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에서도 랭킹제도가 확고하게 뿌리내려가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랭킹제는 골프 테니스 축구 등 스포츠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방식으로 간주돼 왔으나, 바둑계 역시 이제는 랭킹 없이는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으로 자리잡았다.

한국기원은 최근 국제대회 출전 기사 선발에 새로운 방식을 채택, 화제를 몰고 왔다. 외국 주최의 세계대회에서 한국에 배정한 국가 시드의 절반을 랭킹 최상위자 순으로 부여하고, 나머지 절반은 차 순위자 4배수로 커트, 그들 간의 토너먼트를 거쳐 나머지 절반의 출전자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랭킹이 팬들을 위한 단순한 ‘감상용’, ‘전시용’으로 그치지 않고 일종의 ‘내신(內申)’ 기능을 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한국기원은 이번 본격 시행에 앞서 지난 2005년부터 랭킹을 활용한 몇 차례 시험 운용을 실시했었다. 2005년 영남일보배 8강 초청전 때 4명을 최상위 랭커 4명으로 결정한 것이 첫 케이스. 또 2007년 말에는 국제 여류대회인 제1회 원양부동산배 예선 출전자들을 랭킹에 의해 제한했다. 전 기사들이 출전해 대표를 뽑을 경우 발생했을 시간과 경비를 절감하는데 효과가 컸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올해부터 본격 도입을 결정한 것이다.

한국 바둑계에 랭킹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지난 2005년 8월이었다. 200여 국내 프로들 중 50위까지만 발표하기로 했음에도 바둑계 일각에서의 반발은 컸다. 바둑은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예도(藝道)인데 성적순으로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바둑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스포츠의 일원이 돼 있었다. 소속 구성원들의 진학과 병역 문제 등 스포츠가 누리고 있는 여러 사회적 혜택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랭킹제도 도입은 필수였다. 게다가 기사 서열화는 바둑의 대중화와 팬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여론이 강했다. 이 같은 판단은 과히 어긋나지 않았음이 랭킹 도입 이후 여러 경로로 입증되고 있다.


기사 랭킹제는 물론 한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한국보다 8년이나 앞선 1997년에 도입됐다. 하지만 중국 랭킹제도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연간 4차례 발표됨으로써 매월 새 랭킹이 나오는 한국 방식보다 ‘신선도’에서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전의 가중치와 ‘감가상각’ 처리 방식에서도 한국식이 좀 더 우월하다는 중론. 일본의 경우는 별도의 기사 랭킹은 없는 대신 기전 서열로 랭킹을 대체한다. 랭킹 1위 기전인 기성전의 타이틀 보유자 야마시타(山下敬吾)가 톱 랭커로 대접받는 식이다.

한국의 랭킹제는 산정 기간을 그 시점으로부터 과거의 1년으로 하고 기전 가중치, 인정률, 상대평가, 감가상각 등의 개념으로 출발했지만 현실감과 거리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기준을 계속 보완해 왔다. 2008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손을 본 개정안이 등장했다. 가장 큰 변화는 대국점수가 승리점수보다 컸던 종전 방식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랭킹 산정 기간도 2년에서 다시 1년으로 환원했다. 5등급으로 세분화돼 있던 기전 등급은 3등급으로 줄여 LG배 등 8개 기전이 1등급으로 분류됐다.

승부로서의 바둑을 즐기는 팬들 중엔 랭킹에 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인 과학자 배태일 박사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지난 연말 일로(Elo) 시스템에 근거한 정밀한 랭킹방식에 근거한 한국 프로기사들의 레이팅을 완성, 한국바둑학회 회지에 기고했다. 일로 시스템이란 1959년 미국 체스연맹의 의뢰를 받아 미국인 일로(Elo) 박사가 고안해 낸 방식이다. 다양한 통계기법으로 랭킹 제도에 관한 한 최첨단 방식으로 인정 받는다. 현재 세계 체스연맹뿐 아니라 미국 바둑협회, 미국 탁구협회 등 많은 기관이 이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에 랭킹제가 도입된 이후 1위 싸움도 매우 치열했다. 국내에 처음 레이팅이 도입된 2005년 8월 이후 2008년 2월까지 31개월 동안 가장 많이 1위에 올랐던 기사는 이창호였다. 이창호는 제도 도입 직후 처음 3개월 간 1위를 유지했고, 2006년 2월부터 2007년 1월까지는 무려 12개월 간 톱 랭커로 군림했다. 이세돌은 2005년 말 두 달 간 1위에 나섰을 뿐 2, 3위권에서 맴도는 듯 했으나 2007년 11월 이후 1위 고지를 탈환, 현재 4개월 째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이창호는 현재 2위로 밀려난 상태다.

31개월 동안 이창호 이세돌 아닌 제3의 기사가 톱 랭커로 떠올랐던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다. 2006년 1월 최철한이 이창호와 이세돌을 2, 3위로 밀어내고 1위로 등극했던 것. 하지만 최철한 시대는 고작 1개월 천하로 끝났다. 최철한은 이후 계속된 부진으로 최근 랭킹 13위까지 추락, 랭킹제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인용되고 있다. 최 9단이 다시 옛 솜씨를 되찾아 최상위권까지 치고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 바둑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바둑의 랭킹제도와 관련해 아쉬운 점은 세계 레이팅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세계 바둑계를 이끄는 국가들의 연합기구가 아직 없다는 데 기인한다. 이들 국가를 함께 통괄할 조직이 없다 보니 레이팅의 기준도, 그 작업을 수행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바둑이 동양 몇 나라만의 게임에서 벗어나 세계 규모의 흥행을 펼치기 위해선 반드시 세계 레이팅이 확립돼야 할 것이다.

재미 과학자 배태일 박사는 앞으로 이 작업에도 적극 매달리겠다는 의욕을 밝히고 있다. 각국 선수의 승률과 상대 선수의 점수를 고려하고, 모든 기전의 결과를 포함하는 일로 제도의 장점을 살리면 완벽한 세계랭킹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랭킹 점수로 특정 기사 2명 간의 승패 비율의 예측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그의 작업이 기다려진다.

한국기원은 지난 2007년 5월 현재로 세계 톱 텐을 뽑아본 적이 있다. 조선일보의 의뢰를 받은 비공식 통계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2004년 이후 열렸던 메이저급 국제대회 우승에 10점, 준우승에 4점, 4강과 8강은 각 2점 및 1점을 배정하고 마이너급 국제대회는 우승 준우승 4강에 각 5점, 2점 1점을 주어 합산했다. 그 결과 이세돌이 49점으로 1위, 이창호가 41점으로 2위로 나타났었다. 이후는 중국 창하오가 3위, 구리가 4위에 랭크됐고 최철한 장쉬(일본) 박영훈 저우허양(중국) 위빈(중국) 저우쥔쉰(대만) 박정상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선수(기사)의 능력을 완벽하게 수치로 계량화한 랭킹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실력 차이가 크지 않을 경우 각종 가중치와 산정 기간 등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승부사들의 순위 변화는 팬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최고의 마케팅 자료임이 스포츠 못지않게 바둑계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앞으로 과학과 통계학의 발전에 발맞춰 세계적 강자들 간의 정밀해진 레이팅이 세상 빛을 보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