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써놓고 보니 약간 섬뜩하다. ‘칼을 겨눈다’는 건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고, 바둑의 공식전은 그만큼 엄숙하고 비정하다는 뜻이다. 평소 절친한 동료나 친구 사이라 해도 일단 시합에만 들어가면 찬바람이 이는 것이 프로기사들의 공식전이다. 한 판 바둑에 부와 명예와 자존심이 몽땅 걸려있는 판이니 양보는커녕 죽기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중순엔 형제간인 안형준 2단과 안성준 초단이 맞붙었다. 국수전 예선 토너먼트서 나란히 이겨 올라가다 준결승서 맞닥뜨린 것이다. 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옆에 붙어 다닐 만큼 우애 깊은 형제지만 이날 대국은 서릿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고 결국 형이 승리했다. 형제 입단으로 화제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이기도록 전력투구 하겠다” “형이 워낙 세서 두렵긴 하지만 그냥 물러나진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대로였다.
국내 바둑계에서 그 동안 배출된 형제 커플은 남매를 포함해 모두 여섯 쌍. 그 중 현재까지 공식 맞대결이 이뤄졌던 커플은 모두 4쌍으로 총 10판이 벌어졌다. 종합성적은 사이 좋게도 쌍방 5승 5패다. 가장 유명한 형제커플로는 이상훈 7단과 이세돌 9단이 꼽힌다. 둘은 신예기전 타이틀을 놓고 결승서 격돌하는 등 총 9판이나 겨뤄 동생인 이세돌이 통산 5승 4패로 리드하고 있다.
이밖에 김수영-김수장 형제는 동생이 2승, 박승철-박승현 형제는 형이 2승을 기록 중이다. 갓 입단한 류동완-류민형 형제와 김대희-김수진 남매는 아직 한 판도 공식전에서 맞붙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면 가족-친척 간 프로기사들은 정말로 상대 가슴에 칼을 겨눈다는 기분으로 정면승부를 할까. 때와 장소, 그리고 정황에 따라 다르다는 게 정답이다. 가끔은 다소 의심스런(?) 대국도 없지 않다. 이번에 맞대결한 안형준-성준 형제처럼 20살 전후 젊은이들은 혈기 때문이라도 정면 승부를 불사한다. 그러나 부부나 부자(父子) 대국일 경우 반외(盤外)변수가 웬만큼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의 관측이다.
2002년 말. 당시만 해도 국내 유일의 부부기사였던 장주주와 루이나이웨이가 제4기 맥심배 패권을 놓고 마주 앉았다. 9단들에게만 출전이 허용되는 속기(速棋)대회에 이들 이방인 커플이 우승을 다툰다는 자체가 큰 뉴스였다. 결과는 남편 장주주가 2대0의 전적으로 우승했다.
과연 루이는 최선을 다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바둑계 관계자들은 ‘아내보다 못한 남편’으로 꼽히던 남편 장주주의 기를 살려준 혐의가 보인다고 쑥덕거렸다. 어차피 우승상금이 주머니로 들어가던, 쌈지로 들어가던 똑같은 것 아니냐면서. 이들은 그 후 약 7년 만인 최근 지지옥션배라는 성(性) 대결장에서 다시 만나 이번엔 루이가 승리했다.

장주주-루이 이후 국내에선 3쌍의 부부기사가 더 탄생했다. 그런데 이들의 경우엔 대부분 단위도 높고 기사생활도 선배인 남편 쪽이 우세한 전적을 작성했다. 이상훈(9단)은 하호정 3단에게 현재까지 3승 무패로, 김영삼 8단은 현미진 4단에게 2승 무패로 각각 앞서있다. 2005년 한국의 권효진과, 그녀와 결혼해 한국서 활동 중인 중국 출신 위에량 간에는 아직 한 판의 부부대결도 이뤄지지 않았다.
부자(父子)나 부녀(父女) 간은 어떨까. 거의 일방적으로 아들(또는 딸)의 승률이 높다. 이것은 부정(父情)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체 생리학적으로 한 세대 아래 젊은 쪽이 훨씬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년에 날리던 아버지도 젊은 아들 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는 것. 바둑도 이런 면에서 보면 영락없는 스포츠다.
우리바둑 여명기에 조남철에 버금갈 만큼 강자로 꼽혔던 김명환은 아들 김재구에게 5전 전패를 기록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몇 년 전 일본에선 당시 1인자로 군림 중이던 하네 나오키(羽根直樹)가 아버지 하네 야스마사(羽根泰正)을 ‘사정없이’ 꺾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 하네 역시 왕년에 다섯 차례나 타이틀을 땄을 만큼 강완을 자랑했던 스타였으나 아들을 이기지 못했다.

국내 부녀 프로기사론 권갑룡-효진 한 커플만 존재한다. 둘은 아직 한 차례도 공식전서 맞부딪치지 않았다. 권효진의 남편인 중국인 위에량과 권갑룡 간에도 아직 대국이 없었던 상황. 그렇다면 이들 장인과 사위가 언젠가 맞설 경우, 딸이자 아내인 권효진은 누구 편을 들까? 권효진 5단은 이 질문에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와 남편이 종종 다른 편으로 나뉘어 축구 시합을 펼치곤 한다. 아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남편을 응원하게 되더라.”
일본의 여류스타 고바야시 이즈미(小林泉美) 6단의 처신은 좀 더 능란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왕년에 일본 바둑계를 쥐고 흔들었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이고, 남편은 현역 일본 1인자 장쉬다. 둘이 마주 싸울 경우 누구를 응원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이즈미는 “아빠와 남편이 각각 딸과 아내가 각각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행동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친인척 관계는 형제, 부자, 부녀 외에 또 있다. 얼마 전 은퇴한 윤기현 9단과 현역 활동중인 이상철 8단은 동서 관계. 둘은 총 10국에 걸쳐 칼을 섞어 손위 동서인 윤기현이 6승 4패로 앞섰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은 재일 기사 조상연 및 조치훈에겐 삼촌이다. 조상연-조치훈은 또 최규병-이성재와는 사촌 사이. 하지만 이들 세계적 바둑 가문의 구성원들 간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판의 동족상잔(?)도 벌어지지 않았다.
김효정 2단의 언니 김현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3단으로 활동 중이다. 김현정은 나카네(中根直行) 8단의 아내이기도 하다. 이들 집안의 자매 대결, 부부 대결, 형부-처제 대결 역시 아직 성사된 판이 없다.
갈 수록 프로기사 수가 늘어나면서 형제나 부자, 부부 대국이 마주칠 산술적 확률도 그만큼 낮아져가고 있다. 게다가 연령대 별, 성별로 구분해 치르는 대회가 늘어나고 있어 친족간에 공식대국이 이뤄질 기회가 더욱 줄어드는 추세다.
가족, 친족 대국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대회 주최측은 얼마 전까지 예선전 같은 경우 가능한 한 이들을 다른 조에 배치하는 배려를 해왔다. 하지만 이들 간의 맞대결은 바둑계로선 흥행에 큰 도움이 되는 카드임에 분명하다. 자체로 화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인위적으로 막을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안형준-성준 간의 최근 형제대결 때 조선일보가 뽑은 기사 제목은 ‘피를 나눈 형제의 피 터지는 한 판’이었다. 팬들로선 재미있는 승부 아닌가.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꺾는 장면도 많은 뒷 얘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아들 녀석이 요즘 성적이 좋다고 우쭐대는데 내가 한 번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나서는 아버지 프로도 멋지다. 프로기사들에게 이런 흥행감각이 있어야 바둑계가 발전한다.
스포츠 등 다른 승부세계에선 가족대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성별의 다름, 연령의 고하에 관계없이 승부가 가능하다는 건 바둑만이 누리는 큰 장점이다. 가족간 승부카드가 앞으로 자주 등장해 풍성한 화제를 뿌림으로써 바둑계 발전의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