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마냥 장고(長考)에 빠졌을 경우 반대편에서 빠뜨리지 않는 한 마디가 있다. “바둑 두는 사람 뒷간 같나?” 아마추어 대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아마추어끼리의 파적(破寂)에 시계 따위를 놓고 대국할 리 없다. 그러니 일단은 ‘불공정 게임’이다. 형세가 좋고 수를 빨리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좀 억울(?)하다.
프로세계와 달리 아마추어들은 약간의 비방이나 야유가 허용되는 특권(?)이 있다. 상대의 착점을 기다리면서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등 과장된 ‘시위’가 이어지다가, 기어이 “하루 종일 생각하면 못 이길 바둑이 어디 있어”하는 ‘결정타’를 꽂아 넣곤 한다.

프로 바둑 세계는 똑같은 양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 공정한 룰의 출발점이다. 계시기(計時器)라는 시계를 갖다놓고 엄격하게 관리한다. 이른바 제한시간이란 장치다. 그런데 이게 천차만별이다.
이틀에 걸쳐 1인당 8시간씩 주어지는 바둑이 있는가 하면 모든 수를 10초 내에 두어야하는 초속기(初速棋) 기전도 있다. 긴박한 종반전에 시간의 여유는 상당한 자산이다. ‘시간은 돈‘이란 금언이 이처럼 어울리는 경우도 많지 않다.

제한시간 제도는 현대 프로바둑의 산물이다. 1939년 일본 최초의 공식타이틀전인 본인방전이 탄생하면서 처음 도입됐으니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그 이전 가문 간의 목숨을 건 대결을 펼쳤던 일본에선 한 판 바둑을 완료하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가 소요됐다. 하물며 바둑을 사랑방 소일꺼리로 간주했던 조선시대엔 제한시간이란 개념조차 있을 리 없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세계바둑 최장 제한시간 대국은 1938년 일본 최후의 세습본인방 슈사이(秀哉)가 청년 고수 기타니(木谷實)를 상대로 싸웠던 은퇴기로, 1인당 40시간씩이 주어졌다. 그나마 한 자리에서 두어진 게 아니라 찔끔찔끔 이어가다가 무려 158일에 걸쳐 완성됐다. 일시 중단을 위한 봉수(封手) 절차도 15번이나 필요했다.

명분은 슈사이 명인의 건강 때문이었지만,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그의 탐욕도 한몫했다. 바둑이 중단되면 제자들을 소집해 다음 수를 연구하던 것이 그 때까지의 전통이었다. 그 바둑에서 사용한 시간은 흑을 쥔 기타니 7단이 34시간 19분, 슈사이 명인은 19시간 57분으로 전해져 온다.

이처럼 무식한(?) 제도를 타파하는데 선봉으로 나선 이가 우칭위안(吳淸源)이었다. 바둑 이론의 새 지평을 열 만큼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그는 “바둑이란 생각하는 게임이긴 하지만 무한정 생각만 한다고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각으로 판을 짜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제안은 시대적 변화 욕구와 함께 상당수 프로기사들의 호응을 끌어내면서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엔 일본 뿐 아니라 한국 중국 대만 등 프로제도가 있는 나라에선 제한시간이 없는 대국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일본은 그러나 수 백 년 전의 무한정(?) 제한시간의 향수를 못 잊어서인지 이틀걸이 바둑을 아직도 병행하고 있다. 기성전 명인전 본인방전 등 이른바 3대 메이저타이틀의 경우 1인당 8시간씩 생각할 시간이 제공된다. 오히려 이들 3개 기전을 통해 일본 바둑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도적 우월성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듯 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세계바둑 지배는 막을 내렸다. 제한시간이 3시간 안팎인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중국에게 현저하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언젠가 부터 일본바둑계는 자국의 국제적 부진을 제한시간 탓으로 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잇단 패배가 실력 차 아닌, 8시간에 익숙한 톱스타들이 3시간 전후의 대국호흡에 적응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란 논리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대회들의 제한시간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LG배와 후지쓰배 도요타덴소배 춘란배 등이 각 3시간, 잉씨배가 3시간 30분이다. 삼성화재배는 2시간이고 농심배는 1시간씩 주어진다. 중환배는 2시간 반, TV아시아선수권은 1분 초읽기 10회 방식이다. 전체적으로 3시간 정도가 대세로 보인다.

일본은 그런 논란이 일면서 실제로 일부 타이틀전의 제한시간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서열 6위 기전인 왕좌전 도전기의 경우 원래는 1인당 5시간이었으나 4시간으로 줄였다가 2007년부터 3시간으로 단축했다.

요즘은 3대 기전을 제외하면 4시간짜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1인당 10분 이하의 TV속기전도 여럿 존재한다. NHK배, 여류기성전, 용성전 같은 기전은 아예 제한시간을 하나도 주지 않은 채 막바로 초읽기에 돌입한다.


한국은 어떨까. 10여 년 전만 해도 중량급 기전 도전기의 제한시간은 5시간씩이었다. 아침 10시에 시작해 밤 9시 전후에 끝났고 자정을 넘기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단축을 거듭해 오면서 요즘엔 1인당 3시간을 넘기는 기전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가장 제한시간이 긴 기전은 GS칼텍스배, 국수전, 여류국수전의 3시간이다. 최대 규모로 치러지는 명인전은 2시간, 천원전은 1시간씩 주어지고 있다.

국내 타이틀전의 제한시간 별 분포를 보면 속기전 비율이 상당히 늘어났음을 알 게 된다. 전자랜드배 원익배 물가정보배 지지옥션배 신인왕전 맥심배 등의 1인당 생각할 시간은 10분씩이다. 바둑리그의 경우 5판 중 4판이 별도 제한시간 없이 30초 초읽기 10회로 진행되고, 나머지 1판만 90분제로 치러진다.

중국의 경우 갑조리그를 제외하면 타이틀 수는 많지 않은 편인데, 대체로 장고(長考)바둑의 비율이 한국보다는 높다. 창치배가 3시간 반, 명인전과 천원전이 각 3시간 및 2시간이다. 신인왕전에도 2시간 반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 아함동산배 초상은행배 NEC배 등은 속기(速棋)로 치러진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국제무대에서 독주하던 한국이 그 이후 중국으로부터 약간씩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2008년 중국세는 더욱 강해져 한국과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국내 바둑계 일각에선 한국 타이틀전의 속기화 추세에서 그 이유를 찾는 발언들이 쏟아졌다. 짧은 제한시간에 길들여진 탓이란 것이다. 한때 “제한시간이 너무 길어 국제무대 적응에 실패했다”던 일본의 논리 전개방식과 신통히도 닮아있다.

그러나 국내기전의 제한시간과 국제대회 성적 사이의 상관관계는 입증할 자료가 없다. 그저 막연한 추론일 뿐이다. 기사들 대부분이 장고바둑과 속기바둑에서 신통할 정도로 정비례한 성적표를 받아든다. 지난해 KBS바둑왕전 4강은 이창호 이세돌 조한승 최철한이었다.
‘장고의 대명사’ 조치훈은 일본 속기타이틀을 가장 많이 획득한 기사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런 사례들은 ‘속기용’ 기사와 ‘긴 시간 바둑’용 기사가 따로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한 중 일을 막론하고 모든 기사들은 양쪽을 닥치는 대로 출전하며, 양쪽의 성적 그래프는 거의 일정하다.

중국의 새 물결을 몰아오고 있는 청년스타들은 자국내의 기존 타이틀전이 아닌 인터넷 속기무대를 주 훈련장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인터넷 공간에서의 만남에서 한국 청년 기사들을 앞지르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중국에게 위협받고 있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중국이 3시간 안팎짜리 자국 기전서 익힌 대국호흡으로 한국기사를 앞질렀다는 것은 억측일 수 있다.

한 중 일 3국의 국가별 국제대회 성적을 비교해도 장고바둑과 긴 바둑이 별반 다르지 않다. 성적은 제한시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바둑 실력’의 정직한 반영일 뿐이란 뜻이다.

일본은 지금은 죽을 쑤고 있지만 국제대회 초창기였던 88년~94년 무렵 후지쓰배(3시간)와 TV아시아선수권(10분)짜리대회를 공히 휩쓸었다. 그것은 그때까지는 그들의 실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지 제한시간의 유리함 덕이 아니었다.

신중한 성격의 완벽주의형 기사, 끈덕진 기사들은 되도록 많은 시간이 주어지길 원한다. 이창호는 “속기 바둑에선 깊이 있는 수읽기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턱없는 실수가 승부를 결정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반면 기세형, 투지형 기사들은 “어차피 같은 조건이므로 속전속결이 편하다”는 입장이다. 대국수가 폭증하면서 체력관리 차원에서 속기화가 바람직하다는 기사들도 많다.

아무리 긴 시간이 주어져도 바둑이 끝났을 때는 반드시 악수가 지적되고 후회가 따른다. 깊이가 없다지만 속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장고바둑에서 볼 수 없는 스릴을 선사해 준다. 바둑이 근엄한 도(道)에서 점차 스피디한 승부로 이행하면서 속기 비율도 갈 수록 높아져 갈 전망이다.

결국 바둑의 제한시간엔 ‘정답’이 없는 셈이다. 8시간이건 3시간이건, 또는 10초에 한 수 짜리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초속기이건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다. 승부의 결과를 놓고 굳이 제한시간과의 상관관계를 끌어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선수들은 기량껏 임하면 되고 관객은 취향에 맞춰 즐기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