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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의 바둑이야기
  박정환과 커제, 남방장성 격돌 임박
 

격투기엔 스타급 강자들이 즐비하다. 격투기의 종류부터 얼마나 많은가. 복싱, 킥복싱, 주짓수, 레슬링, 쿵푸, 무에타이…등 일일이 옮기기조차 힘들 정도다. 이들을 한 무대에 올려 프라이드니 UFC니 등 갖가지 간판 아래 종합 격투기도 쉴 새 없이 열린다. 효도르, 크로캅, 케인 벨라스케즈, 피터 아츠, 앤디 훅, 반델라이 실바,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등 숱한 싸움 천재들이 역사를 빛냈다. 격투기 팬들은 엄청난 스타들이 번갈아 내오는 ‘성찬(盛饌)’에 숨이 막힐 정도다.

바둑은 어떤가. 지난날엔 조훈현과 서봉수, 이창호와 창하오, 이세돌과 구리 등이 라이벌로 군림하며 팬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유창혁과 일본 요다의 동갑 라이벌전도 인기가 높았다. 일본에선 조치훈 대 고바야시 고이치, 다케미야 대 고바야시 고이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린하이펑 대 오다케, 후지사와 대 사카다 등이 인기 높은 숙적 커플이었다. 국내만 놓고 보면 조훈현과 이창호 사제 대결, 이창호-이세돌의 ‘양이 대결’ 등이 인기 카드였다. 요즘에도 신진서와 신민준, 이동훈과 변상일 전 등이 열리면 시청률이 크게 오른다.

하지만 격투기에 비하면 바둑은 ‘호화 카드’라고 부를 만 한 대진이 매우 빈약하다. 종목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격투기처럼 경기 스타일을 다양하게 세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고 스타들만 불러다 ‘족집게 대결’을 하는 형식이 아니어서 좀체 호화 카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둑을 흥행 대상으로 올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나라가 한 중 일 대만 4개국 정도다. 이렇다 보니 바둑 팬들이 호화 밥상을 제공받을 기회는 좀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바둑의 세계화란 관점에서도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바둑계 최고의 파이트라고 부를 수 있는 대결은 2014년 벌어졌던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였다. 세계 바둑을 양분하고 있는 한 중 두 나라의 대표 스타들인데다 피차 난타전을 즐기는 화끈한 기풍이고 나이까지 동갑이란 점에서 기획된 이벤트였다. 이 행사는 당초 기대를 넘어서는 큰 관심 속에 치러졌고, 시리즈를 6승 2패로 끝낸 이세돌은 500만 위안(한화 약 8억 5천만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상금을 챙겼다.

이세돌과 구리는 올해 서른 네 살이다. 세월의 힘 앞에선 장사가 없다더니 둘은 자국 랭킹에서도 최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들로부터 한 중 랭킹 1위 자리를 빼앗은 기사가 박정환(24)과 커제(21)다. 그래서 박정환 대 커제 전은 단순히 개인의 승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박정환은 9월 현재 46개월 연속, 커제는 24개월 연속 자국 랭킹 1위를 지켜오고 있다. 이 같은 자료를 뒷받침하듯 맞대결 전적도 팽팽해서 난형난제의 핑퐁게임이 계속되고 있다. 이 대결이야 말로 이 시대 바둑계의 최고 카드로 꼽힐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 두 기사가 9월 22일 또 한 번 마주 앉아 돌을 섞는다. 중국 후난성 펑황(鳳凰)시에서 열리는 제8회 남방장성배 세계바둑 정상 대결이다. 세계적 관광지인 이곳 일대를 홍보하기 위해 후난성이 2003년 창설한 대회로 매 2년마다 격년제로 치러왔다. 일본 등 제3세계를 배제한 채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 기사들만으로 치르는 철저한 한-중 정기전이란 점이 이 행사의 특징이다. 2003년 열린 첫 대회서 한국의 조훈현이 중국 창하오에게 승리하면서 서전을 장식했다.

이어 2005년 2회 때는 이창호와 창하오가 맞싸워 대회 사상 유일한 무승부를 기록했다. 희귀한 4패 빅이 등장함으로써 승패를 결정짓지 못한 것. 3회(2007년) 때 뤄시허에게 패한 이세돌은 2년 후 4회(2009년) 다시 대표로 나가 구리를 상대로 화풀이 했다. 2011년 5회 대회는 최철한 대 쿵제 전으로 이어져 최철한이 승리했다. 2013년 6회 때는 박정환이 천야오예에게 패했다. 2015년 제7회 대회서 김지석이 탕웨이싱을 따돌림으로써 한국이 7전 4승 2패 1무승부로 앞서 있다. 이 대회서 한 차례 패점을 기록했던 박정환으로선 올해가 만회할 찬스다.

▲ 지상최대의 바둑쇼. '봉황고성배'는 2003년부터 열렸다.

남방장성배는 대국실과는 별도로 넓은 공간에 대형 바둑판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 위에 검은 옷과 흰 옷을 입은 무동(武童)들이 바둑알 역할을 하는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치러져왔다. 바둑판 면적은 1005 제곱미터, 가로 세로 31.7 미터, 무게 159톤에 달하는 초대형이다. 하지만 지난 6회 때에 이어 이번에도 이런 퍼포먼스는 열리지 않고 호텔에서 대국을 치르기로 했다.

대회 초기엔 초읽기 제도가 없이 타임아웃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막판엔 시간에 쫓긴 대국자가 돌을 마구 날라 착점하는 황당한 해프닝이 자주 벌어졌었다. 이후 대국 룰을 바꿔 올해 대결에선 1인당 1시간, 30초 초읽기 3회 방식으로 진행된다. 단판 승부임에도 승자 6만 달러(약 6800만원), 패자에게도 4만 달러(4500만원)란 푸짐한 상금을 걸어놓아 행사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두 기사가 마지막으로 맞싸운 무대는 이 대결 20여일 전인 8월 24일 열렸던 제3회 몽백합배였다. 비록 16강전이었음에도 세계 바둑 팬의 시선이 집중돼 두 스타에 걸린 높은 상품성을 확인해 주었다. 이 대결서 박정환이 승리하면서 둘 간의 공식전 통산 전적은 박정환이 5승 4패로 한 발 앞서나가게 됐다. 두 기사는 지난 해 초 인터넷으로 기획됐던 10번기에서 쌍방 5승 5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바 있다. 이를 포함할 경우 박정환은 10승 9패로 앞선 상황. 하지만 이번 역시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호각의 대결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커제는 현재 몽백합배와 삼성화재배를 보유 중인 현역 2관왕이다. 연말에 결승전을 치를 신설 신아오배 결승에도 올라 있어 일부에선 그를 현역 세계 ‘2.5관왕’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따낸 메이저 세계 타이틀은 모두 4개. 두 차례 세계 정상을 밟아본 박정환에 비해 더 많은 실적을 쌓았다. 하지만 박정환은 최근 국내외 무대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19연승(9월 5일 현재)을 달리는 등 절호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다. 이번 커제와의 승부가 박정환의 향후 세계무대 활약상을 점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박정환은 오는 11월 중국 셰커 3단과 몽백합배 결승 진출을 다툰다.

커제 역시 절정이다. 중국 갑조리그를 비롯해 모든 기전에서 쾌조의 진군을 계속 중이다. 그는 지난 봄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서 0대3으로 완패 후 눈물을 흘려 후유증을 겪을 것으로 전망됐으나 오히려 22연승을 질주하는 등 더 강해진 모습울 과시해 왔다. 지난 8월 28일 중국기원에선 이번 남방장성배를 앞두고 역대 출전자, 관계자들까지 초청한 가운데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커제는 “박정환 9단과 대결하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 최선을 다 할 테니 지켜봐 달라”고 했다. 평소의 도발적 멘트 대신 교과서적 출사표를 던졌지만 오히려 필승의 의지가 읽힌다.

이번 대결에서 누가 백을 쥐게 되느냐 하는 것도 승부의 변수로 지목된다. 원래 중국 룰에선 흑이 선착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덤이 한-일 방식보다 1집이 많아 백이 그만큼 유리하다. 그런데다가 커제는 올해 백을 쥔 22국을 전승하는 등 백번에 특히 강한 기사로 유명하다. 이번 대결에 앞서 실시될 돌 가리기에서 박정환이 백을 잡게 되느냐의 여부도 또 다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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