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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간의 승부 - 어느 프로의 자각 - 언덕에 서다
 
나의 반상 일기(2월 20일)
5년간의 승부 - 어느 프로의 자각 - 언덕에 서다


새벽 3시 44분.

새벽.
오늘에 들어섰다.
나는 오늘 국수전 예선에 나간다. 이리도 일찍 잠을 깼으니 바둑판 앞에서 졸겠군.

어젯밤 글을 쓰고 보니 나도, 나도 프로? 하하.


박카스배 결승3국 대국장은 이태원 크라운 호텔이었다.
크라운 호텔은 바둑계와 인연이 깊다. 대국은 물론이고 행사도 많이 열린 곳.


(박카스배 결승 3국)

박카스배 결승3국
1988. 6. 10
白 四段 문용직
黑 九段 조훈현
흑71 이하 생략. 흑 불계승.


바둑 끝낸 후 점심을 기다리면서 조훈현에게 부탁했다. 내 바둑에 대한 평을.
너무 유柔하지 않아?
실전 백62와 같은 수 말야. 당연히 이리 두어야 하는 것 아냐?






(이리 두어야)

백3 젖히지 않는다면 바둑이 아니다. 프로의 바둑이 아니다. 그 말씀이었다.
















점심 식사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약간의 허망함을 안고.
3대 0으로 패배.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나는 프로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 나는 프로의 자격이 있는가.
아니, 나는 프로가 왜 되었는가. 프로가 되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나의 자화상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 날 오후 발걸음 따라 인사동 공평센터 건너편에 자리 옮겨 잡은 최규병 사범 연구실로 나갔다. 승부? 졌지. 어떻게? 한 번 놓아 보지요.

그러고보니 아무도 내 바둑을 관전하러 온 기사는 없었다. 흥미가 떨어진 승부에는 아무도 관전하고픈 맘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무관심한 것이 아니다.
150여 수까지 복기했다. 승부는 이미 흑71에서 끝났건만.


사건이 생겼다.
하나는 크라운 호텔에서. 다른 하나는 연구실에서. 그러나 하나로 귀일되는 사건.


크라운 호텔 대국에서 나는 돌을 던졌다. 승부가 이미 사라진 마당에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그러나 묘한 일이 있었으니, 패감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앞서 실전에서는 보여드리지 않았지만, 이랬다.

패가 3개 생겼는데 흑이 중요한 패를 따낸다는 것이 그만 작은 패를 따내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내가 그냥 승부패를 이었다면 승부는 백이 이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놀랐다. 그리곤 손이 먼저인지 맘이 먼저인지 몰라도 즉시 돌을 던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로가 허망한 웃음.


연구실에서 말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던지지 말고 이겨야 한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의견이 있었다.
프로라면! 승부이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

최규병 사범이 웃으며 말했다. 용직이 형은 그러지 못할 걸.
나는 쓴 웃음만 지을 수 있었다. 왜 웃음이 쓰디 쓴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풍경이 기억난다. 표정들이 기억난다.

햇살 밝은 날이었는데 그 날은 술잔도 기울이지 않았다.
힘든 시험을 끝내고 나면 밀려오는 감미로운 바람 같은 시간도 그날따라 없었다.

잠시 언덕에 올랐다가 내려온 기분이었을까. 그런 감상은 있었던 듯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비록 낮지만 언덕에 올라가보면?

내 어깨가 보일 것이다.
내 어깨의 높이가 눈에 잡힐 것이다.
먼 산 보일 것이다.


이른 아침 4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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