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 바둑 행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LG배 세계기왕전의 12번째 주역을 뽑는 결승전이 눈 앞에 다가왔다. 이세돌 9단과 한상훈 2단 등 한국 기사들끼리의 패권 다툼으로 좁혀진 이번 결승은 2월 25일과 27일 펼쳐지고, 1대1 타이를 이룰 경우 28일 최종 3국으로 패권을 가름하게 된다. 대국 장소는 여의도 LG트윈타워 본사.

이번 결승에서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한국 기사들끼리 격돌한다는 것. LG배는 8회 때 까지만 해도 외국인 우승자가 단 2명에 불과, ‘한국인들만의 잔치’란 소리까지 들었으나 그 후 상황이 일변했다. 9회부터 11회까지 장쉬(일본) 구리(중국) 저우쥔쉰(대만) 등 세계 4강 중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번갈아 잔치를 펼쳐왔다.

그 3년 동안 한국은 우승만 내준 것이 아니라 단 1명의 결승 진출자 조차 배출하지 못했다. 우리의 ‘안방’에서 경쟁국 기사들끼리 진탕 파티를 벌여 왔다는 뜻이다. 그러던 차에 올해는 한국 기사들끼리 결승서 만나면서 한국의 우승도 확정시켜 버렸다. 이것으로 총 12년 간의 LG배에서 한국은 모두 7차례 정상을 밟게됐다.

한국 대 한국의 결승 구도는 사실 재미로만 보자면 최상품(?)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개인 종목이라 해도 현대 스포츠는 국가간 대결이란 배경이 빼놓을 수 없는 흥행요소이기 때문. 내셔널리즘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떠받치는 중요한 골간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승은 나름대로의 의미와 흥미요인을 충분히 갖고 있다.


우선 결승 링에 오를 두 대국자의 커리어부터 살펴보자. 오는 3월 만 25회째 생일을 맞을 이세돌은 당대 최고의 스타로 인정 받고 있다. 국내 공식 랭킹서 이창호를 제치고 1위에 올라있을 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그가 톱 랭커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세돌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타이틀 수는 무려 7개. 그 중 3개가 국제 타이틀이다. 도요타 덴소배와 TV아시아선수권에 이어 금년 1월엔 추격자 박영훈을 2대1로 따돌리고 삼성화재배까지 품에 넣었다.

지금까지 이세돌이 획득한 세계타이틀 총수는 모두 8개. 이것은 중국 국적의 기사 전원이 지난 20여년 간 각종 대회에서 따낸 세계타이틀 수를 합한 숫자와 똑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절치부심 중인 중국바둑계도 “이세돌의 수읽기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인정한다. 바둑 최강국인 한국에서 최우수기사상을 2년 연속 제패한 이세돌이야 말로 세계 톱 플레이어의 자격이 충분한 셈. 2007년 그의 종합 전적은 81승 23패로, 다승 2위에 승률(77.8%)은 1위다. 질풍노도의 기세란 말 외엔 적당한 형용사가 안 보일 정도다.

그렇다면 이세돌에 맞설 한상훈은 어떤 기사인가. 88년 5월 생으로 아직 만으론 19세의 하이틴에 불과한 소년이다. 프로 정식 무대에 출전한 기간도 아직 만 1년이 채 안 된다. 2006년 말 프로에 입단, 3개월의 연수를 거쳐 2007년 3월부터 정식 데뷔했기 때문이다. 프로기사 연구생 퇴출 연령에 쫓겨 조바심 치다가 간신히 프로 관문을 뚫었다 해서 한창 화제가 됐었다.


입단 뒤 한상훈의 도약은 눈부셨다. 출전 한 달 만에 한국리그 본선멤버가 되더니 왕위전서 4강까지 진격했고, 꿈의 무대인 LG배 본선 상륙에 성공해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삼성화재배서도 뭇 강호들을 연파해 나가다가 8강 대열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LG배에선 끝까지 행군을 계속, 대망의 결승 고지까지 뛰어오른 것. 그 과정에서 류시훈 구리 류징 온소진 등 세계적 강자들이 희생됐다. 한상훈은 LG배 결승 진출의 ‘기적’을 이룬 직후 2단으로 승단했다. 이는 앞서 열거한 그의 대부분의 실적이 초단 신분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직상승을 거듭하던 한상훈의 기세는 이후 약간 주춤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데뷔 첫 해였던 2007년 총 전적은 48승 19패로 다승 19위, 승률은 71.6%로 6위다. 물론 대단한 성적임엔 틀림없지만 욱일승천의 기세는 다소 무뎌졌다. 무엇보다 각종 기전서 건져 올린 수확물이 기대를 밑돌고 있다. 새롭게 본선에 진입한 무대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국 이번 결승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표현해서 크게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보유 타이틀이나 과거 업적은 비교 자체가 아예 안 되고, 최근 1년 간의 실적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첫 해 신인왕에 등극하고 국내 랭킹 9위에 뛰어오른 것은 분명 경이적이지만 상대는 아득한 구름 넘어 너무 높은 데 위치하고 있다. 상식적으론 상대가 안 돼 보인다.

하지만 때론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야 말로 승부의 묘미이기도 하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상훈이 승리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우리란 점이다. 모든 경력과 데이터를 볼 때 그의 승리를 점칠 사람은 없다. 이에 반해 이세돌은 절대 패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이겨봐야 본전(?)인 쪽과 져도 본전인 쪽의 승부. 이 같은 심리적 입장 차이가 승부의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이세돌 본인도 분명 이를 의식하고 있다. 지난 해 11월 중국 후야오위와의 준결승서 승리, 한상훈과의 결승이 확정된 직후 그는 “상대가 2단만 돼도 덜 부담스러울 텐데”라고 털어놓았었다. 나이 차이보다는 단위 차이가 더 부담스럽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제 한상훈이 2단으로 승단했으니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저단 후배에 대한 부담감의 표시였을 뿐, 초단과 2단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2단만 돼도”라고 했던 그의 심정은 아마 “아직도 2단에 불과한데”로 바뀌었을 것 같다.

이세돌과 한상훈은 아직 공식전에서 한 번도 맞붙은 적이 없다. 기풍은 이세돌이 깊은 수읽기를 바탕으로 한 질풍노도 스타일로 완력 위주 힘 바둑이고, 한상훈은 균형을 맞춰가며 지구전으로 승부를 노리는 계산바둑이다. 이세돌은 1인자로 올라서면서 반면(盤面) 운영에 더욱 세련미가 붙었다는 평을 듣고 있고, 한상훈은 신인답지 않게 침착하고 좀체 흔들리지 않는 바둑으로 평가 받는다. 이세돌의 파괴력과 한상훈의 타개란 표현을 좀 더 직설적으로 바꾸면 창과 방패의 싸움이 된다.

이세돌이 이번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8관왕, 국제대회 4관왕으로 올라서게 된다. 국제 4관왕은 이창호가 춘란배 도요타덴소배 잉씨배에 이어 2004년 4월 LG배를 제패함으로써 4관(冠)째를 달성한 것이 유일한 전례다. 이창호의 3관(冠)은 4차례에 걸쳐 달성됐었다. 이세돌이 4관왕 타이기록 달성에 성공한다면 국내외 바둑계는 완전히 이세돌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될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하지만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한상훈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번 결승서 패해 준우승에 그친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 그는 기록을 세웠다. 세계대회 역사에서 최연소 결승 진출, 최연소 우승 기록은 모두 이세돌이 보유 중이다. 3단 시절이던 2001년 제5회 LG배 때 준우승했고, 역시 3단이던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와 제7회 LG배서 거푸 우승했다. 한상훈은 이미 최저단 결승진출 기록을 경신한 셈. 이번 결승 결과에 따라 최저단 우승기록 경신 여부가 결정된다.

‘성인반’ 최우등생과 ‘학생반’ 장학생이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본다면? 성인 쪽의 점수가 더 잘 나올 확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TV퀴즈 프로에선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을 제치고 곧잘 우승하지 않던가. 2억 5천만 원의 거액 상금과 앞날에 대한 ‘예약’이 걸려있는 제12회 LG배의 마지막 3연전. 동상이몽의 다윗과 골리앗이 곧 무대 위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