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는 바둑계에서 여전히 신화(神話)적 존재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엔 안타까운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바로 ‘연속 준우승’이란 이름의 망령이다. 공식전만 생애 통산 135회에 걸쳐 우승을 휩쓴 이창호에게 준우승 망령이라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위화감 주는 그림이 전개되고 있다.

프로기사 생활 20년 남짓에 135회 우승이라면 1년 평균 7회 정도에 해당한다. 그의 스승 조훈현이 157회 우승으로 이 부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조훈현의 프로기사 경력은 1972년 도일 유학서 귀국한 이후만 따지더라도 37년이나 된다. 1년 평균 우승 회수가 5회가 안 돼 제자를 못 당한다는 얘기다.

이창호의 ‘준우승 증후군’은 특히 국제 기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2005년 3월 제5회 춘란배 결승서 중국 저우허양을 2대1로 눕히고 우승한 이후 만 4년 반 가깝게 계속돼 온 현상이다. 이 기간 동안 이창호는 모두 아홉 번의 세계 결승전에 나가 1승 8패를 기록했다. 한 차례 우승은 2007년 8월 제3회 중환배 때 박정상을 상대로 거둔 것이다.

하지만 중환배는 메이저급 기전이 아니다. 더욱이 글로벌 경제침체의 여파로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중환배를 뺀다면 이창호는 번듯한 세계기전에서 8번의 연속 준우승 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중도 탈락은 할지언정, 결승에까지 올라 패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결승 불패’로 통했던 그 이창호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창호의 8연속 국제대회 준우승의 결승전 상대를 보면 중국기사 4명, 한국프로 3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기사 가운데선 뤄시허 왕시 창하오 구리가, 한국 기사론 박영훈 최철한 강동윤이 역모(?)에 가담했다. 이 중 창하오는 2007년 제11회 삼성화재배, 2009년 제7회 춘란배 등에서 이창호를 각각 2대0으로 완봉하고 우승, 이창호를 두 번 울린 유일한 존재로 기록됐다.

그런데 창하오라면 한 때 이창호에 의해 성장점이 마비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만큼 맥을 못 추던 기사였다. 2004년까지 둘 간의 전적은 무려 19승 4패였고 그 중엔 이창호의 12연승이 포함됐었다. 76년 생으로 이창호보다 한 살 적은 창하오는 “적어도 백 년 안에 이창호를 꺾을 인재는 지구상에 없다”고 말했을 만큼 완벽히 백기(?)를 들었던 기사였다.

그 창하오가 그 이후부터 이창호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따지면 6승 2패, 가장 최근의 6국만 계산하면 5승 1패로 창하오가 우세하다. 둘 간의 통산전적도 이창호의 21승10패로 바짝 좁혀졌다. 바둑계에서 좀체 볼 수 없었던 기묘한 승패곡선이 둘 간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97년 한-중 천원전 때 첫 대면한 이창호와 창하오는 국적과 승부를 떠나 13년째 진한 우정을 나눠오고 있다. 각박한 승부세계지만 두 사람은 모두 만인이 인정하는 ‘젠틀맨’들이다. 승패 결과에 구애됨 없이 진심으로 교유할 수 있는 성정의 소유자들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그들의 기묘한 승패사이클을 설명할 만 한 수단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창호가 현재 보유 중인 타이틀은 전자랜드배와 바둑왕전 2개. 현재 중단 상태인 왕위전까지 포함하면 3관왕이지만 국제무대에선 무관(無冠)이다. 지난 8월 19일 끝난 한국물가정보배에서 김지석에게 완봉패 당하면서 그는 영토 확장에도 실패하고 준우승 꼬리표만 하나 더 늘렸다.


최근 4년 여 동안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창호의 ‘준우승 증후군’은 다음 3가지로 분석,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이창호는 여전히 건재하다. 준우승은 결승까지 올라야만 가능한 수확이므로, 꾸준히 결승 무대를 밟아왔다는 건 그의 기량이 녹슬지 않았다는 증거다.

둘째, 그렇긴 해도 마지막 결승전 고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 것은 전성기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증거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우승 결정력이야 말로 승부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세계 정상을 다투는 최고레벨의 기사층이 엄청나게 두터워졌다는 방증이다. 한국과 중국에 산재돼 있는 효웅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 세계 우승의 난이도도 그만큼 높아졌다. 몇 명의 고비만 넘기면 정상에 이르던 예전의 그 무림(武林)이 아닌 것이다.

이창호는 몇 년 전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었다. 실제로 대국 도중 실신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적이 있었다. 몸에 열기가 많은 체질로, 대국장의 뜨거운 조명에 약해 자주 얼굴이 상기되곤 했다. 어린 시절 우량아 출신이어서 체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창호는 20대 후반부터 “체력이 딸린다”고 실토하곤 했었다.

체력 단련에 주력하면서 이제 이창호에게 건강 이상설은 꼬리를 감췄다. 그는 요즘도 꾸준히 헬스장에 다닌다. 혈색도 좋아졌고 표정도 꽤 밝아진 느낌을 준다. 많이 마시던 것은 아니었지만 술도 거의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창호의 연속 준우승 현상을 놓고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심리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8연속 준우승에 머무는 동안 거의 완승구도를 만들어놓고도 역전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것은 기량 탓이라기 보다는 잇단 준우승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압박감, 부담감의 소산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한편에선 그가 이미 적지 않은 ‘바둑 연령’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창호는 11살 때 입단해 14살 때부터 정상권 프로로 군림해 왔다. 그는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초1류 승부사로서 자신에게 쏠리는 호기심 넘친 시선과 기대에 시달렸다. 나이 든 선배들 틈에서 대국태도에 대한 부담감, 사회적 관심에 따른 각종 행사 초청, 팬들의 맹목적 기대가 초래하는 승패 스트레스 등이 쌓이고 쌓여 피로감을 느낄 때도 됐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제 아무리 책만 파는 공부벌레라도 20대 초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사회적 커넥션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각종 연줄로 얽혀 들면서 주의가 분산되게 마련이다. 이창호라 해서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느덧 노총각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면서 결혼과 관련된 안팎의 스트레스도 상당히 쌓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창호의 국제대회 준우승 행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세계기전을 하나도 빠짐없이 섭렵한 소위 그랜드 슬래머는 지구상에서 오직 이창호 1명뿐이다. 몇 가지 악재가 중첩돼 잠시 우승과의 인연이 몇 번 멀어졌지만 아직 쇠퇴를 운위하기엔 그가 이룩해놓은 업적이 너무 휘황하다.

이창호가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준우승 신드롬에서 벗어나 보란 듯 세계 정상으로 되돌아 올는지가 바둑계의 최대 초점으로 등장했다. 그는 현재 LG배 8강에, 삼성화재배에선 16강에 진출해 있다. 다른 국제기전들은 하반기 이후 새로운 출발점에 돌입한다. 이창호 팬들은 일단 LG배를 그 무대로 기대해 볼 일이다. 그리고 이창호가 패권 장악에 성공한다면 그 시기는 내년 2월 무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