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이 후지쓰배 세계선수권대회서 무려 10년 연속 우승을 독식 중이다. 21회째를 맞은 올해 대회서도 8강 멤버 중 절반인 4명의 한국기사가 올라가 11연패(連覇) 가시권에 들어섰다. 한 국가의 11연패 도전은 국제 바둑사상 초유의 일로, 우리 바둑이 이 대회서 얼마나 강세를 보여왔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연패(連覇), 즉 연속 우승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강 실력임을 1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해서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 차례 제패는 운이 좋아 이뤄낼 수도 있지만 2회 이상 복수(複數) 우승은 운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한국은 후지쓰배에서 98년 제11회 대회 때부터 우승 퍼레이드를 시작해 지난 해 20회 대회로 만 10년을 채웠으니 볼 수록 엄청난 기록이다. 그 10년 사이 이세돌이 3번, 조훈현과 박영훈이 2번, 그리고 이창호 유창혁 박정상이 각 1번씩 정상을 밟았다.

세계대회 연속 우승 기록을 살피다 보면 한국의 독주현상이 후지쓰배에만 국한된 게 아님이 확인된다.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의 경우 8번의 대회를 치르는 동안 한국이 초기 6년을 연속 제패했다. 이 대회의 전신인 진로배와 SBS최강전을 포함한다면 국제 단체전 형식 대회의 패권은 무려 12년 동안 연속 한국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었다.

다른 대부분의 국제대회 연패(連覇) 기록도 한국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LG배에서 작성했던 4연패, 삼성화재배의 6연패 모두 대회 최장 기록이다. 잉창치배는 지금까지 모두 5회를 치렀는데 1~4회 사이의 4회 연속 한국기사에 의해 정복됐다. 그런가 하면 일본주최의 도요타덴소배와 대만이 개최하는 중환배는 지금까지 치러진 3차례 대회를 한국 기사가 완전 독식 중이다. 춘란배의 최다 연패기록(3회) 또한 한국 기사들에 의해 작성됐다.

세계대회 최다 연속우승 기록을 한국 아닌 다른 나라가 보유 중인 대회가 하나 있긴 있다. 속기(速棋)대회로 마이너급으로 분류되는 TV아시아선수권대회다. 지금까지 총 19회를 치르는 동안 일본이 초기 1회~6회를 연속 제패한 것이 최다 기록이었다. 1989년부터 1994년 사이 작성된 것으로, 당시만 해도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바둑의 메카로 통했었다. 후지쓰배 초기인 1회~5회 때 일본이 5연패를 기록한 시기가 88년부터 92년까지였음도 같은 이유로 설명된다.

국제 바둑대회의 국가별 연패(連覇) 기록은 그렇다 치고, 개인의 국제대회 연패 기록은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이창호가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2~4기 대회를 석권했던 3연패가 최장 기록이다. 역시 세계대회의 개인 연패란 그 난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물론 일본의 다케미야(武宮正樹)가 89년부터 92년 사이의 1~4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를 4연패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마이너급 행사여서 최고로 평가해주기엔 무리가 따른다.

메이저급 대회에선 개인의 2연패도 쉽지 않다. 조훈현은 삼성화재배 및 후지쓰배, 그리고 마이너급인 TV아시아선수권 대회를 포함해 총 3차례 2연패를 경험했다. 이세돌은 후지쓰배와 도요타덴소배서 각 1회씩 두 차례 2연패의 주인공이 됐다. 이창호는 삼성화재배 3연패 외에 춘란배 1회, TV아시아선수권 1회 등 2번 2연패를 추가해 이 방면서도 최강의 실력자였음을 기록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번엔 국가별로 국내 타이틀 연패 기록을 살펴볼 차례다. 한국에선 조훈현이 지금은 중단상태인 패왕전서 무려 16연패를 달성한 바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장 연패(連覇)기록이다. 그의 전성기 시절이기도 한 77년 제13기 대회부터 93년 제28기 대회까지 단 한 차례도 패왕 타이틀을 내놓지 않았다.

이창호는 현재 41기까지 진행 중인 왕위전서 12연패를 마크했는데, 아직 진행 중이어서 그 기록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아직 알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조훈현의 패왕전 연패 수를 추월해 새로운 기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는 뜻. 이창호는 기성전서도 11연패(93년 4기~2003년 14기)를 기록, 역대 국내 연패기록 3위 자리의 주인이기도 하다. 조훈현의 국수전 10연패(76년 20기~85년 29기)도 빛나는 기록. 그 다음으로 고 조남철 선생의 국수전 9연패(56년 1기~64년 9기)가 뒤따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 최장 연패기록 보유자는 한국 출신의 조치훈이다. 3대 타이틀 중 하나이며 일본 최고(最古) 기전이기도 한 본인방전서 10연패(89년 44기~98년 53기)를 달성했다. 이 기록은 일본의 타이틀전 사상 두 자리 수 연속 우승을 이뤄낸 유일한 기록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일본은 기사 수에서 아직도 세계 최다일 뿐 아니라, 이 기록이 수립될 당시 일본 바둑은 질(質)적 측면에서도 세계 최고를 구가하던 무렵이었다. 조치훈의 이 기록이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일본의 내로라하던 숱한 강자들도 이 ‘10년의 벽’을 뚫는 데는 실패했다. 다카가와(高川格)는 본인방전 9연패를 끝으로 타이틀 벨트를 풀었고, 조치훈의 라이벌이었던 고바야시(小林光一)의 기성(棋聖) 연패 기록도 8에서 멈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카다(坂田榮男)의 개인 연속우승 최다 기록은 본인방전서 수립한 7회였다. ‘왕좌전의 사나이’ 가토(加藤正夫)의 왕좌 연패 기록 역시 8에서 마감됐다.

중국에선 마샤오춘(馬曉春)의 명인전 13연패가 돋보인다. 89년 2기부터 2001년 14기 대회까지 명인 타이틀을 자신의 텃밭으로 활용하다가 2002년 15기 때 후배 저우허양(周鶴洋)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중국의 타이틀 연패 기록 2위는 현역 1인자인 구리(古力)가 2003년 이후 현재까지 천원전서 마크 중인 6연패가 고작이다. 구리의 시대가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마샤오춘의 명인전 기록 돌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타이틀 연속제패 기록과 관련해 한가지 간과해선 안 될 게 있다. 같은 우승이라 하더라도 도전방식이냐, 선수권제 방식이냐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도전방식이라 함은 우승자에게 기득권을 부여, 차기 도전자와의 1대1 승부를 통해 다음 번 타이틀 보유자를 결정하는 형식을 말한다. 위에 열거한 각국 타이틀전 연패 기록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반면 선수권제란 전기 우승자에게 기득권을 인정치 않은 채 다른 기사들과 똑같은 자격으로 처음부터 경쟁시켜 우승자를 뽑는 방식이다. 선수권제 타이틀전 연패(連覇) 쪽이 난이도 측면에서 도전제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게 높을 게 당연하다. 제 아무리 강자라 하더라도 수 십 명의 경합자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정상에 오르기란 쉽지 않기 때문. 국내 타이틀 역사상 선수권전 최장 연패(連覇) 기록 보유자는 이창호로, 96년부터 99년 사이 1~4기 천원전을 4연패한 게 고작이었다.

연속 우승이 어려운 것은 중간에 건너 뛸 경우 계산이 새로 시작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연속 우승 후 타이틀을 빼앗겼다가 다시 4연속 우승해 봐야 그의 최다 연속 우승기록은 4회에 불과할 뿐이다. 연패(連覇)란 따라서 특정 기사가 일정기간 동안 완전무결하게 도전자들을 잠재운 ‘독재’의 역사를 뜻한다.

산술적으로 연승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 한 차례 우승할 확률을 2분의 1이라고 가정할 때 2연패할 확률은 2의 2승(乘) 분의 1, 즉 4분의 1이 된다. 3연패는 8분의 1.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조훈현의 패왕 16연속 우승의 산술적 확률은 무려 65536분의 1(0.0000152)이다. 한 차례 우승 확률을 2분의 1로 설정한 것 자체가 현실성과 거리가 큰 점을 감안한다면 16연패란 초인의 발자취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후지쓰배 10연패 확률 또한 1024분의 1로 0.0009765에 불과하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선 종종 이런 초인들이 등장해 팬들을 기쁘게 한다. 국제건 국내건, 단체전이건 개인전이건 앞으로 또 다른 기록이 또 다른 주역들에 의해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깨지기 위해 기록이 존재한다는 잠언은 바둑계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초인(超人)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우리 아마추어들은 오늘도 묵묵히 ‘풋바둑’을 두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