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LG배의 계절이 왔다. 11월 9일 8강전, 11일 준결승전이 제주도에서 벌어진다. 우승상금 2억 5000만원과 함께 세계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아온 LG배의 올해 임자는 누가될지 곧 윤곽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8강 대진을 보면 한국 이창호 대 중국 추쥔, 한국 박영훈 대 중국 후야오위, 한국 최철한 대 중국 쿵제까지는 한-중 전이고 나머지 한 판은 중국의 구리와 박문요 간 ‘집안 대결’이다. 한국 3명과 중국 5명이므로 양국의 우승 확률도 그 정도 비율이다. 이번에도 일본기사는 도중에 모두 탈락했다.
한국 주최의 홈 대회임에도 8강에 중국기사가 더 많이 포진하고 있음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요즘 거의 모든 국제대회 때마다 나오는 보편적 현상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꽤 고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앞서 벌어졌던 삼성화재배도 8강전은 LG배와 똑같은 비율로 압축됐고 4강전은 중국 3명 대 한국 1명으로 좁혀졌었다.

2009년 한 해 한 중 양국 기사 간 맞대결 성적을 보아도 중국 쪽 승률이 월등하다. 10월 말 현재 총 372국을 겨뤄 한국은 128승, 34.4%의 승률을 기록해 244승, 승률 65.6%를 마크한 중국에 크게 뒤졌다. 세 판을 두면 한국은 약 한 판 밖에 못 이겼다는 계산이다.
물론 이 전적을 양국 바둑실력의 현 주소라고 볼 수는 없다. LG배나 삼성화재배, 비씨카드배 등 한국주최 국제기전들은 통합예선을 치른다. 이 통합예선 때 중국은 정예멤버를 골라 파견하는 반면, 한국은 거의 모든 기사가 다 출전하기 때문에 승률이 큰 차를 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통합예선을 통과한 기사들 간의 본선 이상에서의 맞대결성적에서도 중국은 약 6대4의 비율(중국 65승 44패, 59.6%)로 앞서있다. 이 대목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의 열세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세계 타이틀 판도는 어떨까. 현재 거행 중인 8개의 국제 개인전에서 중국이 5개, 한국은 3개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LG배 도요타배 비씨카드배 등 3관왕인 중국 구리는 부동의 1인자로 군림 중이다. 그 밖에 춘란배(창하오)와 TV아시아선수권(쿵제)도 중국에 점령당한 상황. 한국은 이세돌이 삼성화재배, 최철한이 잉씨배, 강동윤이 후지쓰배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세돌은 현재 휴직 중으로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삼성화재배 패권은 올해 안에 주인이 바뀐다. 4강 분포(1대3)만 놓고 보면 이 대회 우승이 중국으로 넘어갈 공산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그 경우 중국 한국의 타이틀 점유 수는 6대2로 벌어진다. 2003년 8월부터 약 3년 간 한국이 국제대회 23연속 우승을 질주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기 막힌 반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9일부터 벌어지는 제14회 LG배 준준결승, 준결승전은 한국 바둑으로선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일전이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원할 우국지사(?)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럴까. 과연 이창호 박영훈 최철한은 바둑계의 안중근, 바둑계의 이순신이 될 수 있을까.



역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기사는 이창호다. 그는 지금까지 총 23회(비공식 2회 포함) 세계정상에 섰던 세계 최다 우승기록 보유자다. 이런 이창호가 2006년 이후 4년째 군소 세계기전(중환배)서 단 한 차례 세계 정상을 밟았을 뿐이란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같은 기간 그는 무려 여덟 번이나 국제대회 ‘은메달’에 머물렀다.
이창호가 더 이상의 준우승 징크스를 떨치고 이번 LG배를 품에 안기 위해선 우선 8강전 상대 추쥔을 꺾어야 한다. 추쥔은 중국랭킹 14위로 창기배라는 이름의 자국 타이틀도 보유중인 기사. 올해 삼성화재배서도 4강에 안착하는 등 만만치 않은 상승세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창호와의 역대 전적에선 두 판을 겨뤄 아직 ‘판맛’을 보지 못했다.
최철한은 지난 봄 대망의 잉씨배를 품에 안으면서 상당한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국내 랭킹도 10월 기준 2위까지 올랐다. 특히 개인적으로 부진했던 LG배에선 모처럼 8강에 올라 첫 우승을 노릴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8강전 상대인 쿵제가 올해 TV아시아선수권을 제패하는 등 승승장구 중이라지만 5대5의 승부가 예상된다. 쿵제의 중국 랭킹 역시 2위. 상대전적에선 쿵제가 2연승 후 최철한이 가장 최근 맞대결(2007년 제20회 후지쓰배) 때 설욕, 2대1로 쿵제가 앞서있다.
박영훈은 2007년 후지쓰배 제패 이후 2년 반 만에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지난 해 LG배 준결승서 이세돌에 막혀 결승행이 좌절됐던 아픔을 씻을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다. 후야오위는 2007년 제11회 LG배 때 준우승을 차지한 ‘친LG배’ 기사. 박영훈은 한국 3위, 후야오위는 중국 10위에 올라있다. 상대 전적은 후야오위가 2승 1패로 우세하지만 박영훈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보인다.

▲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 모습. 이세돌 9단vs구리 9단.
한국 바둑이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스타를 보유했었기 때문.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이 번갈아 가며 우승, ‘최강 한국’의 전통을 이어나갔었다. 그러나 이세돌의 휴직, 이창호의 잇단 준우승 징크스 속에서 현재 ‘최강’의 꼬리표는 중국 구리에게로 넘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바둑은 새로운 ‘구세주’의 출현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이번 LG배에 출전하는 3각편대 중에서 그 주역이 나와야 한다.
10월 랭킹 기준 1위 이세돌은 빠졌지만 최철한 박영훈 이창호의 2~4위가 일제히 출격해 믿음직하다. 국제 바둑무대에서 요즘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구리가 자국 기사(박문요)와 맞붙게 된 것도 좋은 징조로 보인다. 구리와 박문요 간의 국내대회 기록은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국제기전만 놓고 보면 구리가 3전 전승을 마크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 LG배는 세계를 리드하는 한국 바둑의 요람이자 근거지 같은 기전이었다. 작년까지 13년의 연륜을 쌓는 동안 절반이 넘는 7번 한국 기사가 정상에 올라섰다. 한국기사는 LG배를 통해 한국바둑을 끌어올렸고, LG배는 한국기사들에 힘입어 성가를 높여왔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1회부터 8회까지 8년 간 외국기사의 우승은 단 2번에 그칠 만큼 배타적인 기전이 LG배였다.
그렇던 LG배가 2005년 제9회 대회부터는 한국기사에게 인색한 무대로 변했다. 작년까지 5년 동안 이세돌 단 1명만 정상을 밟아봤을 뿐이다. 한국바둑의 위기론이 운위되는 시점에서 과연 LG배는 한국 기사에게 기사회생의 전기(轉機)를 제공해 줄까. 제공한다면 그 주역은 누구에게 맡길까. 9일 시작되는 준준결승과 준결승전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