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다가온 북한의 바둑

전 세계 143개국 4천 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던 제1회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즈(WMSG)가 10월 17일 중국 베이징서 막을 내렸다. 육체스포츠의 대립 개념인 정신스포츠 5개 종목이 처음 한 자리에 모여 기량을 겨룸으로써 숱한 화제도 만들어냈다. 현 시점 북한 바둑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번 대회 수확이었다.

눈물바다가 된 시상식장

알려진 대로 북한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개를 획득하며 바둑부문서 당당히 3위에 랭크됐다. 전체 금메달이 6개뿐인 바둑 경기에서 바둑 불모지로만 알았던 북한이 이 같은 성적을 올린 것은 주목할 만 한 일이다. 지금까지 바둑이라면 한국 중국 일본 3강 싸움에 대만 정도가 가끔 ‘이변’을 빚는 구도로 진행돼왔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 남자 6, 여자 5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남녀 개인전, 남녀 단체전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프로제도가 있는 나라의 각축장이다. 북한은 유일한 아마추어들의 각축장이 오픈 개인전에 주력, 조대원 조새별 등 자국을 대표하는 남녀 두 선수를 여기에 출전시켰다. 조대원은 오픈개인전 예선에서 한국 함영우에게 패한 뒤 준결승서 한국 이용희를 제압한데 이어 결승서도 함영우에게 반 집 승으로 설욕하며 극적으로 우승했다.
북한 팀은 오픈 개인전 외에 다른 부문에서도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꽤 선전했다. 황경주는 여자 개인전서 일본 여류기성 타이틀 보유자인 우메자와(梅澤由香里)를 꺾은 데 이어 여자 단체전서 한국의 김혜민에게 반 집 차까지 추격하는 저력을 보였다. 김혜민은 한국 여류프로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호다. 여자 단체 8강전서는 프로들로 구성된 대만을 당당히 2대1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준결승선 비록 한국에 1대2로 져 탈락했지만 김유미가 한국 신예 유망주 박지연을 흑 불계로 꺾는 실력을 보였다.
조대원이 첫 금메달을 따는 순간 북한 팀 진영은 완전 감동의 도가니였다. 임원, 남녀 선수들 할 것 없이 환희에 빠져들었고, 개중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많았다. 선수단을 인솔한 리현숙 단장은 목이 메인 듯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첫 세계대회에, 프로도 없이 한 걸음 처진 전력으로 이뤄낸 우승이니 그럴 만도 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서 양정모가 해방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던 무렵의 한국 분위기를 연상하면 딱 어울린다. 북한은 이 대회 입상을 위해 무려 6개월 동안 합동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대원이 우승한 10월 10일은 마침 북한 조선노동당 창당기념일이기도 했다.

▲'용희야~ 내 금메달 멋찌쟤?'
금메달을 딴 북한의 조대원 선수가 이용희 선수에게 금메달을 보여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 프로도 제쳤던 실력

북한의 이번 대회 성과는 ‘기적’이라고 봐야 할까. 가진 실력을 훨씬 뛰어넘는 횡재(?)를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북한 바둑은 나름대로 상당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2005년 벌어졌던 제26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서 당시 17세였던 조대원이 한국의 서중휘를 완파하고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바로 이번 대회 오픈전 금메달을 따낸 선수다.
당시 서중휘는 한국 입단대회를 통과한 직후 이 대회에 참가했다. ‘프로급 실력자’가 아니라 ‘실제 프로’였다는 얘기다. 입단대회를 갓 통과한 한국 신예들의 실력은 통상 한국 전체 프로들의 평균실력을 훨씬 상회한다. 결국 그 무렵 벌써 조대원의 실력은 한국 프로들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을 만큼 강했었다는 뜻이다. 조대원은 서중휘를 꺾은 직후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에 나올 선수를 뽑는 국내 선발전이 너무 치열해서 하마터면 이 자리에 못 설 뻔 했다”고 했다.
남북 바둑대결서 북한이 승리한 예는 그 이전 국제 아마추어 페어(pair)대회에서도 몇 차례 있었다. 2000년 11월 제11회 대회 때 권미현-박현철 조가 임동균-배윤진 조를, 2004년 15회 대회 때 조새별-이봉일 조가 하성봉-김지은 조를 누르고 우승했었다. 한국은 페어 대결은 이벤트 대회라고 무시하는 분위기였으나 조대원의 서중휘 격파 사건으로 인해 북한 바둑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집중 육성 20년만의 금메달

북한 정권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바둑을 자본주의의 비생산적 유희(遊戲)로 간주했다. 북한 바둑이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못한 이유다. 당시 북한 바둑은 일제시대 때부터 바둑을 두었던 노인층, 그리고 북송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북한 집권층의 바둑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89년 8월이었다. 바둑을 민속놀이의 하나로 규정하고 적극 장려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국가체육연합회 산하에 조선바둑협회를 창설하고 본격 육성에 나섰다. 조선바둑협회는 이후 북한 내 각종 체육연맹 중 여건이 가장 좋은 조선무도연맹으로 소속을 바꾸었다는 보도가 최근 나왔다. 아무튼 조선바둑협회는 제11회 세계아마선수권대회에 업저버를 파견하고, 90년 5월엔 제1회 전국바둑경기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등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91년 5월 조총련 소속의 홍희덕을 제13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시킨 것을 출발로 92년 14회 때는 ‘북한 토착민’ 문영삼이 같은 대회에 참가했다. 조대원이 서중휘를 꺾기 전까지 남북 대표는 2차례 맞붙어 모두 남한 선수가 승리했다. 96년 18회 때 이용만이 최명선을, 99년 21회 때는 유재성이 이봉일의 도전을 따돌렸던 것. 92년 제4회 소데츠배 세계 여류아마선수권대회 때 역시 윤영선이 당시 8살 꼬마였던 최연소 출전자 최은아에게 ‘하늘 높음’을 일깨워주었다.

주역으로 자라난 중국 유학생들

전국의 학생소년궁전에는 바둑소조(小組)가 조직돼 있다. 여기서 재능을 보이는 꿈나무들은 중국 유학을 보낸다. 최명선 이봉일 문영삼 박호길 조대원 조새별 등 최고수급 강자들 상당수가 이 코스를 거친 것으로 진단된다. 반대로 중국 프로 사범이 북한 유망주 육성을 위해 초빙돼오기도 한다. 중국 중견기사 왕예후이는 90년대 중반 무렵 평양 청춘로 중다(衆多)체육관에서 2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 정예팀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평양기원에는 약 500명의 아마추어 기사가 있으며 그 중 50명 정도가 북한 최고 단위인 아마 7단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마인드 스포츠 게임즈 바둑 팀을 인솔한 북한 팀 리현숙 단장은 “이번 선수단은 앞날이 유망한 기사들의 경험 배양을 위해 16~17세 정도의 어린 선수들 위주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여자 선수 조새별이 26세로 이번 대회 최고참 참가자다. 출전하지 않은 강자들까지 감안하면 북한 바둑의 전력은 좀 더 높아진다는 얘기가 된다.
조대원 7단은 현재 체육대학 2학년 학생으로 바둑을 전공하고 있다. 평양바둑 팀의 일원이기도 하다. 여자 선수 중엔 조새별만 7단일 뿐 황경주가 3단, 나머지 출전자들은 ‘급(級)’으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리현숙 단장은 “별도의 승단대회가 없는 관계로 실력과 단위와는 일치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새별은 이미 4년 전 중국 땅에서 ‘스타’로 떠오른 바 있다. 2004년 제15회 국제아마추어 페어대회 우승 직후 제3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이 열리고 있던 베이징에 그녀가 나타났다. 조새별은 중국 프로랭킹 5위권 정도의 강호인 쉬잉(徐瑩)에게 비공식전을 제안했고, 두 판을 두어 모두 이겼다. 그것도 서로 대등한 조건으로 싸우는 호선(互先) 치수였다. 쉬잉이 그 며칠 후 정관장배에서 윤영선의 3연승을 제지하며 2연승, 중국의 우승을 확정지었고 보면 그것은 큰 사건이었던 셈이다.

감칠맛 넘치는 북한 바둑용어

북한에선 백두산상 바둑대회, 전국바둑경기대회, 세계아마선수권 대표선발전 등 각종 대회가 연중 행사로 열리고 있다. 바둑 동호인 수는 5천 명에서 2만 명까지 여러 설이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북한의 국제대회 전망은 꽤 밝다. 최고 수준 멤버들의 실력이 최소한 한국 중국 일본의 아마추어 정상급과 비교해선 밀리지 않음이 확인됐고, 대형 국제아마대회가 갈 수록 늘어날 전망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바둑용어도 감칠 맛이 넘친다. 한국의 화점(花點)은 북한에선 ‘별’이다. 고목(高目)은 ‘웃별’, 소목은 ‘아랫별’로 불린다. 또 환격은 ‘자충잡기’, 후절수는 ‘되잡기’로 호칭되고 있다. 공배 꽃놀이패 회돌이 포도송이 등은 각각 ‘헛자리’, ‘놀아리패’, ‘훌치기’, ‘호떡’이다. 한반도가 통일을 이뤄 남북한의 바둑용어도 하나가 되는 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