히는 거 아닌가 한다. 하루에 30분? 그런 거 갖고 써먹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본다. 심지어 쉽다는 일본어도 그렇다. 절대 쉽지도 않지만. 그래, 뒤로 물러서자.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하루에 30분이면 어제 읽은 거 다시 읽는 것에도 부족했다. 바둑이라고 다를까. 다른 지식 분야라고 다를까.


정말 즐거웠다.
예제로 쓰인 것은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간결하게 정리한 것을 외우는 것은 실로 나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단순한 것의 반복. 외우는 과정의 단순함.
아, 그 언제나 나는 그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용이 철학, 문학, 과학 등에서 가져온 것이라서 읽는 맛도 있었으리. 그런 맛도 없다면 그건 낭비가 되리.

마치 간결한 수학 문제 푸는 듯한 기분. 바로 그것이 내가 독일어 수 개 월 공부할 때 맛보던 맛이었다. 그렇게 논리적인 언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따분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산책 때 책을 들고 나가 송이송이 암송도 했다. 산책이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따분함의 즐거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정치학 공부는 큰 재미가 없었다. 시험 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니, 따분했다.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원서를 깊이 읽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그쳐야하는 것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 할 수는 없는 노릇.
내 생각에 정치학은 시험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정치학 일반에 대해서 시험 본다면 또 모를까. 아니, 그냥 석사 논문 보면 더욱 정확하게 학생의 실력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나는 독일어 공부할 때 자기 전에 그 날 읽은 것을 빠르게 훑어 - 찍는다고나 할까 - 기억에 남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 이전에 먼저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그러니까, 10번이 아니라 30번은 읽었겠다.


바둑도 나름대로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나는 늦게 준비했지만, 그러나 남들 하는 것은 하고 입단했다고 자부한다. 공부 없이 아는 것, 그런 것이 있을까?
하긴 이런 말씀도 있다. 뜻은 다르겠지만.

금생今生의 공부는 전생前生에 끝내야 하는 것이고, 후생後生의 공부는 금생今生에서 결판난다고.


독일어의 기초 공부.
그 하나로만 국한해도 돌아보는 과정이 힘들다.
내 쉽게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가 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너무나 컸기에 오늘 내 꼭 남기고 싶었다.
단순한 일상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 뭔가 크게 말하고도 싶은데, 그런 글은 내 쓸 수가 없다. 나는 잠언箴言을 남기는 타입이 아니며, 또 될 수도 없다.
단지 내 생활에서 나는 이리 느꼈다. 그리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일기가 그것 아니겠는가.


오후 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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