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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간의 승부 - 승부란 운인가 - 제3기 신왕전에서
 
나의 반상 일기(2월 15일)
5년간의 승부 - 승부란 운인가 - 제3기 신왕전에서


아침 8시 24분.

겨울도 갔나.
우수雨水가 며칠 후다. 소위 대동강 얼은 물도 녹는다는 우수 경칩驚蟄.

봄 기운을 미리 느껴볼 수 있을까. 어쩌면 벌써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바둑의 봄은 아마도 74년 서울에 오고 난 다음이었을까.
그 후 바둑에 집중하던 그 몇 년간이었을까.
아니면, 바둑을 처음 배울 때, 그리고 프로가 되겠다고 서울 올라오기 전까지가 봄이었을까.

오늘까지 프로 생활 23년.
과연 그 언제가 프로로써의 봄이었을까.
가을은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수확하는 가을? 만약 성적을 내는 것이 수확이라면 그건 옛날이고,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87년 그 때가 봄이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내 프로 생활 중에 작은 것이라도 타이틀 우승한 적이 있으니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87년 가을부터 시작된 제3기 프로신왕전에서 나는 우승했다.
88년 초 봄이었을까. 결승이 끝난 것이.

그러나 토너먼트 기전이고 6단 이하 35세 미만이 출전 자격 요건이니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겠다. 토너먼트는 운이 상당히 따른다. 강자를 피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운.


몇 가지 기억난다.

1) 겸손은 프로에게 없는 것. 그것이 프로의 덕목이다.

그 때가 유창혁 三段이 방위 생활을 막 시작하던 중이었는데 내 가만히 있으면 부전승이 되겠다. 일정이란 것이 토요일과 일요일엔 잡히지 않으니까.

그러나 괜히 부전승 하고픈 생각이 없어졌다. 나는 굳이 상대를 봐서 일부러 내 편에서 상대의 편의를 먼저 봐 주지는 않는다. 나도 때로는 상대에게 대국일자를 뒤로 미뤄 달라, 앞으로 당겨 달라, 그리 말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내가 필요할 때 하는 것이 부탁.

그런데 묘했다. 내가 먼저 다른 날로 잡자, 그리 말했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유 三段이. 굳이 내가 다른 날로 잡자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뭐 꼭 내가 그저 이기기는 싫다, 그런 맘이 든 것도 아니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나도 상대가 기권하면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당연히도 그렇게 한다.



(신왕전 8강전)

신왕전 8강전
1988. 2. 14.
白 三段 유창혁
黑 四段 문용직
흑125 이하 생략. 흑 불계승.

백52가 패착. 55 한칸 뛰어둘 자리. 흑53 끊겨서 승부는 끝났다.

소비시간 각자 4시간 중에 유 三段은 불과 25분을 썼다. 나는 1시간 40분.
하하. 정말이지, 불편한 맘으로 그 친구 대국한 것이 틀림없다.



당시 유창혁은 대단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그 해 겨울 大王戰에서 조훈현을 3대1로 물리치고 우승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전에 신풍대결인가에서도 조훈현에게 3승을 거두지 않았던가. 나와는 실력이 다르다. 빈 말이 아니다. 겸손도 아니다. 승부의 세계에서 무슨 겸손!

내가 아무리 바둑을 멀리 할 때가 있었고 또 바둑에 큰 애착을 아니 가지고 있더라도 겸손은 없다. 겸손하면 승부는 대국 전에 끝난다. 아니, 프로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해도 좋다.


2) 착각했지? 술이나 하러 가자.


(신왕전 결승2국)

신왕전 결승 2국
1988. 5. 12.
白 四段 문용직
黑 三段 박종열
백160 끝. 백 불계승. 백 2시간 30분. 흑 3시간 17분.



운당여관은 프로들로써 한 번은 대국 장소로 쓰고 싶은 곳.
이름도 좋다. 雲堂. 구름이 머무는 곳. 구름이란 것이 바람에 쓸려 정처定處가 없는 것이니, 여관 이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다.



북한산 도선사에 가면, 법당 못 미쳐 오른 쪽에 백운白雲이라는 편액 걸린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객승이 머무는 곳이 아닌가 한다. 글씨가 언뜻 보면 매우 복잡하다.

이 바둑은 신왕전 우승을 결정한 대국. 운당여관에서 두었다. 결승이니까 봄 양복을 입고 대국했다. 넓은 방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하나는 대국실이고 다른 하나는 검토실이다. 마루를 올라가면 왼쪽이 대국실. 오른쪽이 검토실. 그렇게 썼다.

내가 대단히 불리한 바둑이었는데 나는 내가 불리한 줄도 모르고 두었다. 정말이다. 태연히 두었으니 그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불리한가 하면, 우상귀 흑61 이후 흑a 이하 흑e 백118 흑f 백g 흑h로 패가 나는 것도 잊었다. 나중에 알고 부랴 부랴 가느라고 혼이 났다.

대국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대국실엔 기사들의 관전이 좀더 많아지는 것이 당시의 풍경이었다. 이미 승부가 끝날 것으로 알면, 그다지 대국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때문일까. 아니면, 여관 방 자체가 아늑하고 넓어서 관전하는 것이 자연스런 배경이 될 수 있었던 때문일까.

김희중 사범이 들어왔다. 내 백160을 착점하기 조금 전에.
흑은 착각했던 것이다. 흑159 다음에 백A 흑B 백160 흑C 백D 흑E로 수가 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백160이 놓이자, 김희중 사범 특유의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박종열 사범의 어깨를 쳤다.

“착각했지? 던지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하하.


3) 상금은 나왔는데 어디에 다 썼는지?

하숙집에서 고기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한 잔 한 것은 분명한데, 나머지 돈은 어디로 갔을까. 잔치였을까. 잔치였다. 마당에서 놀았으니까.


4) 조마조마 했다.


(신왕전 결승1국)


신왕전 결승1국
1988. 5. 6.
白 三段 박종열
黑 四段 문용직
흑113 이하 생략. 흑 10집반 승.


흑85 흑87이 수순이라고 보았다. 괜찮은 수순의 묘라고 본다. 물론 이견은 있었다. 누군가 흑87이 좋은 맥점일까? 물었을 때, 홍태선 사범이 아, 그럼 했다.



문제는 흑101. 무리수였다. 국면이 복잡해서 - 약간 유리한 듯도 한데 - 과감하게 두어본 것인데, 사실은 졌다면 패착이 되었을 것이다. 백110이 패착. 흑111에 먼저 단수 했으면 백이 한 수 빠른 수상전이었다.

그런데 사실 난 이 수를 보고 있었다.
조마조마. 하하.
백101을 둘 때는 몰랐는데 - 그냥 멋진 건너붙임이라고 보았다 - 백102로 끊기고 나니까 한 수 부족이 보였다. 어쩌랴. 내친 걸음.


5) 승부란 운인가.

運七技三
운이 일곱이면 실력은 셋인가.

아니면 실력 있는 자에게 운이 돌아가는 것인가.
운이 있는 자에게 실력도 붙는 것인가.


아침 9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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