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컴백, 이창호의 그랜드슬램


이창호가 돌아왔다. 한 동안 침체에 빠진 채 ‘와병설’, ‘퇴조설’, ‘한계설’에 시달려온 터여서 최근 보여주는 그의 활약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신선해 보인다.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생애 첫 무관(無冠) 전락 위기에 놓였던 이창호는 7월 제41기 왕위전 우승으로 그런 우려를 잠재우더니, 8월 중순엔 국제 대회인 제3회 중환배를 품에 안으며 멋지게 복귀했다.

이창호의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그 화려함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89년 만 14세 때 ‘타이틀 수집’에 나섰던 그는 이후 매년 평균 6~7회의 우승을 추가하며 정상 퍼레이드를 계속해 왔다. 95년과 96년엔 국내외 13관왕으로 군림했고, 94년엔 국내 타이틀을 1회 이상 모조리 정복해 보는 소위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도 했다. 가장 부진했을 때라야 90년과 2000년의 3관왕 정도였다.

그랬던 이창호가 무관 위기에 봉착, 새로운 지도(地圖)가 그려져 가고 있다는 것은 바둑사(史)에 남을 만 한 사건이었다. 때맞춰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면서 이창호의 시대는 완전히 종막을 고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띠 동갑’의 젊은 후배 윤준상을 3대2로 간신히 꺾고 왕위를 지키면서 무관은 면했지만 국제 무대서 다시 정상에 선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창호가 마지막 세계타이틀을 품에 안았던 것은 2005년 3월 막을 내렸던 제5회 춘란배. 중국의 저우허양을 2대1로 꺾고 20번째 세계 정상에 섰었다. 하지만 그 후 2006년 1월 삼성화재배 결승에선 중국 뤄시허에게, 8월 TV아시아선수권에선 왕시에게 패하더니 2007년 1월 삼성화재배 결승서 다시 창하오에게 우승을 내 주었다. 지난 7월엔 박영훈과 치른 제20회 후지쓰배 결승서 또 다시 패함으로써 국제 대회 결승서만 4연패했다. 도무지 세계 최다 우승 퍼레이드 속에 천하를 호령하던 이창호 답지 않은 난조였다.

이번 제3회 중환배 제패는 이런 와중에서 이루어졌다. 박정상을 결승서 꺾고 무려 2년 반 만에 세계 정상에 복귀한 것이다. 중환배는 우승 상금이 우리 돈으로 약 5600만원에 불과한, 국제 타이틀전치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기전이다. 하지만 이 우승으로 이창호는 국내와 국외 정상을 아우르는 2관왕으로 선대(先代) 황제로서의 체면을 되찾게 됐다. 그의 통산 타이틀 수는 무려 135개에 이르렀다. 그 중 세계 우승 21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번 중환배 우승은 이런 평면적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 좀 다른 측면에서 가치를 찾을 만 하다는 뜻이다. 이 우승으로 이창호는 모든 세계 타이틀을 모조리 한 번 이상 정복하는 대 기록을 완성해낸 것이다. 그랜드 슬램이라고 불러야 할지, 사이클링 히트가 맞는지 아리송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세계 바둑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계바둑 타이틀 그랜드 슬램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앞서 조훈현과 유창혁이 각각 한 차례씩 달성했다. 조훈현의 경우 89년 제1회 잉씨배, 94년 제5회 동양증권배에 이어 94년 제7회 후지쓰배를 품에 안음으로써 당시 현존하던 모든 국제 기전을 정복했다. 하지만 워낙 국제 기전이 희귀하던 시절의 기록이어서, 단 3개봉 정복만으로 그랜드 슬램을 내세우기엔 다소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유창혁은 잉씨배 후지쓰배 삼성화재배 춘란배에 이어 2002년 LG배를 품에 안음으로써 당시 존재하던 5개 국제 기전의 최고봉을 밟는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인 98년 중단됐던 동양증권배 우승컵은 챙기지 못했다. 5개의 최고봉을 섭렵하고도 ‘현존 기전 그랜드 슬램’에 머물고 만 셈이다.

이에 반해 이창호는 동양증권배를 포함한 모든 국제기전 정상에 빠짐없이 발자국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LG배, TV아시아, 도요타덴소배, 삼성화재배, 잉씨배, 춘란배, 후지쓰배에 이어 이번 중환배 우승까지 그는 현존 타이틀 8개 모두를 정복했다. 게다가 이창호는 이미 사라진 동양증권배서도 4회나 우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조훈현도 동양증권배를 제패했으므로 이론상으론 앞으로의 활약 여하에 따라 완전 그랜드 슬램이 가능하지만 50대 중반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물 건너 간 셈. 따라서 이창호는 세계 바둑 사상 유일한 ‘진품 그랜드 슬램’의 주인공으로 남게 됐다.

물론 이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세계타이틀이 또 창설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 기전 정상 탈취에 실패하면 이창호의 그랜드 슬램 칭호 또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래의 주역을 맡을 어떤 천재기사도, 현재의 이창호가 누리고 있는 ‘올타임 그랜드슬래머’란 호칭을 부여 받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이창호의 세계 정복 역사를 타이틀 별로 살펴보면 LG배와 동양증권배가 각 4회로 가장 많다. 다음이 삼성화재배와 TV아시아선수권전으로 각 3회. 그 뒤를 춘란배 후지쓰배가 2회씩으로 따르고 있다. 잉씨배와 도요타덴소배, 중환배는 각 1회. 모두를 합하면 총 21회에 달한다. 이창호를 가장 근접 거리에서 추격해 온 조훈현의 세계 제패 회수가 11회에 불과함을 감안하면 이창호의 위대함이 새삼 확인된다.

이창호는 국내 무대에서도 현재 거행되고 있는 거의 모든 기전 정상을 밟아보았다. GS칼텍스배, 왕위, 기성, 국수, 천원, 전자랜드배, 바둑왕전, 비시카드배, 원익배 등 10개 정상이 모조리 그의 발 밑에 놓였었다. 신인 타이틀이나 노장 기전, 여성 기전을 빼면 그가 정복해보지 못한 기전은 물가정보배가 유일하다. 그는 9단들만의 대결무대인 맥심배에는 한 차례도 출전하지 않았었다.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은 GS칼텍스배, 천원, 전자랜드배, 원익배를 뺀 6개 기전 정상에만 이름을 올려놓았고, 신세대 스타 이세돌의 경우는 8개봉을 정복했지만 그 중엔 2개의 신인 타이틀이 포함돼 있다.



이번 중환배 우승은 이창호의 신화 행진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기록의 창고가 갈수록 풍성한 보화(寶貨)로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아직도 32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지금껏 이룬 일 보다 앞으로 이루어야 할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건강 이상설에서 하루빨리 탈피해 다시 예전의 무서운 연승 퍼레이드를 계속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