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상 일기(2월 19일)
5년간의 승부 - 프로로서의 자각 - 회의懷疑의 다른 말인가
저녁 6시 42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 때로 시간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내면에서 그 어떤 무엇이 고개를 내밀 때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나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온다.
시간은 온다.
부대껴 타성으로 결정하는 순간일지라도.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왔다.
88년 봄.
정녕 승부란 운인가.
나는 제5기 박카스배 결승에 올랐다.
본선 진출 세 번 만에 결승에 올라간 것이었다.
따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때인데도 그 성적 낸 것을 보면, 승부에는 운이 많이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새삼 느낀다.
(박카스배 결승 1국)
제5기 박카스배 결승1국
1988. 5. 14.
白 四段 문용직
黑 九段 조훈현
흑109 이하 생략. 흑 불계승.
백62가 패착. 64에 두었어야 했다. 흑63 이하 흑71까지 백은 얻은 것이 없다. 반상은 단순해졌다. 백74 이하는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두어봤다. 흑101 이하 105가 정확한 수순. 흑105가 놓여져서 A와 흑109를 맞봐 백을 잡았다.
흑71에서 끊을까 하다가 독자께서 묘수풀이 즐기시라고 좀더 진행했다.
부끄러운 바둑이다.
내가 백을 잡았으니 그 때의 기분을 살려봐서 내 시각에서 놓아봤다.
그 때의 부끄러움이 지금 내 손 위에 떠다니는 기분이다. 마치 지금이 그 때인 것처럼.
남쪽 바닷가 충무에 가서 두었다. 지금은 통영과 통합하여 통영으로 불리는 곳.
당시 약간 퇴락했지만, 그래도 1급이었던 충무관광호텔에서 두었다.
문제는 바로 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나의 바둑을 대하는 태도, 입장. 아니, 의식이랄까.
의식에 확 잡혔다.
큰 창이 있어 충무 앞바다 섬들이 점점이 눈에 잡히는 1층 특실에서 두었다.
내 앉은 자리는 그 창을 왼쪽으로 해서 쉽게 눈에 가는 자리. 조훈현 앉은 자리에서는 그 바다가 그리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창을 내다보았다.
바둑보다 그냥 저 바다로 가고 싶었다.
바둑에 대한 관심은 가벼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느꼈다. 실로 깊이 느꼈다.
왜 그러면 아니 되나?
프로라고 승부 앞에서 집중만 해야 하나?
바둑은 일찍이도 점심 시간 전에 끝났다. 기원에서 해설 하시던 김재구 사범님이 기백 없는 바둑이라고, 도전자가 이래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니, 저 바다 보고 바둑만 둘 수 있나…. 핑계처럼 내면은 말했다.
그러나 핑계 이상이었다. 실제로 그리 느꼈다. 인식했다. 알았다.
그 날 밤.
조훈현 九段과 호텔 주변 밤바다를 산책 했다.
내가 말했다.
나는 내가 프로 아닌 것을 안다고.
조훈현이 답했다.
알면 됐어.
승부에 졌다는 아픔은 없었는데, 뭔가 허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승전은 5번기. 한 판은 이겨서 4국 정도 배우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은 있었지만,
미리 알았다.
생애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갔는데, 올라가본 것에 그칠 것이라는 것을!
바둑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2006년 2월의 현재. 나는 바둑이 나에게 무엇이었던가를 안다.
그러나 바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그 점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는 충무 앞바다 그 대국실에서의 내 맘이었다.
언제나 인식할 때에만 새삼 인식되는 것.
인간의 한계.
저녁 7시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