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가 국내 무대서도 '전 타이틀 석권'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올해 우리 바둑계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테마 가운데 하나다. 이창호는 지난 해 여름 대만 주최의 중환배 제패로 각종 세계대회 1회 이상 석권이란 위업을 완성해낸 바 있다.

스포츠의 세계에선 이런 경우 그랜드 슬램이라거나 사이클링 히트란 표현을 쓴다.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자기 해당 분야에서 빠짐없이 성취를 이룰 경우 사용하는 표현이다. 바둑의 경우 어느 쪽이 더 적확한 표현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모든 대회를 정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바둑 사이클 히트와 관련해 전제돼야 할 것은 이것이 현재 존재하는 타이틀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바둑계의 타이틀전은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내 타이틀의 경우 최고위전 왕좌전 패왕전 등 20세기 후반을 장식했던 유서 깊은 기전들이 새 천년 진입을 전후해 상당수 중단 또는 폐지된 상태다.

국내 무대에서 현재 펼쳐지고 있는 타이틀전 총수는 모두 10개. 결국 이 10개 모두를 한 번 이상씩 정복할 경우 국내 타이틀 사이클링 히트가 달성되는 셈이다. 이창호의 경우 지금까지 명인(12회 우승) GS칼텍스배(5회) 왕위(13회) 기성(11회) 국수(9회) 천원(4회) 전자랜드배(2회) 바둑왕전(9회) 십단전(2회) 등 9개 대회에서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창호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기전은 오직 물가정보배 1개뿐이다. 정확한 명칭은 '한국물가정보배 프로기전'. 랭킹에 의거해 대진을 추첨하고 예선을 거친 16명이 4개조 본선리그를 진행한 뒤 8강 결선 토너, 결승 3번기로 이어지는 다소 복잡한 방식이다. 각자 10분, 초읽기 40초3회의 속기(速棋)로 치러지며 2500만원의 우승 상금이 주인을 찾아간다.

4기 째를 맞는 올해 물가정보배는 3월 말 예선이 시작됐다. 주최 측은 이창호가 바둑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해 예선을 면제해 주고 본선에 직행하도록 했다. 우승자는 올해 가을 쯤 가려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부분 타이틀전의 관심은 누가 그해 우승을 차지하느냐에 머물러왔지만, 올해는 이창호의 사이클링 히트 여부가 걸리면서 물가정보배에 더욱 시선이 쏠리게 됐다.

'현존 타이틀'이란 단서를 달지 않는다면 이창호는 이미 한 차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적이 있다. 6단 시절이던 지난 94년 제18기 기성전 도전기서 조훈현을 3대1로 제압, 당시 존재하던 16개 기전 모두에 깃발을 꽂았던 것. 개인적으로 올해 생애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1986년 프로에 데뷔한 이창호의 통산 타이틀획득 개수는 135개(2008년 3월 25일 현재)에 달한다. 비공식 대회서의 우승 2회가 포함돼 있다. 앞서 열거한 국내 대회 우승 회수에다 국제대회(21회)와 기타(없어진 기전 및 제한 기전) 45회를 더한 숫자다. 하지만 이창호보다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한 기사가 있으니, 바로 이창호의 스승이기도 한 조훈현 9단이다.

조훈현은 생애 통산 157회에 걸쳐 정상을 정복했다. 제자 이창호보다 22회 앞서 있다. 157회 우승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짝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미 지금쯤 국내 사이클링 히트 쯤은 달성했어야 옳을 듯한데 그렇지 못하다. 그의 전성기는 80~90년대였고, 그 이후 현존하는 타이틀 상당수가 새로 생겨나면서 이창호 등에게 우승을 빼앗겼던 탓이다.

하지만 시대별로 구분해 말한다면 조훈현도 지난 날 이미 사이클링 히트를 경험해 봤었다. 80년과 82년, 그리고 8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른바 전관왕(全冠王)에 올랐을 때 당시 기준 사이클링 히트를 이룩해낸 것. 마치 이창호가 94년 한 차례 전관제패를 이루었던 것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국내 기전 사이클링 히트는 조훈현 3회, 이창호 1회 등 모두 4회에 걸쳐 수립됐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현재 거행 중인 10개 타이틀전을 기준으로 할 경우 조훈현이 정복한 기전은 꼭 절반인 5개뿐이다. '사이클링 히터'로 올라서려면 나머지 5개를 새로 우승해야 된다는 계산. 구체적으로 보면 그가 패권을 잡아 본 기전은 명인(12회) 왕위(13회) 기성(2회) 국수(16회) 바둑왕전(11회) 등 5개 부문이다. 역사가 긴 기전에서 주로 맹활약했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반면 후발 기전인 GS칼텍스배 천원 전자랜드배 물가정보배 십단전 등에선 아직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조훈현의 나이는 올해로 55세. 20세 전후 젊은 기사들이 주도하는 바둑계에서 또 다시 우승을 넘보기엔 너무 벅찬 나이다. 실제로 조훈현은 2002년 국제대회인 삼성화재배를 끝으로 6년째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등정하지 못한 5개 타이틀 우승을 추가해 사이클링 히트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현존 타이틀 사이클링 히트 도전은 이창호의 전유물일까. 젊은 기사그룹에서 또 한 명의 후보가 있다. 바로 이세돌 9단이다. 83년 생으로 올해 25세인 이세돌은 이미 국내 공식 랭킹 1위 자리를 굳혀가면서 현역 8관왕을 질주 중이다. 최강의 기사로 자기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뜻. 사이클링 히트 부문서 이세돌을 빼고는 이야기가 안 될 것이다.

이세돌은 현존 국내 10개 타이틀 중 6개 기전서 우승을 맛 봤다. GS칼텍스배와 물가정보배서 각 2회, 명인 국수 천원 바둑왕전 우승이 각 1회다. 선배인 조훈현이나 이창호와 달리 우승 회수별 분포가 매우 엷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짧은 프로기사 연륜에도 불구하고 타이틀전 우승확률이 그만큼 높았음을 방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세돌은 이들 국내기전 외에 국제대회서 10회, 옛 기전 및 제한기전 8회 우승 등을 합해 통산 타이틀 총 26회를 기록하고 있다.

이세돌이 국내 무대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하기 위해선 왕위 기성 전자랜드배 및 십단전 등 4개 타이틀을 추가로 정복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폭발적 기세라면 2, 3년 내에 이들 기전도 자신의 영토에 편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월 기성전 도전자 결정전서 후배 백홍석 5단에게 예상을 뒤엎고 반 집 패, 기성 정복의 꿈을 1년 뒤로 넘기고 말았다. 곧 차기 대회가 시작될 왕위 전자랜드배 십단전 등을 제패한다 해도 사이클 히트 완성은 최소한 1년 뒤로 미뤄졌다는 얘기다.

전관제패(사이클 히트) 경쟁이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 3명만의 전유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박영훈 목진석 조한승 등 젊은 추격자들의 ‘영토’는 이들 선배 3명의 아성을 넘보기엔 아직 너무도 좁다. 그렇다고 노장층에서 후보를 골라낼 수도 없다. 역대 타이틀 획득 수에서 3~6위에 랭크된 조남철 김인 서봉수(이상 각 30회)나 유창혁(24회) 등은 타계했거나 전성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은 각기 다른 시대를 대표하면서 1인자 계보를 이어왔다는 기연도 공유하는 기묘한 관계다. 여러 이유로 인해 이들 간의 상호 맞대결 기회는 아주 적어졌지만 대신 각종 기록 부문 경쟁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다. 현존 타이틀을 놓고 벌이는 사이클링 히트도 그들 간의 중요한 '전장(戰場)'일 수밖에 없다.

이창호의 올해 사이클링 히트 '화룡점정'여부는 그래서 특히 주목된다. 가시권에 든 3명 중 기록 달성에 가장 근접한 그가 물가정보배마저 접수, 현존 유일의 사이클링 히터로 등장한다면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틀림없다. 현재 보유 중인 세계무대 사이클링 히트에 더해 국내무대 동시 평정에도 나선 이창호는 과연 세계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위업을 남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