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징크스가 있다. 아침 출근 때 어느 골목을 택해 나가면 그날 운수가 좋다던가, 아침에 면도를 했다간 중요한 승부를 반드시 패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거액의 로또가 터졌을 때 당첨자 신원은 숨기면서도 구입한 곳을 애써 부각시키는 것도 구입자들의 이런 징크스 습관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승부를 겨루는 바둑에도 비슷한 게 있다. 기사들 개인의 독특한 미신은 별개로 하고, 어떤 기사가 어떤 대회에서 강하다는 통계가 자주 나온다. 예전에 서봉수는 유난히 명인전에서 맹활약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명인’으로 불리고 있다. 김희중은 ‘기왕전의 사나이’였고, 강철민은 최고위전을 매년 자기 집처럼 들락거렸다.
국제 바둑대회 역시 이런 징크스가 피해가지 않는다. 국가별로 특히 강했던 대회, 유난히 약세를 보여온 대회가 있다는 얘기다. 우연의 일치라고만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경우도 꽤 발생한다.
LG배에선 한 동안 “결승전은 같은 혈족(血族)끼리 치른다”는 징크스가 퍼졌었다. 2001년 제5회 대회 때 이창호와 이세돌이 패권을 다툰 이후, 2008년 이세돌-한상훈 간 결승전까지 8년 연속 그런 현상이 빚어졌다. 대만의 1인자 저우쥔쉰, 일본 바둑을 정복한 장쉬가 모두 중국인 혈통이기 때문. 이 같은 현상은 올해 13회 대회 때 구리와 이세돌이 격돌하면서 일단 주춤해졌다.
삼성화재배는 결승전이 반드시 한국 대 외국기사 간에 치러지는 전통(?)이 면면히 내려왔었다. 2008년 12회 대회(이세돌-박영훈) 때의 단 한 차례 예외를 제외하면 13회까지 12년 간 이 징크스는 철석같이 유지됐었다. 12년 동안 한-중 결승전은 7회, 한-일 간 결승은 5회 등장했으며 중-일 결승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잉씨배 징크스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한국의 최고수들이 매 4년마다 왕권을 계승해왔다는 징크스 말이다. 사실상의 첫 세계제전이었던 이 대회서 조훈현이 89년 첫 우승을, 서봉수와 유창혁 이창호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얼핏 우연한 결과로 보이지만 특정 국가의 1인자가 대를 이어 우승을 승계해 간다는 건 확률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잉씨배에서도 예외가 만들어졌다. 4년 전 벌어진 제5회 대회서 중국 창하오가 한국 최철한을 3대1로 누르고 ‘비 한국기사’로는 최초의 잉씨배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딱 한 번만 쉬고 한국은 다시 6회 잉씨배 우승을 예약해 놓은 상태. 4월 하순 벌어지는 결승전 최종 무대 진출기사가 이창호와 최철한이기 때문이다. 만약 최철한이 이긴다면 4회대회 때까지 이어졌던 한국 전용, 선후배간의 승계전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셈이 된다.

후지쓰배를 살펴볼 차례다. 이 대회엔 언젠가부터 ‘한국 프로들의 거점’이란 별명이 붙었다. 지난 해까지 21년간 대회를 치러오면서 한국이 13회를 우승했다. 우승 점유율이 잉씨배에 버금간다. 주최국인 일본은 숱한 어드밴티지를 누리면서도 불과 6회 우승에 그쳤다. 그나마 대회 초창기인 80년대 말 5연패(連覇)를 제외하면 거의 ‘남 좋은 일’만 해 왔다는 결론이다.
한국은 특히 98년 제11회 대회부터 2007년 제20회 대회까지 10년 연속 후지쓰배에 태극기를 꽂았다. 세계 바둑사상 전무후무한 장기집권 기록이다. 이 연패(連覇) 기록을 깬 기사가 중국의 구리. 중국은 구리의 정상 등극으로 역대 후지쓰배서 두 번째 패권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었다.
하지만 그 구리는 4월 중순 시작된 제22회 후지쓰배에서 초반 탈락했다. 첫 라운드를 끝낸 올해 후지쓰배 중간 성적을 보면 한국이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강동윤 등 4명을 8강에 올려놓았다.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다시 후지쓰배의 등기 이전(?) 채비를 마쳤다. 징크스 재현이 유력해졌다는 의미. 중국은 창하오와 박문요, 일본은 야마시타와 고노린 등 각 2명씩을 8강에 올렸다.

주최국이 유난히 고전하는 징크스는 초기 춘란배에도 적용됐었다. 중국 주최의 춘란배는 99년 대회 출범 후 5회 대회를 마칠 때까지 중국 기사가 우승 컵을 만져보지 못했던 것. 그 때까지 한국기사 4명, 일본기사 1명이 춘란배의 주인이 됐었다.
그러나 최근 4, 5년 동안 춘란배는 중국 기사들의 ‘아지트’로 면모를 일신했다. 2003년 제5회 대회 이후 벌어진 세 차례 춘란배의 4강 12자리 중 중국이 무려 10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바뀌었다. 이 새로운 징크스의 절정은 구리가 장식했다. 2007년 제6회 대회 때 같은 중국의 창하오와 결승을 펼쳐 2대0으로 승리, 처음 우승자 명부에 이름을 등재했다.

역시 일본이 주최하는 도요타덴소배도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순수 일본혈통 기사 중엔 단 1명도 결승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2007년 제3회 대회 때 장쉬가 이세돌에게 1대2로 패해 준우승한 적이 있긴 한데, 장쉬는 일본기원 소속이긴 해도 대만에서 유학와 아직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4회까지 대회를 치른 결과 한국이 3회, 중국이 1회 도요타덴소배를 차지했다. 일본바둑 영광 재현을 위해 의욕적으로 창설된 대회여서, 그들로선 대회 지속 여부를 고심해야 할 만큼 참담한 결과란 후문이 들린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일본이 동양 3국 가운데 실력 최약체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일본이 3국 중 가장 좋은 전적을 유지하고 있는 기전이 있다면 징크스의 범주에 넣을 만 하지 않을까. 속기(速棋) 국제기전인 TV아시아선수권전이 그것이다.
지난 해까지 19회를 치르는 동안 일본은 총 9회 우승컵을 가져갔다. 6회 우승의 한국, 4회 제패의 중국을 압도하는 성적이다. 일본의 이 같은 호성적은 상대적으로 일본 바둑이 강세였던 대회 초창기 6연속 우승(89년 1회~94년 6회)에 힘입은 바 컸다. 이 후에도 일본은 요다 장쉬 등의 분전으로 다른 국제대회에 비하면 TV아시아선수권서 확실히 강미를 보여주었다.

단위와 관련된 징크스도 있다. 삼성화재배의 경우 13기를 치르는 사이 9단이 아닌 기사는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 13년 간 우승자 전원이 9단이었다는 얘기다. 준우승자 명단을 보면 중간 중간에 박영훈 4단, 왕시 5단, 쿵제 7단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이 아직 9단이 아니어서 정상 자리를 점지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에도 묘한 징크스가 작용했었다. 동양 3국이 각 5명씩 출전해 연승가 계속 두는 이 방식은 최대 14국, 최소 9국으로 끝나게 돼있다. 농심배의 전신인 제5회 진로배(97년) 때 서봉수가 9연승했을 때는 11국으로 대회가 종료됐었다.
하지만 농심배는 99년 출범 첫 회부터 2007년 8회 대회까지 8년 간 연속 최다 가능 숫자인 14국을 채웠다. 한국 중국 일본 3강의 실력이 그만큼 백중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아무튼 익사이팅한 결과여서 주최측은 최고의 흥행을 누렸다. 출전기사 15명 중 ‘역할’ 부담 없이 노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계산이기 때문이다.
2008년 제9회와 2009년 제10회 농심배가 연속 13국으로 막을 내린 것. 9회 때는 구리가 한 판도 안 둔 채 중국이 첫 우승을 가져갔고, 올해 초 10회 대회에선 이세돌이 중국 팀 최종 주자 구리를 눌러 ‘큰 형님’ 이창호를 편히 쉬게 하고 우승컵을 한국에 가져왔다.

이상 각종 국제기전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징크스들을 살펴 보았다. 각 대회마다 남다른 징크스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징크스는 결국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동시에 확인된다. 앞으로 또 어떤 기전에서 어떤 기사들이 새로운 징크스를 만들고 허물어나갈지 기대된다. 특정기사나 국가의 평면적 승부 결과만 챙겨보는 대신 이런 입체적 관전습관을 갖는다면 더욱 즐거운 관전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