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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기지개 켜는 돼지띠 기사들
 

2019년이 밝았다. 60갑자로 따져 새해는 기해(己亥)년으로, 황금돼지 해라고 풀이하고 있다. 뭔가 풍요롭고 넉넉한 한 해가 되리란 기대감을 준다. 프로기사 목록을 뒤져본 결과 적지 않은 숫자의 돼지띠 기사들이 바둑계에서 맹활약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랭킹으로 보자면 나현 9단이 한국 돼지띠 기사들중 선두다. 작년 12월 기준으로 10위에 올라있는 나현은 95년 1월생이다. 2014년 물가정보배, 2015년 천원전서 연속 우승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 중 한 명으로 성장 중이다. 계산과 끝내기 등 종반 처리능력이 특히 뛰어나 이창호 박영훈의 뒤를 잇는 계산파 기사로 꼽힌다. 돼지도 이런 치밀함이 있었나? 아무튼 나현은 가장 치밀하고 정확한 수재형 돼지다.

하지만 돼지띠 기사의 리더로는 역시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세돌 9단이다. 83년 태어난 이세돌은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초특급 스타다. 중국 구리와의 ‘세기의 10번기‘,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 등 ‘세기’란 수식어가 들어간 바둑계 최고 이벤트들을 독식한 사나이다.

초년병 시절 32연승, 승단대회 불참으로 인한 파문, 그로 인한 승단대회 폐지, 최장기간 한국랭킹 1위, 톱기사 중 전무후무한 휴직 사태, 기사회 탈퇴 선언, 2연속 반집승에 의한 3번기 세계 결승 승리, 연간 국내 대국료 수입 1위(14억 1000만원, 2014년) 등 그에겐 항상 화제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천변만화하는 전투와 변화무쌍한 행마 초식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돼지의 무차별적 먹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자기사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잠시 휴직 중인 박지은도 이세돌과 같은 83년생 돼지띠 기사다. 박지은 이전에도 루이나이웨이, 윤영선 등 훌륭한 여성 기사들이 있었지만 박지은은 ‘순 토종’으로 한국바둑을 가장 많이 빛낸 여성이었다. 세계 여자기전에서 무려 5번이나 우승했다. 정관장배 등 단체전서도 한국 우승에 절대적 공헌을 세웠다.

국내 여성기사 중 9단 승단, 500승 고지 돌파 모두 1호다. 2002년 도요타덴소배서 한국기사 킬러로 유명한 요다 노리모토를 KO시킨 사건은 박지은 바둑 인생의 절정이었다. 돼지는 미련하고 지저분한 동물로 통하지만, 이처럼 지능과 용모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들에 의해 돼지 이미지가 180도 바뀌기도 한다.

한국기원 소속 기사 서열은 우선 입단 순이고, 입단이 같을 때는 나이 순으로 매긴다. 한국기원이 매년 발간하는 연감엔 김인 고재희 조훈현 유병호 노영하, 그 다음 여섯 번째로 이 사람이 올라있다. 47년생 돼지띠 기사 천풍조 9단이다. 355명에 이르는 한국기원 소속 기사들 중 나이 서열로는 3번째다. 천풍조 9단은 토너먼트 보다는 보급, 그 중에서도 해외 바둑시장 개척에 평생을 바친 기사로 꼽힌다. 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캐나다 유럽 러시아 등 여러 곳을 오가며 한국 바둑을 심었다. 기사회장도 역임했다. 돼지띠가 게으르고 자기 욕심만 챙긴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47년생 다음의 돼지띠는 59년생이다. ‘기사 족보‘ 상에 59년생 돼지띠 기사는 강만우 조대현 김기헌 등 3명이 등재돼 있다. 올해 환갑을 맞는 나이지만 젊었을 때는 모두 무시무시한 완력을 휘둘렀던 맹장들이다. 입단이 가장 빠른(78년) 강만우 사범은 연구생 사범을 가장 오래해 상당수 후배들은 다 그의 손을 거쳐 프로가 됐다. 80년 입단한 조대현 사범은 ’한국의 우주류‘로 유명하고, 92년 33세에 늦깎이로 입단한 김기헌 사범은 시니어리그의 호랑이로 군림 중이다.

83년생 돼지띠로는 이세돌 박지은 외에 염정훈 이용수 김효곤 김선미 디아나(이상 입단 순) 등이 있다. 염정훈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입단해 맹활약 하는 등 한 때 이세돌에 버금가는 유망주였다. 이용수는 전도유망한 영재들의 재주를 발굴하고 키워내는데 일가견을 지닌 최고의 조련사로 정착했다. 김효곤 5단은 2006년 제50기 국수전 본선에 진출한 바 있다.

95년 생 돼지띠 기사들도 나현 외에 여럿이 활약 중이다. 양우석 황재연 마리야 백찬희 이동휘 김민호 송상훈 김창훈 정서준이 그들. 헝가리 출신인 디아나,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마리야 등 단 2명뿐인 여성 유학파 기사들이 100% ‘돼지띠’ 그룹에 속해 있다. 정서준은 95년생 중 가장 늦게(2017년) 입단했지만 랭킹 30위권을 오르내리며 힘차게 뛰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돼지띠 기사는 구리 9단이다. 83년생 동갑인 이세돌과 용호상박의 명승부를 펼쳐오면서 함께 유명해졌다. 구리는 무려 8번이나 세계 메이저 정상을 정복했다. 단발 우승자가 대부분인 중국 바둑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커리어다. 중국 유수의 대학인 칭화대에 입학 후, 만 30세 때인 2015년 제10회 춘란배서 마지막으로 우승했다. ‘내구력’도 누구보다 뛰어난 ‘슈퍼 돼지’였던 셈이다.

95년생 돼지띠 기사로는 당이페이가 있다. 2012년 제4회 비씨카드배를 놓고 백홍석과 치열한 싸움 끝에 패배, 준우승하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17년 제21회 LG배 때 저우루이양을 2대0으로 완봉하고 기어이 세계 정상까지 정복했다. 2019년 1월 현재 중국 랭킹은 19위. 지닌 실력에 비해 다소 저평가된 느낌을 주는 ‘특상품 돈공(豚公)이다.

중국의 잘생긴 기사 리쉬안하오도 95년생 돼지띠다. 마침내 미남 돼지까지 찾아냈다. 그는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고 바둑도 매우 강해 차세대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17년 제3회 몽백합배에선 안국현 양딩신 이지현 천야오예 이세돌 최철한 등이 속한 조에서 혼자 살아남아 4강까지 진출, 각국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준결승서 박영훈에 1대2로 패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를 질주였다.

일본 돼지띠 기사 중에선 한국계인 류시훈 9단(71년생)이 우선 떠오른다. 류시훈은 15세 때인 1986년 도일 유학, 섬나라 일본 땅에 8차례나 태극기를 꽂았던 ‘애국 돼지’였다. 천원 4회, 왕좌 1회 등 메이저 타이틀도 다수 정복했다. 조치훈 조선진 등과 더불어 당시 바둑 선진국이던 일본의 자만심을 잠재우고, 한국 바둑의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 천원전 도전기 때는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3판 모두 반집을 이겨 3대0으로 타이틀을 탈환하는 등 남다른 스타기질까지 갖춘 ‘멋쟁이 돼지’였다.

일본 바둑계 돼지띠를 정리하면서 빼놓아선 안 될 기사는 고 가토 마사오 9단이다. 그는 47년 태어나 2004년 57세로 타계할 때까지 짧지만 굵고 강렬한 족적을 남겼다. 이시다 다케미야와 더불어 기타니 도장 ‘황금 3총사’로 불렸던 가토는 무시무시한 살수(殺手)가 특기여서 ‘살인청부업자’란 별명으로 통했다. 최고 타이틀 기성(棋聖)만 준우승 4회에 그쳤을 뿐 명인전 2회, 본인방전 4회, 왕좌 11회 우승 등 성적도 발군이었다.

2004년 일본기원 이사장에 취임, 의욕적으로 개혁에 착수하는 듯 했으나 바로 그해 와병, 사망했다. 가토가 몇 년 만이라도 일본바둑 개혁을 이뤘더라면 한 중 일 바둑의 3각 정립시대는 좀 더 계속됐을 것이란 점에서 그의 죽음은 더욱 아쉬웠다. 가토는 일본뿐 아니라 타국 바둑인들 사이에서도 ‘애석한 돼지‘의 잔상으로 남아있다.

돼지는 식용(食用) 목적이 거의 전부로 보이지만 약 4800년 전 가축으로 정착한 뒤 인간들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로 자리 잡았다. 제사 등 의식의 희생물로 쓰이면서도 매우 신성시됐다. 낙천적이고 풍요로운 이미지 덕에 ‘돼지꿈’ ‘돼지네 집’ 등의 용례에서 보듯 긍정과 친숙의 상징 동물로 뿌리내렸다. 올해는 한 중 일 돼지띠 기사들 중 누가 용감하면서도 후덕한 ‘돼지의 무예‘를 보여줄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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