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에 멍군이다. 지난 해 첫 대회 때 여성 팀에게 패배, 체면을 구겼던 시니어 팀이 7월 초 끝난 제2회 지지옥션배 여류 대 시니어 연승대항전서 승리했다. 설욕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두 그룹 대항전은 한 번씩 사이 좋게 우승하며 균형을 되찾았다.

이 대회에서 시니어란 만 45세 이상 남성 기사들을 뜻하는 총칭이다. 대표로 뽑힌 선수들은 하나같이 ‘왕년’에 한 가닥 하던 맹장들이다. 그러나 바둑이란 승부는 스포츠 경기 이상으로 나이를 탄다. 제 아무리 반상을 휩쓸던 강자들도 나이 마흔이 넘으면 두뇌 회전능력이 감퇴하면서 젊은 준재들을 당하기 힘들어진다. 반면 여성들의 현재 바둑 실력은 남성들에 비해 아직 반 걸음쯤 뒤져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니어그룹과 여성그룹 간에 전면전을 붙여 우열을 가려보자는 것이 대회 취지였다.

대회는 양 팀 각 12명씩으로 포진, 지는 쪽에서 다음 선수를 내보내는 연승전 방식으로 치러진다. 이론적으론 물론 어느 한 쪽 첫 선수가 12전 전승으로 대회를 끝낼 수도 있다. 두 팀 진용은 각각 별도의 예선을 치러 엄선한 멤버들이다. ‘여성’이거나 ‘시니어’라 해서 누구나 참가할 수는 없는, 나름대로 양대 집단의 정예멤버들이란 뜻이다.

첫 대회가 시작되기 전 바둑계는 ‘썩어도 준치’론을 내놓았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여성이 남성을 뛰어넘을 실력엔 못 미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여성 팀의 일방적 우세 속에 대회가 진행됐다. 11명이 전멸한 가운데 나온 시니어 팀 최후의 보루 조훈현이 6연승을 올리며 극적 역전을 노렸지만 여성 팀 2장 박지은에게 막혀 대회가 끝났었다.

올해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됐다. 시니어 팀은 첫 주자 차민수(57)가 5연승, 5번째 주자 김종수(48)가 4연승을 올리며 대세를 장악했다. 여성 팀은 막판 최종 주자인 박지은의 3연승을 거점으로 반전을 노렸으나 박지은이 양재호에 패배, 싸움이 종료됐다. 지난 해 여성 팀이 주장 루이나이웨이를 남긴 채 월계관을 썼다면, 올해 시니어 팀에선 조훈현 김일환 두 선수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패권을 거머쥐었다.

출범 첫해인 지난해 상당한 흥행 성공을 거두었던 이 대회는 올해는 1회 때를 능가하는 인기를 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회 예산에서 지지옥션배보다 몇 배나 더 큰 정규 대형기전들을 따돌렸다는 것. 타이틀 자체도 그렇고 출전 선수들의 면모도 마이너로 분류되는 이 대회가 메이저급 대회의 인기를 압도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현 바둑계의 메이저 무대는 이세돌 박영훈 조한승 원성진 최철한 박정상 등 20대 초 중반 기사들이 석권하고 있다. 33세의 이창호가 이 나이 그룹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메이저리거일 뿐이다. 최상급 기사들이 빠지고도 최고의 인기 이벤트가 됐다는 사실은 팬들이 반드시 최고 기사들의 대결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 결과를 점치기 힘든 싸움이야 말로 구경꾼들의 구미를 돋우게 마련이다. 여기에 흘러간 옛 스타들의 지명도와, 현재 여성 바둑계 최고스타들의 인기가 상승적으로 작용했다.


이러다 보니 출전 기사들도 상당한 승부욕을 품은 채 덤벼들고 있다. 지난 해 첫 대회를 마무리 지은 직후 여성 팀 최종주자 박지은은 “대회 전 많은 사람들이 시니어 우승을 예상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었다. 반면 올해 첫 주자로 나가 시니어 팀 쪽으로 물줄기를 잡았던 차민수는 “지난 해엔 얼떨결에 당한 것이다. 시니어 팀이 전열을 정비하고 나선 올해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예상이 적중했다.

지난 해 원년 대회의 경우 평균 연령은 시니어 팀이 51.7세, 여성 팀은 25.6세였다. 완전한 한 세대 차이다. 여성 팀의 주장이자 최 연장자였던 루이나이웨이의 당시 나이는 44세. 시니어 팀의 하한 연령에도 못 미친다. 아빠 세대와 딸 세대 간의 정면 격돌은 다른 어떤 대회보다도 박진감이 넘쳤다. 이런 절묘한 조합을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던 게 아쉽다는 얘기가 쏟아졌다.

앞서 지적했듯 어느 한 팀에 절대 강자 1명이 존재한다면 이 대회는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제5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서 한국의 두 번째 주자 서봉수가 혼자 9연승을 거둔 것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대회는 싱겁기 짝이 없는 행사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2년 동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니어 팀에선 1회 때의 조훈현이 6연승, 올해 차민수의 5연승과 김종수의 4연승, 그리고 여성 팀은 지난 해 김은선의 4연승과 올해 이민진의 4연승이 최다 연승이었다.

우승 팀에게 주어지는 상금은 7000만원. 지난 해 5500만원에서 증액됐다. 지는 팀에겐 한 푼도 돌아가지 않으니 가위 ‘데드 매치’ 수준이다. 다만 3연승을 거둘 시 200만원, 이후 1승씩 추가할 때마다 100만원의 연승 상금이 주어질 뿐이다. 출전해서 팀도 우승하지 못하고 자신도 3연승 미만에 그칠 경우 돌아가는 것은 약간의 대국료 뿐이다. 팀의 우승과 개인의 명예, 그리고 수입이 모두 한 묶음인 셈이다. 출전 선수들이 온 힘을 다 쏟아부을 수 밖에 는 구조다.

출전자들의 부담감은 따라서 혼자만 책임지면 되는 일반 기전의 몇 배나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배짱이 부족한 기사는 큰 성적을 올리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다. 농심배, 바둑리그 등의 단체전과 비슷한 현상이 여기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2회 지지옥션배 최종국을 장식, 시니어 팀의 우승을 확정지은 양재호는 “박지은 9단이 나보다 더 부담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내년 대회가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날지는 아직 점치기 힘들다. 1회 대회 당시 평균 단위는 시니어 팀이 8단, 여성 팀은 4.5단이었다. 당시 45세 시니어 기사 전체 숫자는 68명, 여성 기사 총수는 37명이었다. 여러 모로 시니어 팀의 우세가 점쳐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1회 대회 시작시점 직전 14개월의 양쪽 맞대결 성적 누계에선 여자 팀이 82승, 남자 시니어 팀이 67승을 올린 것으로 나왔었고 결과도 여성 쪽이 승리했다. 숨어있는 변수가 많아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란 뜻이다.


바둑계의 두 마이너리티 집단이 펼치는 이 이벤트는 남녀 대결인 동시에 세대 대결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단위 대결의 성격도 있다. 경험이냐 패기냐, 나이 든 쪽의 관록이냐 젊은이의 명민함이냐의 격돌로 볼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딸 또래의 젊은 여성들에게조차 밀릴 수 밖에 없는 게 바둑일까. 거꾸로 아버지 뻘 남성에게도 못 이길 만큼 여성은 바둑에 있어 열성(劣性) 인자를 타고났을까.

이 대회가 이런 궁금증들을 해소시킬 만 한 열쇠를 제공해 줄지는 분명치 않다. 여성 바둑이 상대적으로 뒤져있는 이유는 역사적, 관습적 배경에서 찾아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둑은 수 천 년간 아녀자들이 배제된 채 성행한 사대부들만의 도락이었다. 그러나 이 행사는 무얼 규명하기 위해 탄생한 이벤트는 아니다. 팽팽한 전력의 두 집단 간에 펼쳐지고 있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대회를 거듭 치르다 보면 어떤 실마리 정도는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