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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의 바둑이야기
  리리옌이 이어간 바둑 異變史
 
▲ 미국바둑협회 프로기사인 '리리옌'


인간 세계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뚜렷이 앞서 있는 대표적인 분야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바둑일 것이다. 메이저급 국제 바둑대회에서 서구인들이 동양 강자를 누르는 이변은 좀체 발생하지 않는다. 바둑은 동양에서 발아(發芽)해 양육됐고 관리됐으며 서양은 그저 보급의 대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아주 드물긴 해도 서양권 기사들이 동양 스타들을 꺾어 화제의 중심에 서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지난 6월 19일 중국 베이징서 시작된 제3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본선전에서 모처럼 그런 사건이 터졌다. 북미 대표로 나온 캐나다 국적의 라이언 리(23) 초단이 64강전서 중국 정흥하오(程宏昊)에게 흑 반집 승을 거둘 때만 해도 모두들 그럴 수 있는 일이란 반응이었다. 사건은 이틀 뒤인 21일 32강전서 발생했다. 이 무명의 캐나다 청년이 거함 천야오예(陳耀燁)를 당당히 흑 2집 반 차로 제치고 16강에 오른 것이다.

천야오예는 메이저 세계기전인 바이링배의 현역 디펜딩 챔프이다. 기라성같은 중국 기사들 틈에서 랭킹 4위(당시)에 올라 있던 세계 최강자 중 한 명이다. 현역 세계 챔프가 무명의 서양 청년에게 패한 것은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틀 전 첫판서 젊은 영웅 양딩신(楊鼎新)을 가볍게 격파한 것을 볼 때 천야오예의 컨디션이 특별히 나빴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리리옌은 서양 혈통의 기사는 아니다. 캐나다 국적이긴 하지만 중국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리리옌(李立言). 6 세부터 8 세까지 베이징에서 바둑 영재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이후 부모의 생업에 맞춰 캐나다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프로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리리옌은 하지만 학업에 열중하는 가운데도 바둑을 멀리하지 않았다. 8살 때 캐나다에 정착한 이후엔 한때 중국 톱스타로 대접받던 류샤오광(劉邵光) 9단을 사사했다. 리리옌은 2014년 캐나다 오픈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 2015년 미국 플로리다 주 탬파에서 바둑 공부를 했다. 그 해 프로에 입단했다. 인터넷 대국 등을 통해 꾸준히 실전 감각을 유지한 결실이었다.

현재 그는 세계적 명문인 예일대학 대기과학 전공 석사 과정의 학생 신분이다. 천야오예를 격침한 뒤 “출전을 앞두고 나름대로 특별 훈련을 한 것이 도움됐다. 형세가 여의치 않았는데 끝내기 과정에서 운 좋게 뒤집은 것 같다. 동경하던 최고 기사를 꺾어 큰 영광”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번 대회 북미 대표로는 2명이 배정됐다. 나머지 1명 역시 중국인으로, 인밍밍(殷明明)이란 이름의 여성 초단 기사였다. 그녀는 64강전서 창하오(常昊)의 부인이자 중국의 중견 여성 기사인 장쉔(張璇)에게 백 불계패해 탈락했다. 리리옌은 천야오예를 물리치고 대국실에서 나오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던 인밍밍과 포옹했다. 둘은 갓 혼인 신고를 마친 신혼 부부 사이였다. 이번 신혼여행이 행운의 전조였다고 보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리리옌은 “그런 것 같다”며 파안대소했다.

세계 바둑 역사를 뒤돌아보면 한자(漢子) 아닌 순수 영문(英文) 이름의 기사가 동양 고단자를 꺾은 예가 드물지만 몇 차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아마추어 기사 페르난도 아길라(Fernando Aguilar)가 대표적인 존재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이변의 주인공이 되면서 남미 바둑의 대부로 자리 잡았다.

아길라는 2002년 도쿄서 열린 제1회 도요타덴소배 때 하세가와 스나오(長谷川直) 9단과 양자위안(楊嘉源) 9단을 연파하고 당당 세계 8강에 올라섰다. 8강전서 이창호에게 덜미를 잡혔지만 일본 팬들은 패한 두 자국 기사를 향해 ‘A급 전범(戰犯)’으로 규정하면서 “할복하라”는 극언까지 퍼부었다.

하세가와는 일본 최고타이틀인 기성전 최고기사 결정전에 2회나 올랐던 강자이고, 양자위안도 같은 대만 출신 기사 린하이펑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꼽히던 수재였다. 일본 바둑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여서 팬들은 무명의 서양 아마추어에게 연패한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최고수라 해도 일본 프로들에겐 2점으로도 판을 짤 수 없던 시절이었다.

아길라 이전에도 타라누 카탈린, 한스 피치, 제임스 커윈 등 동양 고수를 이겨본 영문(英文) 이름의 서양 프로들은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린 나이 때 일본에 유학을 와서 정식 입단 과정을 거쳐 프로가 된 사람들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 체계적 수업 없이 혼자 공부해 일가를 이룬 아길라와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한스 피치의 요다(依田紀基) 격파도 세계 바둑 이변사(異變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독일인인 피치는 일본 유학차 건너온 후 7년 간의 절차탁마 끝에 1997년에 프로 초단을 받았다. 입단 후 얼마 안 돼 피치는 제2회 LG배에 출전할 기회를 잡았고 요다 9단과 마주 앉았다. 한국서 열린 그 대국서 피치는 극적인 반집 승을 거두었다.

요다는 당시 삼성화재배를 제패하는 등 세계 톱기사로 군림 중인 강자였다. 그는 대국 전날 카지노에서 밤을 새우는 등 상대를 경적(輕敵)한 기미가 뚜렷했다. 그렇다곤 해도 풋내기 서양 기사의 요다 제압은 가위 파천황급 뉴스였다. 피치는 이후 바둑 보급을 위해 남미 과테말라를 방문했다가 무장 강도에게 총격을 받아 충격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알렉산더 디너스타인, 샤샤라는 애칭이 더 유명한 러시아 출신 기사도 바둑계 이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통산 6번 유럽 바둑챔피언을 지낸 그는 97년 한국에 유학, 번번이 입단에 실패하다가 한국기원의 배려로 2002년 특별 입단했다. 그리곤 2003년 6월 제8회 LG배 본선 1회전서 왕리청에게 백으로 1집 반을 이겼다. 왕리청은 같은 LG배 2회 대회 우승자였다.

리리옌의 경우는 서양 혈통은 아니지만 정통파 프로 또한 아니다. 그는 장래를 촉망받는 예비 학자이자 학생이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바둑 사관생도가 아니다. 그런 리리옌이 이번 몽백합배에서 현역 세계 챔프 천야오예를 눕힌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의 돌풍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몽백합배 32강전을 마친 직후 서울에서 2017 삼성화재배 예선이 열렸었다. 한 중 일 대만을 제외한 ‘바둑 변방국‘ 기사들만을 대상으로 대결을 붙여 본선 출전자 1명을 뽑는 월드조에도 8명이 나왔다. 여기에 리리옌(라이언 리)도 출전했다. 몽백합배 성적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캐나다 대표 리리옌의 월드조 우승을 예상했으나 그는 남아공 대표에 패해 본선 티켓 확보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리옌이 몽백합배에서 보여줄 다음 행보는 여전히 주목된다. 중국 12, 한국 3명만 합류하고 일본 대만 프로들이 전멸한 16강 무대에 오른 유일한 제3세계 대표이기 때문이다. 제3회 몽백합배 16강전은 8월 24일부터 속행된다. 리리옌이 싸울 16강전 상대는 올해 22세의 리쉬안하오(李軒豪) 6단. 중국 랭킹 22위에 올라있는 전도 유망한 강타자다.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그가 더 이상 진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절대 지존 천야오예를 잡은 기세라면 못 넘을 산도 없다. 리리옌이 이번에도 이겨 세계 8강 진출이란 새 이정표를 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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