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불공평한 것이 세상사다. 지난 해(2009년) 세계 바둑 최고스타들의 수입 비교를 보면서 느낀 감상이다. 동양 3개국 바둑관련 매체들이 집계, 발표한 수입 랭킹에 따르면 중국의 구리(古力)가 한국 돈으로 약 12억 원을 벌어 톱에 올랐다(환율 계산은 대략적인 것이다).

구리는 지난 해 LG배와 삼성화재배, 도요타덴소배 등 3개 메이저 기전을 휩쓸었던 기사다. 그 활약상을 볼 때 12억 원, 수입 1위는 결코 과한 게 아니다. 2009년에 관한 한 구리를 능가했던 기사는 지구촌에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2위 이하부터다. 2위엔 일본의 하네 나오키(羽根直樹)가 랭크됐다. 6400만 엔, 한화로는 약 7억 8000만 원을 벌었단다.

3위로 내려가서야 한국기사를 만난다. 최철한이다. 그는 작년에 7억 원 정도로 추산되는 수입을 올렸다. 그 뒤를 일본의 야마시타(山下敬吾)와 장쉬, 이야마 등이 4~6위로 따르고 있다. 야마시타와 장쉬는 한화로 6억 원대, 이야마는 5억 대였다. 7위 이창호는 5억 2000만 원, 8위엔 새로운 중국 톱 랭커로 떠오른 쿵제(孔杰)의 4억 6000만 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체 2위에 자리한 하네는 일본의 현역 4관왕이다. 본인방, NEC배, 아함동산배, 왕관을 꿰차고 있다. 최고 상금이 걸린 기성(棋聖)을 야마시타가 보유 중인데도 그 야마시타를 제치고 일본 최고수입을 올린 걸 보면 상당히 분전(奮戰)했음을 인정할 만 하다. 하지만 그가 기라성 같은 세계 고수들의 숲에서 2번 째로 높은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핵심은 현재 세계무대에서 하네가 차지하는 위상이다. 통합된 세계랭킹이 발표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실력랭킹’을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는 일. 다만 지난 해 국제대회 성적으로 ‘국제시장(市場)’ 내에서의 그의 위치를 가늠해 볼 뿐이다.

그는 4월 자국에서 벌어진 제22회 후지쓰배에 나가 1회전서 미국 아마추어 선수에게 1승을 거두었을 뿐 곧바로 탈락했다. 14회 LG배에선 한국 박정상에게 1승을 거두었으나 역시 2회전 고비를 넘어서지 못했다. 뒤이어 벌어진 삼성화재배에선 아예 1승도 못 따냈다. 연말 거행된 일-중 아함동산배 우승자끼리의 대결서도 중국 신예 쑨텅위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2009 상금랭킹 3위 이하 8위까지를 차지한 기사들의 국제무대 성적을 살펴보자. 3위 최철한은 거액의 상금으로 유명한 대회인 잉씨배 우승자다. 잉씨배 우승상금만 40만 달러, 거의 5억 원에 육박하는 거금을 받았다. 잉씨배를 제패하고도 세계 상금랭킹 3위에 머물렀다면 그는 다른 국내외 기전에선 완전 파리(?)를 날렸던 모양이다. 과연 그랬을까.

최철한은 지난 해 LG배에서 8강, 삼성화재배서도 16강까지 진출했다. 국내 타이틀(맥심배)도 땄고, 중국리그에 나가 9승(3패)이나 올렸으며, 국내 페어 대회까지도 접수했다. 잡수입(?)이 쏠쏠했었다는 뜻이다. 이러고도 하네에게 8000만 원 가까이 밀렸다. 한국 일본 간 상금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이 간다.

하네와 최철한은 통산 네 번 맞붙어 최철한이 네 번을 모두 이겼다. 이창호의 대 하네 통산전적은 4승 1패이다. 이창호보다 더 많이 번 야마시타, 장쉬, 이야마는 이창호에게 각각 통산 6연패, 2승 5패, 1패로 밀리고 있다.

일본 기사들의 수입을 좀 더 살펴보자. 일본의 3개 여성 타이틀을 통일한 시에이민은 지난 해 약 1500만 엔, 우리 돈 2억 원 가깝게 벌었다. 그녀는 지난 해 삼성화재배 통합예선 통합예선 여자부에 출전, 3회전서 한국 여류 3관왕 루이나이웨이에 막혀 탈락했다. 2008년 같은 대회에선 박지은에게 패해 1회전서 보따리를 쌌다. 루이나이웨이의 작년 수입은 대략 3200만 원, 박지은의 그것은 1600만 원 선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엔 양국 신예를 비교해 보자. 지난 해 일본 최고의 ‘새 얼굴’은 리이시우(李沂修)였다. 88년 생 대만 출신 기사인 그는 작년 일본 신인왕을 땄고 입단 5년 만에 7단에 오르는 등 욱일승천의 기세를 타고 있다.

그 리이시우의 작년 수입은 1100만 엔 선으로 일본 13위에 랭크됐다. 우리 돈 약 1억 5000만 원이다. 이 정도 액수면 한국의 2009년 수입 6위(1억 4200만 원)인 김지석보다 약간 많다. 김지석과 리이시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다들 눈치챘을 테니까 긴 말 안 쓰겠다.

사실 2009년 세계수입 랭킹 차이는 그나마 약소한 편에 속한다. 2007년과 2008년 연속 일본 수입 1위였던 장쉬는 2년 간 각각 1억 1600 여 만 엔, 1억 1300 여 만 엔을 챙겼다. 현재 환율 기준으로 각각 14억 원이 넘는 액수다. 한국 역대 최고기록이라야 이창호가 2001년 기록한 10억 1900만 원이다. 국내 프로가 연간상금 10억 원을 넘긴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일본이 국제대회서 바닥을 긁을 때마다 나오는 패인 분석에 꼭 포함되는 것이 하나 있다. “일본 국내대회 상금이 국제대회보다 높다 보니 국내전에 더 치중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실제로 최고기전인 기성전서 우승하면 4200만 엔, 우리 돈 5억 4000만 원이다. 상금에 관한 한 잉씨배를 넘는 세계 최고의 타이틀전이다.

‘기름진’ 일본 바둑계가 부러워 투정 부리자는 게 아니다. 사실 오늘날 세계바둑이 이만큼이라도 자리잡은 공로 절반 이상은 일본에 돌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100년 가까이 바둑에 무수히 투자했고 지원했다. 하지만 공로와 실력, 실력과 수입액은 모두 엄연한 별개 개념이다. 상금이 실력의 척도인 세상에 이 같은 세계바둑의 상금 메커니즘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과거 폐쇄사회 시절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광속도로 전파되는 요즘은 외국이 아니라 이웃집 같은 시대가 됐다. 박찬호 추신수는 미국 메이저리그급 실력을 인정받아 본바닥에 나가서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는다. 박지성 박주영 이청룡 등도 마찬가지다.

핸드볼 하키 등 비인기 종목 선수들도 외국에 나갈 경우 그에 맞는 ‘시세’란 게 있다. 한국에 용병으로 건너와 뛰고 있는 축구 야구 농구의 외국인 선수들 역시 세계 표준에 따라 몸값이 매겨진다. 모든 물건의 가격은 똑같은 기준으로 높이를 측정하는 해발(海拔) 개념으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독 일본 바둑만 따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물가(物價) 수준을 얘기하기도 한다. 환율로 환산한 액수가 곧 그 나라의 구매력은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환율은 세계의 벽을 뚫는 표준화의 수단이다. 지역별 구매력이란 것 자체가 들쑥날쑥한 것이고, 그런 것까지 감안한다면 도대체 국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진다.

‘구리 수입 12억 원’도 실체를 들여다 보면 좀 다르다. 중국은 바둑을 국가가 관리하는 대신 국제대회 상금의 경우 아직도 32%나 국가에서 뗀다. 따라서 구리가 실제 손에 쥔 액수는 훨씬 줄어드는 셈. 그렇다곤 해도 중국기사들의 수입액 신장(伸張)은 괄목할 만 한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기사가 명목 상으로라도 세계최고 수입을 올린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중국 국내기전 상금도 경제 성장에 맞춰 비약적으로 뛰고 있다.

일본이 세계 시세를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자국 기사들을 보호하고 있는 현상은 참 생소하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바둑 사랑에 숙연해지는 한 편으론 일본인 특유의 실용주의, 현실주의와 배치되는 것 같아 어리둥절해 진다. 역설이지만 일본의 이 같은 자세는 상업화, 세속화 분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바둑에게 그나마 최소한의 위엄과 전통을 지켜내는 보루 역할을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히는 우칭위엔(吳凊源)이 현대 최강그룹으로 꼽히는 이창호 이세돌 구리 등과 맞대결한다면 어떤 스코어가 나올까. 그의 전성시대 몸값을 요즘의 ‘시세’로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로키 마르시아노, 조 루이스, 조지 포먼과 타이슨 등 시대를 달리했던 당대 최고 주먹들을 놓고도 숱한 ‘가상 대결’이 펼쳐졌지만 그들의 진정한 ‘시가(時價)’는 아무도 산정해내지 못했다. 인간의 능력과 수입 간의 영원한 괴리(乖離),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온갖 부조리한 단면(斷面)의 일부를 정직하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