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비롯한 이른바 ‘두뇌 스포츠’들의 상아탑 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마인드 스포츠’라고도 불리는 바둑 체스 브리지 체커 등을 학문으로 다루는 대학들이 갈 수록 늘어가고 있는 것. 스포츠라면 으레 몸을 사용하는 육체 운동을 떠올렸으나, 요즘 같은 추세라면 늦어도 10년 내에 스포츠 세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대만국립체육대학 관계자가 한국을 다녀갔다. 바둑학과를 창설하기 위해 그 분야 원조 격인 한국 명지대 관계자를 만나 도움말을 얻기 위해서였다. 대만은 2년 전 저우쥔쉰 9단이 LG배 세계기왕전서 우승한 이후 일대 바둑 붐이 불어 3000명 규모의 대형 바둑교실까지 생겨났고, 국가에선 프로기사들의 병역특례 제도를 도입했다.

대만체육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학교는 지난 5월 교육부에 바둑학과 설립을 신청했다. 빠르면 내년 9월경 신입생을 모집할 계획이다. 정원은 45명으로 잡고 있는데 프로기사, 대만기원 연구생, 그리고 바둑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저우쥔쉰 처럼 국제대회서 좋은 성적을 거둔 기사에겐 특례입학을 허용할 계획도 세웠다.

대만뿐이 아니다. 중국에선 현재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양대 명문대학을 필두로 상하이 후단대, 동지대 등 1류 대학들이 바둑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명문 도쿄대는 지난 2005년 가을 학기부터 바둑을 정식 과목으로 받아들였다. 프로기사들의 초청 강의, 바둑박물관 견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강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도쿄대의 바둑 강좌는 2004년 당시 일본기원 이사장이었던 고 가토 마사오씨가 이 대학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 바둑이 한국이나 중국에게 밀리는 것을 만회하기 위한 발상으로 시작됐지만, 도쿄대에서의 연구는 철저히 학문적으로 진행됐다. 대국 시 뇌파 및 뇌 내부 혈류량(血流量)에 대한 조사로 많은 것이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각국 상아탑의 바둑학 연구 열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그 출발점은 97년 출범한 한국의 명지대 바둑학과였다. 당시 명지대 총장이던 고건 전 국무총리는 “바둑엔 인생 철학과 경영 전략, 아동 교육, 치매 예방 등 세계에 자랑할 만 한 동양문화가 녹아있다”며 정부와 학교를 설득해 창과(創科)를 관철시켰다. 정원 20명으로 출발해 2년 뒤 30명으로 늘어났다. 각종 바둑 전문서적을 출간하고 국제 학술대회를 정례화했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바둑계 도처에 역군으로 자리잡았다.


명지대 바둑학과는 이후 ‘바둑 아카데미즘’의 세계 전진기지가 됐다. 지구촌 곳곳에서 한국 바둑을 배우려는 유학생들이 찾아왔다. 헝가리 출신 디아나는 올해 초 한국기원 초단 면장을 받았다. 윤영선 강승희 등 이 학교를 거쳐 해외 바둑보급에 온 힘을 쏟는 프로기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명지대의 이 같은 성공은 국내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엔 상명대에 교양바둑 2강좌가 개설됐고, 2005년엔 명지전문대에 6개 강좌가 들어섰다. 전주대 우석대 강남대 관동대 경원대 고려대 카이스트 등에서도 다투어 바둑과목을 개설했다.

올해 들어서는 전라남도 소재 대불대학이 20명 정원의 생활체육학과 바둑학 전공자 과정을 개설했다. 완전한 바둑학과는 아니지만 바둑 전공생들을 배출하는 시도는 명지대에 이어 국내 2번째다. 이 대학엔 프로기사인 전영규 3단을 비롯해 함영우 송홍석 송예슬 등 아마 강자들이 대거 입학, 앞으로 경기측면에서도 명지대 바둑학과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마인드스포츠들 가운데 바둑만 유일하게 각광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스크바대학 체육학과 안에는 체스전공 학생들이 있다. 바둑 외의 다른 마인드스포츠들도 그 효용성과 가치를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오히려 해당 세계연맹 가입국 숫자로 보면 바둑은 이들 마인드스포츠 종목들 가운데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


세계체스연맹(WCF)의 경우 전세계 회원국 수는 2008년 8월 현재 무려 158개국에 달한다. 세계브리지연맹(WBF)도 103개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다. 국제바둑연맹(IGF) 회원국 수는 69개. 체커(Checker=Draughts) 종목 총괄단체인 세계체커연맹(WDF) 회원국 수는 50개를 조금 넘기고 있다.

이들 4개 종목은 마인드스포츠란 한 깃발 아래 공동 보조를 맞추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강화돼가고 있다. 각 종목들이 경쟁관계 속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라, 협조하고 함께 발전하자는 분위기다. 이런 태도의 이면엔 서로 힘을 합쳐 올림픽 상륙 등을 이뤄내고 함께 상생하자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미 체스와 브리지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바둑과 체커는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가입돼 있다.

이들 4개 종목은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인 오는 10월 같은 장소에서 올림픽 방식으로 제1회 월드마인드스포츠게임즈를 연다. 전세계 150국에서 무려 30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하는 매머드 대회다. 실시 종목은 앞서의 4개에다 중국장기를 포함한 5개로 결정됐다. 아직 올림픽무대엔 올라서지 못했지만 올림픽에 버금가는 잔치를 펼치자는 생각이다.

마인드스포츠 중 일부 종목은 올림픽 진입에 앞서 아시안게임 상륙엔 이미 성공하고 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 체스가 처음 정식 종목으로 들어간 데 이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체스와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치러지게 된다.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는 한국 인천이어서 바둑의 정식종목 유지가 매우 유력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강릉영동대학에 마인드스포츠학과가 신설됐다. 2년제에 40명 정원으로 2009학년도에 첫 학년을 뽑을 예정이다. 명지대가 세계 첫 바둑학과를 창설해 바둑아카데미즘의 선봉 역할을 맡아왔다면, 강릉영동대학은 4개 마인드스포츠를 모두 아우르는 세계 최초의 학과로 또 한 번 선도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세계적으로 붐을 맞고 있는 마인드스포츠의 거대한 잠재시장을 선점할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최초의 전문 학과 탄생은 의미가 매우 크다. 지금까지는 각국, 각 종목 별로 게임학 연구는 활발하지만 마인드스포츠 전체를 아우르는 학문적 접근은 거의 없었다. 이 대학은 엘리트 선수 육성, 지도자 양성, 저변 확대 등 몇 가지를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데, 특히 해당 산업과 연계해 전혀 색다른 일자리를 대거 창출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어 주목된다.

마인드스포츠를 향한 세계의 시선은 따듯하다. 기대에 차 있다. 바둑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집중력 제고와 두뇌 개발에 큰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다. 성격이 침착해지고,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며, 인내심 함양과 치매 예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효용성을 인정한다. 한국 국민의 10명 중 8명은 자녀 교육에 바둑이 유익하고, 그들 가운데 9할이 자녀에게 바둑교육을 시키겠다고 답하고 있다(갤럽 2008년 국민 여론조사).

대학뿐 아니라 각급 학교에서 다투어 바둑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경기도 군포시 소재 흥진초등학교 같은 경우는 2004년부터 전교생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 안팎으로 큰 주목을 모으고 있다. 이는 충암중 명지중 경성중 등 중학교의 바둑 특기부 창설로 이어졌고, 충암고를 비롯한 많은 고교들이 바둑특화 교육으로 성가를 올리고 있다.

흔히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든다’고들 말한다. 육체와 정신은 별개가 아니란 뜻이다. 스포츠라고 하면 근육질 몸매와 다이내믹한 움직임만 연상했던 지금까지의 습관도 일대 변혁을 맞이할 전망이다. 바둑을 비롯한 마인드스포츠 종목들이 올림픽에 편입돼 축구 육상 수영 등 육체스포츠와 나란히 메달 경쟁을 펼치는 장면이 연출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