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상 일기(2월 14일)
5년간의 승부 - 봉원사의 하루 하루 - 가을 겨울 봄
아침 7시 22분.
밤을 닫고 아침을 여는 기분이다. 속이 약간 더부룩하지만 車道 차ㅅ소리 명랑하게 들리는군. 어제 술 마시지 않았거든. 아니, 소주 한 병만 하고 자제했지. 오랜 만에 여의도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유쾌했지. 옛사람들은 비를 참 고맙고도 의미 있게 받아들였지. 비는 하늘이 주는 혜택으로 만물이 생장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니 말야.
비가 약간 오면 나는 비를 맞고 다니는 편이다. 우산이 귀찮기도 하지만 빗속을 걷는 기분이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가 된다. 프로가 된다?
어제 읽은 글에 후배가 이리 말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생활에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아니, 여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기댈 언덕. 그 의식 하나가 인생의 힘이 된다.
맞다. 그런 점이 있다.
내가 바둑을 두다가 다른 길을 넘보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점이 뒤에 깔려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아마도 내가 뒷날 1997년에 정치학을 그만 두고자 한 것은 바둑이 뒤에 있었기 때문에 결정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아무런 언덕이 없었다면 10년을 소비한 것을 던져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결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정치학을 하고자 한 것에도 큰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시간이 남으니까 여가를 보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런 것도 있겠다.
정치학을 하니까 바둑에도 여유가 좀더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정치학도 하나의 언덕. 물론 석사 정도로 여유 생길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는 이도 저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잠재의식이 나에게 결정 내리는 것을 뒤로 물리게 했을 수는 있겠다. 부인 못하겠다.
시대에 따라 다르겠다.
나는 내 앞선 세대의 정서에 가까운 사람. 중학교 때인가 읽었던 김동인의 배따라기, 소월의 詩, 1930년대의 지분脂粉 냄새, 그런 것에 민감했다. 경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즐기지 않는다. 시대에 의해 약간 무너지는 개인, 그런 기분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과연?
내 봉원사 시절의 바둑 한 판 봐야겠다.
김수장 사범이 “아! 이런 좋은 수가?” 월간 바둑 코너에 실은 것이기도 한데 뭐 그렇게 큰 묘수는 아니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묘수가 하나 나오는 것. 그보다 내 이 바둑 기억하는 까닭은 평소 많이 내가 지는 분과 둔 바둑이라서 그러리.
(박카스배 준결승 1)
제5기 박카스배 준결승 1
1988. 4. 6.
白 四段 문용직
黑 六段 홍태선
백144 이하 생략. 백 불계승.
흑67이 실수. 작았다.
백68 이하가 성립하여 흑이 곤란.
그러나 나는 몰랐다. 흑이 흑81 이하로 잡겠다고 나서는 수단은 미처 수읽기에 넣지 못했었다. 다행히 백86이 있어서 겨우 살았다. 백86을 90에 두면 흑92로 백 곤란.
소비시간을 보니 내 열심히 두었음을 알겠다.
백 2시간 55분. 흑 2시간 45분.
바둑의 세상에 여유 있다는 것과 열심히 두는 것과는 다르겠다.
아, 이 바둑. 내가 백이라서 기보를 반대로 놓아봤다. 기보는 흑의 시각에서 적는다. 내 옛 기분 살려보니 그것도 참 좋다.
나는 봉원사 시절에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다.
앞 집의 김진묵 님에 놀러갔더니 - 이 분은 음악 평론가였다 - 문용직 씨는 이런 음악 좋아할 거야, 하면서 LP 한 장.
peter, paul and marry의 500 miles, leaving on a jetplane …
내 반전 反戰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노래. leaving on a jetplane. 제목 맞나?
이 양반과는 술도 많이 했다.
그 콜로세움 안에서 겨울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막걸리. 냉동 닭.
냉동 닭을 장작에 얹어서 껍질부터 하나씩 벗겨가며 먹는 그 맛.
하얗게 남은 재에 담뱃불을 붙이면 그 맛.
홍어와 막걸리.
누워서 - 약간 춥지만 - 밤하늘을 보면, 총총한 반공半空이 둥근 원 안에 들어온다.
강원도 산골에 계신다더니, 요즘은 어디에?
소주와 청하. 꽁치캔.
캔 두껑을 열고, 그 아래에 작은 불씨를 만들면 금방 따뜻해진다.
야외에서 저 멀리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마시면 된다.
마른 가을 한적한 오후에.
봄이 오기 전 누런 잔디 위에서.
스님과도 한 잔 했다.
내 노래 못 부르는데, 그래서 노래방도 아니 가는데, 그러나 부른다. 김진묵 님 친구 분이 또한 가수. 지하에서 노래를 부르면, 잠도 아니 자느냐고 주변의 항의.
한 번은 그 친구 분이 종로에서 발표회를 열었는데 무명 가수라서 관객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박수는 대단했다. 아름다운 곡. 최규병, 유창혁에게 표를 팔았었다.
아, 내 방 앞에 가수 박인수씨가 잠시 거처했는데 아시는지? 그 “봄비”의 가수!
봄비를 약 7,8분에 걸쳐서 한 곡 들어보시라.
물론 이 분은 단 한 번도 노래 연습하는 것을 내 보지 못했다.
다만 아침에 칼칼하게 목청을 물로 씻는 것은 보았다.
봉원사 아래에는 그 언제부턴가 어려운 환경의 예술가들이 몰려 살았다. 내 있을 때는 그 한창 때인가 싶다. 그래서 무대로도 쓰이고 했는데 배우 강수연 씨가 내 하숙집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술은 그들의 벗이었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연극 연출가들도 몇 명 만났다. 내 방 옆에도 한 분 거처했었다. 가만, 서울의 예수를 연출했던 분이던가?
내 방 옆에는 배추머리 학생도 한 명 있었는데, 이 친구가 좀 관념적인 시를 쓰곤 했었다. 1987년 가을은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된 시간. 지적 知的 풍토가 좀 그런 시절. 들국화의 “행진”을 사회주의 감상품으로 읽기도 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대단히 높은 옥타브 자랑하던 친구. 바둑을 두어서 생기는 돈으로 신촌 시장 슈퍼에서 잘 만든 햄을 얇게 썰어서 가져온다. 그러면 능력껏 벌어서 소비는 함께 한다는 그런 말을 누리기도 했다. 이 친구 소식 재작년 가을에 성석제 씨에게서 들었는데… 요즘은 어디?
한국기원에 나가는 것.
종로에서 노는 것.
봉원사에서 대화하는 것.
그것이 87년 가을부터 88년 봄 여름까지 나에게 있었다.
젊은 한 때, 잘 놀았다.
그런 한 때, 대화에는 세파世波가 섞여있지 않았다.
1977년 겨울 경남 고성에서의 권재룡 박사 댁에서 태평으로 바둑 공부하며 지내던 때와 같은 시절이었다. 바둑만 그리 열심히 아니 할 뿐.
그래도 내 봉원사 시간은 과연 어떤 시절이었을까?
아침 8시 48분.
빗님은 하념이 없네. 나갈까 말까.
비를 만나는 경우엔 대체로 일이 잘 풀린다. 그런 조짐이 많다.
오늘 그러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